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우리의 밥, 밥상(床), 밥상 공동체 - 2.6.
[ 제 2 장 / 2.6. 오늘의 밥, 밥상 신학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2.6. 오늘의 밥, 밥상 신학
한마음교회가 지금 당장 실천해 갈 수 있는 성서적 대안이라고 논자가 제안하고 있는 이 ‘밥상 공동체’를 위하여 앞으로도 ‘외래 언어’인 ‘기독교 용어’들보다 지금껏 살아온 마을 속의 언어 곧 ‘이 땅의 언어’에 더 익숙한 원주민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의 더 많은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오늘 우리 현실에서의 밥과 밥상을 조금 더 살펴본다. 최시형이나 류영모 이후, 밥에 대한 사회적 철학적 통찰을 이야기한 사람은 한때 저항 시인으로 알려졌던 김지하이다.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은 밥상 공동체를 논하면서 김지하의 시를 인용한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115) 김지하는 그의 이야기 모음집 『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안에는 말도 소도 풀도 흙도 새도 바람도 다 삽니다. (...) 바로 그런 점에서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라는 참뜻이 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밥이며 동시에 하늘의 밥ㆍ생명의 밥, 일해서 벌고 그래서 반드시 자기가 되찾아야 하는, 사람이 먹어야 사는 바로 그 밥이면서 동시에 인간들이 가장 어마어마하게 고상한 것으로 보고 있는 소위 영성ㆍ하늘ㆍ한울님, 바로 생명 - 이런 것들이 바로 나다, 즉 밥이다‘라는 그런 얘깁니다. 따라서 밥은 바로 생명이요 생명은 또 밥이며, 식사는 제사요 제사는 식사이며, 하늘은 땅이요 땅은 곧 하늘입니다.”116)
이처럼 김지하에게서 해월 최시형과 다석 류영모가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찍이 류영모를 연구해온 박재순은 다음과 같이 밥은 역사와 사회의 차원을 지닌다고 한다.
“밥 한 그릇에 농부의 땀과 희생이 담겨있다. 사회의 정치경제 구조, 정부 정책이 담겨있다. 세계 정치경제가 담겨있다. (...) 밥 한 그릇을 놓고 치열한 경쟁과 투쟁이 전개된다. (...) 인간은 서로를 먹으려 한다. 서로 이용하고 서로 누르려 한다. 그래서 밥의 독점이 이루어지고 밥의 불의가 생겨난다. 밥의 불평등, 밥의 억압과 착취가 있어서 굶주림이 있다.”117)
“류영모는 밥을 평화와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11일 세계평화기념일 강연에서 그는 ‘사람 마다의 입이 밥으로 배가 부르면 평화롭다’고 말했다.”118) 박재순은 류영모의 밥 평화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음과 같이 밥상 공동체의 원형을 성서에서 발견한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수탈이 없는 나라였다. 이스라엘의 통치자 야훼는 땅과 땅의 생산물이 특권층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임을 법으로 선언하는 하느님이다.(레 25,23이하; 민 26,52-56; 33,53이하; 수 13,18; 신 3,28). 땅의 진정한 주인은 야훼이므로 (...)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유롭고 평등한 밥상 공동체였다. 그것은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토대로 세워진 대제국들의 강고한 체제를 뚫고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굶주린 민중이 이룩한 생명ㆍ정의ㆍ평화 공동체였다.”119)
2.6.1. 밥상 공동체
그리고 박재순은 ‘밥상 공동체’ 대해서 이렇게 논한다.
“밥은 나와 남을 사회적으로 결합시킨다. 밥을 생산해서 남을 먹여 살림으로써 남을 섬기고, 남이 생산한 밥을 얻어먹음으로써 생명의 빚을 진다. (...)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라면 인간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밥상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 하느님 나라요, 밥을 독점하는 곳이 지옥이다. 인간은 밥을 독점함으로써 하느님을 떠났고 밥을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돌아간다. 밥을 독점함으로써 타락한 인간 역사는 밥을 나눔으로써 구원된다. 밥을 독점함으로써 짐승 이하로 전락하고 밥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또는 딸, 참 인간)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연다. 밥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민중의 땀과 고난을 내포한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다.”120)
1970대에 아시아교회협의회의 도시농촌선교회(CCA-URM) 위원장을 지낸 다케나카 마사오121)는 그의 책 『하느님은 밥이시다(God is Rice)』122)에서 벼농사 지역으로서 밥이 일용할 양식이며 동일한 한자(漢字) 문화권인 아시아와 일본이라는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 읽어내기를 이렇게 시도한다.
