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4
한마음 칼럼 : “왜 농목으로 사는가? 4”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미루어 짐작 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성탄절을 앞두고 그 귀촌한 집사님 내외는 내 아내를 불러 어려운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적잖은 금액이 담긴 봉투를 두 번이나 주었었다. 우리는 그 돈을 한 푼도 어김없이 전액 교회 비품 구입과 교회 아이들 선교비로 모두 사용하면서 주보 광고에 냈던 것이다.
그랬으니 그처럼 어이없는 짐작도 가능하겠다 싶지만, 당시 우리는 이전 교회에서 받은 5백만 원이 넘는 퇴직금을 이미 선교비로 모두 소진하고 있던 터였기에 그런 식의 의혹제기 자체에 크게 실망하고 말았었다. 교회 복사기, 컴퓨터, 프린터, 디지털 카메라, 앰프 및 마이크, 음악 밴드용 각종 악기들과 관련 기기, 탁구대, 축구 야구 용품, 교육용 컴퓨터 12대, 대형 TV, 공부방용 탁자와 의자, 영어 교육 교재 등등을 구입하였고 부여 박물관부터 서울 KBS 방송국과 국회 탐방까지 온갖 곳을 방문하는 현장체험학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의혹을 만들어 부풀리던 당시 시무 장로는 가끔 들러 도끼눈으로 시설들을 살피며 아이들에게 ‘오늘은 간식을 뭘 사주더냐? 지난번에는 어디 다녀왔냐?’는 식으로 뒤를 캐듯 묻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쓰러지지 않는”복음전도자로 소명을 받고 부임한 것 아니던가!(고후 4,7-10)
그때 교회 승합차는 도저히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 현장학습을 다닐 수 없을 만큼 낡고 오래된 것이어서 늘 걱정이 많았는데 그 집사님 내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신들이 약속한 십일조는 중국 선교사에게 보냈다며 대신 5백만 원을 선교비로 헌금했다. 제직회를 열어 새 승합차를 ‘아동보호차량’으로 구입하되 그 헌금을 차량 인도금으로 쓰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여 노란색 승합차가 생겼고, 설과 추석 명절 외에 1년 360일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 4년 동안 ‘상설교회학교’곧 ‘지역 청소년-아동 보호센터’를 운영했다.
30여 명의 아이들이 매일 학교를 마치면 교회당에 모였다. 각종 교육 비품 구입비 외에 적잖은 아이들 간식비가 매일 지출되었다. 부임한 다음 해 여름방학이 되자 가지고 있던 비용이 바닥나 버렸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처음으로 대도시의 교회들에 선교비 지원 편지를 보내 보았다. “우리는 교역자 생활비가 아니라 지역사회 선교비가 필요합니다. 교역자 생활비를 감당하더라도 자기 지역을 스스로 선교할 수 없는 교회가 미자립 교회입니다. 안타까운 우리 지역사회를 선교할 기회를 귀 교회에 드리겠습니다.”
동료 목사들은 이런 말들을 했다.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요? 우리랑 비교 되게! 우리는 그냥 다 삯꾼이 되는 거 아뇨?!”그럴 때마다 대답했다. “오죽했으면! 그리고 이게 당연한 거 아녀?”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인 이상, 이래야 하는 게 아닌가?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