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칼럼]

비전없는 농촌에 왜 사냐고

농자천하/ 2019. 1. 29. 21:47

햇수로 19년차, 이건 무지 부끄러운 거다, 거의 한 번도 면소재지 지역교회로서의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이, 지탄만 받던 교회, 토질이랑 종자부터 바꿔내다가 배터리는 방전되고, 더구나 농촌증발의 시대를 맞고 말았다, 처음 왔을 때 딱 2년만 있다 떠나지 못하면 난 아마 여기서 순교?하겠구나고 감이 왔던 게 맞는 거였다, 어떤 지인들은 그런다, 왜 그 비전없는 시골에 파묻혀 사냐고, 하, 그 비전이란 게 대체 뭐지?

웃으며, 도시에 사는 중생들도 좀 돌아봐 달라?던 벗들도 있었다, 견디다 못해 대도시로 나가는 몇몇 분들은 머릴 흔들며 다들 그랬다, 차라리, 딴 데로 가시라고, 외부에서 만나는 분들은 그랬다, 그 반의 반만 해도 웬만한 교회 뒤집어질 거라고(좋은 의미로), 사정을 아는 누가 묻는다, 그 동안 어떻게 버텼느냐고, 이임 요청도 4-5년에 한 번씩은 있었다, 누가 들으면 미쳤냐고 할 교회(그 까이 게 뭐)에서도 한두 번 있었다,

나는 지난 서너 번의 경험으로 나름 원칙을 세우고 왔다, 더 어려운 곳이면 어디든 간다, 다만 무슨 스카웃?하듯 오만 떠는 교회는 내가 퇴짜 놓는다, 남이 부러워할 곳에도 되도록 가지 않는다, 그거 몇 번 겪어보니 참 더러운 거였다, 지금 있는 곳에 다른 누군가를 보내셨을 때 적어도 내가 씨름해야 했던 어이없는 일들은 겪지 않게 해 놓고 그러고서 제발 이임 명이 떨어지기를 빌며 살았다, 당연히 줄곧 현재진행형이다

햇수로 19년 차다, 토질도 종자도 새로워지는데, 누군 그런 농촌교회 여기까지 온 것만해도 대단한 성공?이라지만, 삼가 나의 하느님 은총 안에는 공짜 이적이라는 건 없다, 그랬더라면 저 십자가부터 결코 세워질 리가 없는 거다, 돌이켜 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단 하루도 어딘가에 정착하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다음에 와서 복음사역에 매진하는 이는 이런 끔찍한 비본질적인 것들과 피흘려 싸우지는 않게 되기만 바라며,

나는 매일매일 생각했다, 그러지 못하는 한 나는 죽어도 못 떠나, 적어도 내 손으로 장례 치러 놓기 전에는, 아니면 차라리 교회 설립예배 드리듯 내 손으로 교회 폐쇄예배 드리기 전에는,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불러 쓰시겠다는 명을 마다 하겠는가,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을 두고 묻는다, 그것이 왜 그러냐고, 그런데 나는 세상에 거의 한 번도 있지 않았던 것을 두고 묻는다, 왜 그것이 안 되냐고,

희망해 내려는 용기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용기보다 천 배는 더 고통스럽다, 그렇게 절실히 경험된다, 내게는, 모든 보이는 것들을 회의하기, 한 5년은 넘은 무슨 가전제품 하나 고치러 갔더니 벌써 골동품이에요 기사가 웃는다, 실재보다 더 선명한 티브이 대형 모니터로 뱃멀미가 난다, 겨우내 노인병원과 독거 농가들을 순회 한다, 간신히 하루를 견디는 갈탄 난로처럼 독거 어르신들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 누가 그랬나, 사는 게 은총이라고, 그건 다 살만한 이들의 얘기, 이건 분명 형벌인 게다, 스물여섯살 떨리는 심정으로 아주 작은 교회 하나 맡았을 때부터,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受室潛伏'의 수실이 밭고랑이 되고 마을 길이 되고 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속 현장이 된지 오래다, 겨울 가뭄으로 아직 제대로 한 번 얼어붙지 못한 황토밭둑에 새파란 냉이들이 자라고 있다, 그래도 최근에 두 분이 또 세례를 자원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