“평화(平和)를 뜻하는 한자 ‘화(和)’는 곡식 낱알을 뜻하는 부수인 화(禾)와 입을 뜻하는 구(口)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평화는 곡식의 공평한 분배나 사람들 사이의 지속성 또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밥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면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이들의 입이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질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지상에서의 평화를 맛볼 수 있다.”123)
민영진 교수는 (호세아 2,21-22)124)의 본문을 통해서 예언자 호세아가 보여주는 구원의 날에 대하여 말한다, 호세아서에서 보여주는 구원의 날은 하느님과 자연이 특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축인 집짐승이 농민의 요청을 들어주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굶지 않게 된다는 특징을 갖는데 모든 백성이 배부르게 먹고 추위를 막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호세아 예언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굶주린 백성들의 절규, 먹을거리를 달라는 아우성이 하느님을 향하여 외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것이 하느님께 들렸고, 하느님이 그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 계약(신약)시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한다.125)
“교회에서 하는 예배 때의 기도만이 응답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론 다행히 교회는 이러한 특권을 부여받지도 않았지만, 만일 그랬다면 너무나도 많은 신음과 절규와 탄식과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들리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 인간의 요청과 탄식이 하느님께 들려진다는 것, 더욱이 전혀 하느님을 향해 외친 것도 아닌데도 그 비명이 인간의 이웃인 동물과 땅과 하늘과 같은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들리고, 또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통찰이다. (...)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울부짖음과 비명은 농민과 함께 사는 가축이나 유목민이 밟고 돌아다니는 땅이나 그들이 이고 사는 하늘을 통해서 반드시 하느님께 전달되고 그리고 응답된다는 희망을 밝히고자 함이다.”126)
서광선 교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선포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선언」127)은 평화와 통일을 부르짖는 한국 민중의 현실에서 나온 그리스도 고백이라고 평하면서 ‘밥상 머리인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한국 기독교의 선언문은 그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분단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고백한다. 개혁신앙의 ‘왕’의 모습이나 ‘제사장’ 모습이 오늘의 한반도와 세계 분단 현실에서 ‘평화의 종(從)’으로 그리고 원수 된 자들이 화해와 대화를 위하여 한자리에 모이는 ‘밥상머리의 주인(초대자)’으로 부각 된다.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향하여 한자리에 모이는 ‘밥상 공동체’에서 우리는 예수를 고백한다. 성서는 예수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사람으로 말한다. 예수는 잔치를 좋아했다. 하느님 나라를 잔칫집과 비유했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공급했고, ‘밥상의 머리’로 함께 먹고 이웃을 대접했다.”128)
물론 ‘밥상머리’라는 우리말은 ‘밥과 찬을 차려 놓은 밥상의 한쪽 모퉁이나 그 가까이’라는 뜻인데, 서광선 교수는 예수가 밥상공동체의 ‘머리’였다고 하면서 나아가 자신을 그 밥상 공동체의 ‘먹이’ 곧 ‘밥’으로 자신의 피와 살을 제공하기까지 하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밥상이요 밥이요 밥상의 종’이라는 고백을 우리가 성서에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웃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을 때 거기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예수를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은 밥입니다. 그리고 밥상 공동체가 예수님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엠마오로 가는 길 저녁 식탁에서 두 피난민(민중)이 만난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잡이하다가 지쳐 있는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는 바닷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굽고 빵을 마련하고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을 집어 주셨다. 우리가 모여 앉아 함께 먹는 것을 예수는 원하시며, 또 거기에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는 바로 거기에 예수는 현존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129)
