대한제국 의병운동의 필연적인 실패 원인
대한제국 의병운동의 필연적인 실패 원인
(펌글)
19세기 초반부터 조선은 여러 갈래로 찢겨져 있었다.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민생경제가 피폐해져 19세기 초중반 내내 전국적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경주 김씨 같은 세도 가문들은 국가 분열을 치유하기보다는 가문과 정파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찢겨진 대중의 마음을 '힐링'하고 추스르기 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세도가문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도 국론 분열은 더욱 심해져 갔다. 대중이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동학혁명을 일으킨 것은, 무장투쟁 방식을 동원하지 않고는 안 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온 나라의 마음이 제각각 찢겨나가는 양상이 갈수록 심해져 회복불능 상태가 됐기에, 대화보다는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어느 외세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놓고도 분열이 심했다. 이런 양상은 대중보다는 지배층에서 더 많이 나타났다. 지배층 역시 문제 해결을 무력투쟁에 의존했다. 청나라의 힘을 원하는 세력은 임오군란 중에 청나라 군대를 은밀히 불러들였고, 청나라의 간섭을 싫어하는 세력은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군의 힘을 빌렸다. 지금 같으면 국회에서 멱살 잡으며 따질 수 있는 문제를, 그때는 총칼을 갖고 해결하려 했다. 지배층 내부의 분열도 회복불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분열의 심각성은 동학혁명 시기에도 표출됐다. 동학군은 조선왕조의 봉건 통치도 문제 삼았지만, 그보다는 외세의 경제적 침략을 더 크게 문제 삼았다. 동학혁명의 주된 목적이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있었는데도, 양반 지배층은 그런 동학군을 향해 총칼을 겨냥했다. 동학군의 주류는 그 시대의 최대 직업군인 농민이었다. 그중에서도 소작농이 많았다. 이들이 정치개혁을 부르짖자, 지주층인 양반들이 이들을 막겠다며 나섰던 것이다.
동학군으로 참전했던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는 양반들의 민병대가 의려소(義旅所)란 이름으로 등장했다. 여(旅)는 오늘날엔 여행의 이미지로 많이 쓰이지만, 옛날에는 군대의 이미지로 많이 쓰였다. 그래서 의려소는 지금 말로 바꾸면 의병대가 된다. 외세에 맞서는 동학군을 그냥 지켜보지는 못할망정 의려소 같은 것을 만들어 동학군의 뒷덜미를 잡는 행태를 양반 지주층이 보여줬던 것이다.
분열상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극명하게 표출됐다. 정부는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일본군과 공동 작전을 벌였다. 한일동맹으로 동학군을 진압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동학혁명에 참가한 대중은 물론이고 이를 응원했던 대중도 더 이상 조선왕조를 좋게 보아줄 수 없게 됐다. 대중의 가슴 속에 광범위한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성공하고 대한제국 때의 의병은 실패한 이유
동학혁명 실패 직후에 서구식 개혁을 표방하며 등장한 독립협회 운동 과정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나타났다. 독립협회 운동의 결과로 왕정체제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고종은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 진압했다. 이처럼 나라를 염려하는 백성들을 공권력으로 짓밟는 일이 한없이 되풀이됐으니, 왕실과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성공하고 대한제국 때의 의병은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임진왜란 때는 대중과 양반의 응집이 빨랐다. 거의 다 빼앗길 뻔했던 국토를 금세 회복한 데는 이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의병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때 같은 응집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대중의 참여와 지지 면에서 임진왜란 때를 따라가지 못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는 전쟁으로 격파했지만, 조선과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조선을 손쉽게 장악했다. 조선이 그 정도로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쉽게 망한 것은, 국론이 분열돼 있어서 백성들이 왕실을 위해 목숨을 걸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멸망으로부터 불과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부터 2개월간, 2천만 한민족의 최대 10%가 일본에 맞서 조직적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정도 역량을 갖춘 대중이, 왕조가 망하던 1910년에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19세기 초중반 내내 끊임없이 민란을 일으키고, 19세기 후반에는 임오군란도 일으키고 동학혁명도 일으키고 독립협회 운동도 일으켰던 대중이 1910년에는 관망 자세를 취했다.
이는 백성들의 마음이 갈래갈래 찢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악(惡)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지만, 공권력을 가진 왕실과 정부는 그때마다 총칼로 진압했다. 힘이 부족하면 외세를 불러서라도 진압했다. 그래서 일반 대중 입장에서는 나라에 애착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1910년에 조선이 허무하게 무너진 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