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요즘은 없는 이런 목회"
요즘은 없는 이런 목회
‘장례식이 진짜 목회’라는데 요즘은 장례전문업체가 대신하는 형국이 되어 아쉽기 그지없다. 장례식 앞에서는 누구나 독실해지기 마련이고, 별세하는 분이 소망 중에 임종하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목회자 고유의 역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농촌교회를 섬기던 스물아홉의 신학생 전도사였을 때, 첫 번째 임종을 보고 직접 염습을 하여 장례를 모셔야 했다. 그 이후 손수 염습을 해 드린 분이 스무 분이 넘는다. 유난히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25년 전 목사 안수를 받던 해는 사상 초유의 가뭄이 전국을 덮쳤고 폭염으로 여름은 길기만 했다. 마을 이장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가보았더니 혼자 사시던 어르신이 이미 돌아가신 지 나흘이나 되어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교회를 몇 번 다니신 적이 있던 분이라고 했다.
시신은 이미 부패하여 모두들 멀찍이 서 있었다. 마을 파출소에 신고하게 하고 굽은 상태로 굳어버린 몸을 오래 주물러 곧게 펴는데 무릎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발목과 무릎 위를 헝겊으로 꽉 묶고는 장로님을 불러 발을 붙잡게 한 뒤, 무릎을 밟고 올라선 채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큰 목소리로 찬송을 여러 번 부르다가 목이 꽉 메었다. 밖에 있던 마을 분들도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양복이 완전히 땀으로 젖었지만, 이장님이 농협에서 얻어온 수의를 차곡차곡 입혀 정성껏 입관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비로소 지독한 냄새가 콧구멍으로 훅 들어왔다. 손을 씻고 나자 괜찮다는 데도 이장님이 ‘고생하셨다’면서 자꾸만 돼지고기 한 첨을 새우젓에 찍어 입에 넣어 주었다. 목청을 다해 마을 분들 다 듣도록 설교를 하며 임종 겸 입관 예배를 드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낡고 허름한 대문간에 한 중년의 남자가 혼자 서 있었다. 연락을 받고 도회지에서 부랴부랴 달려온 미혼의 외아들이었다. 오랜 가난이 몸에 배어 있는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거친 손으로 아무 말이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다음 날 아침, 장지로 가는데 중년의 ‘마을 청년회’에서 상여를 메고 앞장섰다. 요즘같은 장례식장 문화가 없던 시절, 농촌교회에서는 상여를 멜 만한 젊은 교인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마을과 협력해야 했다. 눈치를 보는 상여꾼들에게 괜찮다고 원래 하던 대로 편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드디어 구성진 상여 가락이 흔드는 요령 소리와 함께 산으로 가는 내내 골짜기에 퍼졌다. 그 후로 나는 갑자기 그 마을에서 꽤나 존중받는 젊은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칼럼은 우리 주보에 싣기 조심스럽다. 지금 남아계신 어르신들과 거의 매 주일 약속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백 세 못 넘기면 반칙이유! 맘 단단히 잡숫고, 지금부터 2~30년씩은 더 사실 각오들 하시유! 이 고생하면서 다시 세우는 교회가 어찌 될 건지 보셔야 잖유!”그런데 이런 말씀을 다들 은근히 좋아하시니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