그리고 서광선 교수는 평화의 종으로서 예수는 부활하여 다시 밥상을 나눔으로써 밥상 공동체를 일으켰고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을 극복하는 일 또한 그리스도를 밥상 공동체에서 만나는 믿음과 희망으로 고백하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예수의 밥상 공동체는 엠마오로 피난 가던 두 사람이나 열두(열한) 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병이어 또는 칠병이어의 표적에서 5천 명과 4천 명의 굶주린 민중이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가 그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 큰 무리는 오클로스이고 민중으로 여기에는 남녀노소 곧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어린이와 여성까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들어 있고 지방색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집단이라고 한다. 이것이 밥상 공동체이고 민중의 공동체이고 나아가서 민족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함께 나누어 먹는 평화의 식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나눔 속에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을 극복한 화해와 민중의 통일은 그리스도를 밥상 공동체에서 만나는 믿음과 희망으로 고백 될 수밖에 없다. 남과 북으로 헤어진 식구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화해의 주님으로 고백할 것이다.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성찬식 밥상에 함께 앉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실 때 그리스도를 평화의 종으로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평화의 종, 밥상 공동체의 주인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민족의 밥상 공동체로 함께 모이자고 호소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130)
2.6.2.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밥을 주소서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주의 기도 해설’은 오늘 우리에게 더없이 귀중한 핵심을 알게 해준다. 그는 주의 기도에서 드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탄원이 ‘주기도’에서 한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한다. 주의 기도는 초월자(하늘에 계신)인 동시에 가까이 계신 분(우리의 아버지)이 언제나 우리의 모든 현실로부터 거룩하신 분이라는 마땅한 존숭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현실도 거룩한 세계여야 함을 기도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반드시 도래해야 하며 우리 가운데서 역사화 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은 다름 아닌 우리의 땅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기도한다. 그리고 둘째 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데 그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을 담지하고 또 촉구하는 내용이다. 보프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 필수적인 밥, 동료 간의 친교 관계를 분열시킨 데 대한 용서, 유혹에 대항하는 힘,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그것이다. (...) 둘째 부분에는 어떤 신비화나 정신화도 없다. 여기에는 영원히 위협받고 있는 역사적인, 하부구조적인, 생물학적인, 그리고 사회적 구체성으로서의 인간의 삶이 있다. 그것은 인간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하느님 역시 연루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구체적인 인간의 삶은 기도와 탄원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 물질과 정신, 인간과 신의 확실한 연합이 바로 화육의 신비로부터 나오는 힘이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물질과 정신, 인간의 본성과 우주, 피조 세계와 창조자가 서로 맞물린다. 그렇다면 주의 기도 안에서 양자가 결합 된다고 하여 놀랄 일은 못 된다. 여기서 지존자가 땅의 가장 밑바닥의 현실과 만나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분명하며 평범한 것 -‘밥’- 은 하느님 앞에 그리고 동시에 인간 앞에 위치하고 있다.”131)
보프는 이 ‘밥’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성분 이상인 것으로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양식의 상징 곧 “생명의 떡/빵/밥”(요 6,35)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은 신적 현실의 전달 수단이 된다: 그것은 성례전적이다. 밥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영원한 양식의 현세적인 상징이다. 밥은 삶의 완성에 대한 약속의 전달 수단이다. 나아가 밥은 바로 지금, 이 굶주린 순례자들의 여정의 한복판에, 완전히 만족시키는 양식 - 즉, 예수의 그의 나라 -을 현존하게 해 준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극히 자연스러우며 단순한 한마디의 말, ‘밥’에 내포되어 있다.”132)
그런데 보프는 주 기도의 다른 부분들에서 강조한 것처럼 ‘일용할 양식’ 곧 ‘밥’에 대한 탄원에도 역시 ‘우리’라는 핵심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밥에 대한 욕구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 욕구의 충족은 어느 한 개인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밥이 한 개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농토에서 또 가공하고 그 밥을 짓고 상에 올리는 현장에서 온갖 노동과 수고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밥은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더구나 예수는 자신의 ‘주의 기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게 한다.
