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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을 산다는 것 - 이만열 교수

농자천하/ 2019. 10. 27. 20:35

 

[20191026 ‘10.26’을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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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40년 전 1979년 이날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었고, 110년 전 1909년 이날에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르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포살되었다.

 

해학과 재치를 겸한 어느 네티즌은 이날을 ‘탕탕절’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럴 듯하다. 시의에도 맞는 촌철살인의 그 기지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네티즌은 이 두 사건에 더해 10월 26일의 역사적 사실을 더 밝혀냈다.

 

1920년 이날은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청산리대첩을 세운 날이고, 더 올라가 1597년 10월 26일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일본의 수군을 격파한 날이란다.

 

‘탕탕절’을 명명한 네티즌은 이렇게 기지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인식에도 해박한 듯하여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40년 전 10월 26일, 당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몰랐다. 그 이튿날 새벽 외우 진덕규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새벽에 전화를 하다니, 평소에 없던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교수, 놀라지 마소, 박정희가 엊저녁에 피살되었소, 알고만 계시이소”라고 했다.

 

나는 “아니, 어제 지방에 내려가 무슨 행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하면서 더 확인하려고 했으나 그는 더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 날 우리는 유신의 화신 박정희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1년 군사쿠테타로 집권한그는 1972년 소위 ‘10월 유신’을 통해 종신토록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고, 국회도 마음만 먹으면 의원 3분의 2를 확보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거기에다 9개나 되는 ‘긴급조치’라는 걸 만들어 ‘유신체제’를 담보한 헌법을 고치자는 소리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는 그런 막강한 권력도 갖고 있었다.

 

긴급조치는 말하자면 초헌법적인 것이었다. 그런 무소불능의 권력이 하루 저녁에 폭망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박정희 통치의 18년은 그렇게 해서 끝났다. 역사에 ‘10.26’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사정권이 끝나지 않았다. 그 해 ‘12.12’를 통해 파쇼적인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하여 군사정권은 그 뒤 거의 10여년간 더 계속되었다.

10월 26일 어제 오후, 나는 여의도 근처 당산동 소재의 두레교회(담임 오세택 목사)에 가서 ‘교회개혁의 문제’를 가지고 강연했다. 그 교회는 10월 마지막 주간에는 종교개혁을 기념하기 위해 필요한 행사를 해 왔다고 한다. 나는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모인 광화문 집회를 소개했다.

 

거기에는 자유한국당의 대표 황교안과 나경원도 참석했단다. 그 집회의 광고전단지에는 “대한민국 망했다!”는 섬뜩한 말에다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고 슬쩍 본회퍼를 끼워넣은 후 <문재인 하야 7가지 이유>를 나열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철야기도회를 한다는 것이 명분인 듯했다.

 

이런 거짓선동에 귀기울일 자가 없는 듯하지만 ‘믿기만 하라’는 말씀에 순치된 듯한 이 땅의 기독교인들과 전도사로 자처하는 야당 대표는 그 거짓 선동이 사실이기를 기대하듯 밤새 그 선동이 실현되기를 기도한 모양이다.

 

보수교단 소속의 목사이며 새물결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김요한 목사는 이 전단지를 두고 “이런 것은 내란선동으로 처벌해야 합니다”란 지적과 함께 덧붙이기를 “행사 마지막 순서가 박정희 추도식이랍니다. 목사 새끼들이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갈했다.

 

이것이, 한말 반봉건 운동에 앞장 섰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신사참배반대투쟁에 앞장 섰으며, 유신 군사독재하에서는 인권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던 한국 기독교 후예들이 하는 짓거리가 맞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교회개혁이 필요하다면, 이같은 거짓선동에 미친 듯이 날뛰는 소위 기독교인 때문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강연 서두에 나는 루터의 개혁이 갖는 의미를 몇 가지로 설명했다. 특히 루터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에서 강조한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을 강조했다.

 

그 요지는 크리스천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교통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적 존재, 성직자 계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목회자 의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자들의 신앙적 독립성 배양에 소극적인 한국 교회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인사제설은 일반 신앙인에게 사제와 같은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이 주일날의 성직자의 삶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신자들의 매일의 삶이 주일날의 사제들의 삶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 나아가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으로서 성속(聖俗)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모든 직업은 그것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하면 그것이 곧 성직(聖職)이요 세상을 예배로 가득 채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는 것도 지적했다.

 

강연과 질의응답을 모두 마치니 5시가 거의 되었다. 오후에 이곳으로 올 때는 저녁 때 여의도 촛불집회에 참석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3시간에 걸친 강연 일정은 내 계획을 수정토록 만들었다. 이제 내 몸도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비감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교회에서 배려한 차량을 이용하여 양화대교를 둘러 집에까지 이르러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녁에 지인으로부터 여의도 촛불집회의 동영상을 받으니 한편 미안하고 한편 대견스럽다. 뿌듯함을 금할 수 없다.

 

같은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시대적 사명을 의식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추스려가는 것을 의식하면서 며칠 사이 가라앉았던 마음에 새로운 활력이 솟는 것 같았다. 손에 손잡고 다 같이 우리 시대의 개혁적 사명에 주저하지 않는 것, 이게 ‘10.26’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