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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농자천하/ 2020. 6. 3. 14:28

https://news.v.daum.net/v/20200602121749874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 의외의 응답 편
-〈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시사IN〉은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기획했다. 한국인들은 개방적·수평적이어서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했을까, 순응적·수직적이어서 성공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결과는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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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 사회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시사IN〉과 KBS는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공동으로 기획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이 많았으므로 문항을 대규모로 써야 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의 웹조사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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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코로나19가 유럽과 미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제 미묘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이 민주적 개방성과 투명성 덕분에 성공했다는 해석을 고수하면, 미국과 유럽이 그에 못 미친다는 뜻이 된다. 이때부터 한국의 방역 성공을 ‘감시국가’ ‘통제사회’ ‘동아시아적 집단주의’ 등으로 설명하는 시도가 일각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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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방역 참여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 가능한 변수를 최대한 많이 검토했다. 권위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중 누가 더 방역에 적극 참여할까? 개인주의자와 집단주의자는? 정치 성향상 우파와 좌파는? 순응적 성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는 성향과 그렇지 않은 성향은? 결과를 알고 보면,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답을 모르던 5월1일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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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국면에는 대단히 독특한 합의가 존재한다. 코로나19는 치명률은 높지 않은 반면 전파력은 대단히 강해서, 개인 건강보다 사회관계에 끼치는 파괴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감염을 조심해야 하는 핵심 이유는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고,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코로나19 방역이란 질병을 회피하거나 건강을 염려하는 태도보다도,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가는 싸움에 더 가까워진다. 민주적 시민성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서 확인된다.

공동의 목표를 앞에 두고 함께 싸워나가는 경험, 공동체에 중요한 일에 참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전시에 사람들이 들뜨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에서 시민들은 전시 고양감을 저강도로 경험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역 참여를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방역 지침을 내가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96%, 우리나라 국민이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82%다. 일종의 ‘전우애’가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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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국면에서는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뢰가 크게 상승했다. 심지어 세금조차 그렇다. 세금 관련 질문에서 신뢰도가 올라갔다고 답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데,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 방역 공공재가 잘 생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부가 매끄럽게 작동했다고 평가하는 한국인들은 공적 제도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전시 고양감과 한 쌍으로, 전시 사령부에 대한 신뢰다.

그 결과, 한국은 해묵은 선진국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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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시민성이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는 좋은 시민’을 뜻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체’의 폭과 깊이다. 이 공동체는 넓어지고 있는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우리끼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는 깊어지고 있는가? 감염병 특유의, 낯선 사람을 밀어내려는 힘과 민주적 시민성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이런 복잡한 질문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코로나19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아직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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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석

한 사회조사 결과를 보고 느낀 소감

대체로 사회조사는 이미 직관으로 인식한 견해를 경험 자료로 지지하는 결과를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이미 추정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되기 십상이다. 물론 사회조사 전문가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임동균 교수 조사팀의 사회조사 결과를 보도한 의 기사를 훑어보았다. 코로나위기 이후 내가 그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이미지와 대동소이하다. 나는 한국 사회가 개인의 자유-자율과 공공성이 함께 정립된 그런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19세기 근대 국민국가가 추구했던 '이념형'이다. 오늘날 근대 국민국가의 고향인 서구사회에서 이 두 가치체계의 파탄을 목격한다. 오히려 근래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공적 헌신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교수 조사팀의 결과는 민주적 시민성과 개방적 수평주의 의식이 높은 사람일수록 코로나 방역과 위기 대응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이 방역과 위기 대응을 위한 여러 책무에 더 소홀하고 있다는 것이다. 4월 총선에서 윤석열이 비닐장갑을 끼지 않고 투표를 하고 있는 모습을 tv에서 잠깐 보았는데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중국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감시체제를 동원해 코로나 위기 탈출에 성공한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전체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개인은 어둠 속에 은폐되었다. 시진핑 정권이 내세우는 국가적 효율성은 역사의 다른 국면에서는 질곡으로 변하기 쉽다.

위기에는 순응하겠지만, 그 감시체제는 공포, 눈치보기, 불안의식, 사회적 스트레스, 불만 등 다양한 불안요인을 유발한다. 집권층은 이 불안요인이 실제 불온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회 전체를 감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항상적으로 감시체제를 작동하고 강화하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갈수록 증가한다. 시진핑 정권이 미-중 체제경쟁에서 자국 통치체제의 우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국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원리가 오히려 서구보다 한국사회에서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인데, 나는 이 새로운 분위기와 집단적 태도가 한 세대 이상 지속된 민주화운동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그 경험의 시간적 공간적 전승, 그리고 광우병 시위에서 최근 촛불혁명까지 이어진 시민 직접참여를 통한 개혁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주 새로운 현상이다. ‘나’의 자유와 자율을 중시하는 것만큼 공동체의 안전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널리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무능한 정권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끌어내리기도 했다. 그만큼 민주적 시민성이 고양된 것이다.

자, 코로나 이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이 논의하고 고심할 문제다. 문명사, 세계사적 변환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지향성을 보이고 있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거대담론이면서도 동시에 촉박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둘러싼 논의가 무엇보다도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그보다도 정치권이 긴장해야 한다. 야당도 나름대로 변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이 정신 차리려면 탈태환골의 대변혁을 스스로 치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정부-여당이다. 현 집권층은 이전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어떤 사회인가.

역사에서 하나의 이상적 형태로만 생각했던 것,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자율을 중시하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며 행동하는 민주적 개인, 그러나 공동체와 공적인 것에 항상 관심을 갖고 그 일탈을 감시하는 공적 가치체계의 담지자로서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개인, 바로 이런 성향의 개인들이 주류로 발돋움하고 있는 그런 ‘사회’를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조중동’이 그렇게 악을 쓰고 외쳐대도 그들 의도대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은 불행하게도 바로 이 ‘새로운 사회’를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 교단과 대형교회 목회자들 또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고심해야 한다. '순한 양을 이끄는 목자'로 자처하는 그들에게는 한 마디로 ‘처참한 현실’이겠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