“예수의 기도에서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예수와 더불어 우리는 인간의 형제의식에 온전히 눈뜨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한 아버지가 있다 : 그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모두 그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저 혼자서 배를 채우는 것은 형제자매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필요한 영양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동체적 행동이요, 친교의 의식이다. (...) 밥은 서로 나누어 먹고 친교의 끈을 더 튼튼히 해주는 한에서만 인간적 양식이다. (...) 이처럼 일용할 양식은 그 빛과 그림자 속에 인간 세계 전체를 끌어안고 있다. 함께 생산한 이 밥은 분배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소비되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실되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요구할 수 있다.”133)
2.6.3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 자
그런데 사실, 이 ‘밥’ 또는 ‘밥상’의 문제는 하루하루 평범하게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 배고픔을 해결하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화목한 가정의 상징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의 추악한 본성의 구조적인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전 세계의 사회적 문제로 노정 되었고, 나아가 또 다른 불의한 지배체제를 지구상에 불러와 ‘식량 주권’ 또는 ‘주체적 식량 권’이 세계적으로 이슈화된 지 오래다. 캐나다의 농업 기업에 관한 주요 분석 비평가인 브루스터 닌(Brewster Kneen)은 식량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거인(Invisible Giant) 카길(Cargill)’134)의 음모를 파헤친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먹을거리는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구조를 반영하며 그 구조가 전부 합쳐져 나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 우리의 밥상은 여전히 세계에 존재하는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부국과 빈국 사이는 물론이고, 한 나라와 지역 안에서도 밥상의 차이는 곧 삶의 격차다.”135) “카길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가능한 많은 나라와 지역의 농업 정책을 결정해 나갈 것이다. 농업 정책에서 담당하는 대중의 역할이 수동적인 소비자의 역할로 국한되어 있는 한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 우리는 우리와 다음 세대들의 생활방식과 식량문제에 관련된 근본적인 선택사항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권은 결코 카길이나 여타의 다국적 기업에 맡겨서는 안 될 우리의 권리이다.”136)
그리고 이 책의 한국판 보론(補論) 「한국의 밥상을 그들이 지배하도록 놔둘 것인가」에서 ‘식량의 무기화’를 넘어 지난 2006-7년에 발생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후폭풍으로 미국의 금융시장에서 빠져나온 국제 투기자본들이 식량을 투기 대상으로 삼아 전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식량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면서 제시하는 자료들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불과 최근 1년 사이에 미국산 쌀값은 57.8%, 태국산 쌀값은 59.0%, 베트남 쌀값은 65.0%나 올랐고 옥수수는 36.9%, 대두(콩)는 81.7%, 소맥(밀)은 169.8%나 올랐다. (...) 가격이 폭등하면서 식량 수입국들 개발도상국과 극빈국에서는 크고 작은 폭동과 소요가 일어나고 있으며 약 10억 명 이상의 절대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웃는 자가 있다. 국제 곡물 시장의 지배자, 먹을거리의 지배자인 곡물 메이저들이다. 2008년 4월 30일 자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최대 곡물 메이저인 카길은 2007년 12월에서 2008년 2월까지 단 3개월 만에 무려 10억 3천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순이익에 비해 86% 증가라는 엄청난 기록이다. 세계 최대의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조작농산물 또는 유전자재조합식품)137) 종자 생산업체이면서 카길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는 몬산토 역시 같은 기간에 11억 3천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려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했다.”138)
그리고 그러한 곡물 메이저들이 국제 곡물 시장에 행사하는 지배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한다. 세계 식량 총생산량 가운데 약 12~13%에 해당하는 약 2억 5천만 톤 정도가 국제 곡물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데, 이 거래량의 약 80% 정도를 5대 곡물 메이저139)가 취급하고 있고, 5대 곡물 메이저 중에서도 카길의 시장지배력은 단연 압도적인데 국제 곡물 거래의 약 40%를 카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 곡물 거래의 80%를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이들 곡물 메이저의 기업경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가족 중심의 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업공개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구나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은 전 세계 농산물시장에 대해서도 완전한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곡물 메이저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140)
“세계 식량 체계는 식량을 장기간 저장하거나 장거리 운송하는 것이 불가피하여서 유통이나 가공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화학물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상품성의 유지를 위해 이른바 ‘수확 후 처리(post harvest)’ 과정에서 다량의 화학물질을 사용하거나 식품 가공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물질을 첨가하는 것이다.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 곡물 메이저와 초국적 농식품 복합체의 지배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먹을거리가 더욱 위험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을거리의 지배자가 세계 식량 체계를 통해 우리의 밥상을 장악하는 것이 확대되면 될수록 우리의 밥상은 더욱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 이런 식량 위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절대 빈곤층이며 소수의 상위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 역시 비싼 식량 가격과 위험한 밥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141)
2.6.4. 불의하고 위험한 제국의 밥상
정경호 교수는 “제국의 불의한 밥상(床)”142)이라는 이 한 마디로 오늘날 지구촌 세계에 만연한 모든 불의한 현상들 곧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과 소외, 억압과 착취와 함께 더욱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과 전쟁들을 추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 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세계의 온갖 불의한 현상들을 규정한다.
“오늘의 세계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의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만연되어 있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실정이다. 세계 인구 70억에 가까운 이 지구촌에는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살인적인 빈곤층이 10억 명이 되며 상대적 빈곤층은 15억 명이 되어 전 세계 인구의 40% 이상이 빈곤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신음하며 절교하는 오늘의 뒤틀린 현실과 함께 고대 로마 제국의 양극화된 사회 곧 그들의 화려하고도 퇴폐적인 생활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 또한, 오늘처럼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사회였으며 결국 자신의 먹을거리인 음식을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부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하여 불의한 전쟁과 함께 억압과 착취가 난무한 제국의 불의한 밥상이 그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143)
정경호 교수는 “로마 제국의 밥상은 부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곧 소박한 사람들은 질적으로 다른 양극화된 밥상”이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부요한 자들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즐김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였는데 특히 주위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손님을 초대하여 만찬을 벌이고 주인은 값비싼 최고급 재료들을 준비하여 음식을 만들었으며 갖가지 사치스러운 요리들을 장만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 하였다는 것이다. 서로 간의 이러한 경쟁으로 그들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이를 감수하였고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가장 좋은 생산품을 구매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초에 절인 오이와 다른 채소들은 스페인에서 수입되었고 고대 프랑스인 갈리아로부터 햄을, 고대 스위스 북부지역에서 포도주, 리비아로부터 석류, 영국으로부터 굴, 인도로부터 향료 등을 수입하여 들여와 자신의 부와 풍요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소비하였다는 것이다.144)
“초유의 호화로운 만찬을 벌이고 있는 부요한 사람들의 음식향연은 작게는 50명 많게는 150여 명 이상의 노예 몸값보다 큰 비용으로 준비한 밥상이었다. 모두가 하루 저녁에 흥청망청 지나치게 먹고 취하고 토해내고 또 먹는 밥상이었고, 부자들의 끝없는 탐욕의 음식문화는 향락 중독성의 만찬이었다. 그들은 피를 불러온 침략 전쟁을 수없이 반복하여 영토를 넓혀갔으며 전쟁의 포로들을 노예로 만들어 약 20만 명의 노예가 로마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함께 그들은 성적(性的)인 쾌락과 환락의 삶을 위해서 목욕문화가 발달 되었다. 그것들과 함께 초호화판의 밥상으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토해낸 후 다시 먹는 음식문화들을 일컬어 그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렀다. 바로 이 거짓 평화가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간 것이었다.”145)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크로산과 리드는 제국의 변방 유대 갈릴리와 같은 시골 농민들의 관심은 주어진 적은 땅을 연중 최대한 잘 굴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 그래서 어떻게든 부과된 세금을 내고 그 남은 것으로 먹고살기에 모자라지 않게 하는 데 있었다면서 로마 제국 치하 예수 사역의 근거지인 갈릴리의 대다수 농민의 밥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목표는 자급자족이었으며 (...)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인데, 특히 땅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 도시의 부유한 상류층 지주들의 후견 권한을 줄일 수가 있게 된다. 또 시장에서 간교한 상인들과 흥정하며 싸우는 일도 최소화할 수 있다. 농민들의 먹을거리는 보잘것없었으며 주된 음식은 빵과 올리브, 올리브 기름, 포도주였다. 때로는 제철에 나는 채소를 약간 더해 만든 콩이나 렌즈콩 스튜를 얇은 빵 위에 얹어 먹기도 했으며, 견과류나 과일, 직접 만든 치즈나 요구르트 등은 환영받는 별식이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은 특별한 음식이었고 육류는 귀한 것으로 특별히 축하할 날에나 먹는 음식이었다. 발견된 유골들은 예상대로 대부분 철분과 단백질 결핍 증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체로 심한 관절염을 앓았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인플루엔자로 인한 질병, 곧 심한 독감이나 치아 염증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평균 수명은 대략 30세였는데 이것도 어린 시절을 무사히 넘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운 좋은 사람들의 경우였다. 50대나 60대까지 산 사람은 훨씬 더 드물었다.”146)
하지만 저 로마의 불의하도록 위험한 제국의 밥상을 가장 질시(嫉視)한 이는 대 헤롯(Herodes)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인 항구도시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 일명 가이사랴)를 지중해 서안에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야욕을 과시하였으며, 대규모 토목 공사로 마사다 궁전, 예루살렘 성전 등을 건설하고 ‘유대의 왕’으로 군림한다.147) 그리고 이러한 대 헤롯의 불의한 밥상을 가장 추종한 이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적(敵)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148)였다.
대 헤롯은 건축을 통해서 그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군사적인 정복에 집중했던 힘에 못지않은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고대에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룬 건설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사업은 지중해 동부 전역에 산재해 있으며 그 잔해들은 고고학적인 기록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는 어마어마한 불후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건축물들은 때로는 건축 그 자체를 위해 세워진 듯하고 때로는 그의 백성을 위해 세워진 것도 같으나(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 분명한 것은 언제나 그 자신의 필요와 욕망과 지배권을 위해149)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건설한 수도이자 항구도시 가이사랴는 헤롯이 소유한 권력의 궁극적 출처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고고학적 발굴로 이 항구도시의 건설이 카이사르와 로마에게 드려진 명목상의 찬양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 헤롯 왕국 전역으로부터 풍성한 재화들이 이 도시로 집중되어 이곳을 통해 로마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이 도시는 조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제국에 대한 찬양 그 자체였다. 농산물이 시골로부터 이 도시로 흘러들어왔으며 또 헤롯이 돈을 주조하면서 곡식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과 나란히 화폐도 역시 이 도시로 집중되었다. 헤롯의 국고와 그의 관료들의 금고에 넘쳐나는 재화는 가이사랴에서 활발한 도시화를 이루는 자금이 되었으며 그 항구에 대한 초기 투자는 동쪽으로부터 그의 왕국을 통해 나가는 무역로를 재편성하고 또 유리한 지중해 노선을 개척함으로써 커다란 이득을 가져왔다. 헤롯은 유대 땅을 상업적 왕국으로 변화시켰다.150)
“그러면 대 헤롯은 어떻게 그의 왕국에 자금을 조달했을까? 무역과 항구에서 나오는 관세가 분명 도움이 되었겠지만, 농업이 로마 경제의 기반이었으며 땅이 부의 척도였다. 고대 도시들의 건축물은 농민들의 노동으로부터 얻어진 농업의 재화를 가지고 건설되었으며, 헤롯은 그의 도시와 왕국을 위해 상당한 부를 필요로 하였다. 가족 공동 경작지에서 이루어지는 다품종 경작과 자급자족은 사유지와 왕의 영지에서 이루어지는 단일경작과 불균형한 물물교환으로 변하였다. 토지의 소유양식이 바뀌었으며 소작지의 증가로 인해 대규모 경제 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재원을 근거로 가이사랴의 장엄한 건축을 이룰 수 있었다. 사회의 한편에서 사치의 증가는 다른 편에서 노동과 가난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시의 비싼 건축은 곧 시골의 집약 농업을 의미했다.”151)
그리고 크로산과 리드는 바로 이러한 땅 위, 곧 이러한 갈릴리의 농촌 마을들을 찾아 이동하고 있던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의 의미를 판단해볼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와 ‘이스라엘 갱신’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였다고 한다.
“우선 심판의 측면에서 예수는 예언자로서 통치자들이 그 백성을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유죄 선고를 선포했다. 통치자들에 대한 예언적 심판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두 측면을 갖는데 하나는 팔레스타인 내에 로마가 지명한 통치자들(헤롯 가문의 사람들, 헤롯 안티파스 등)에 대한 유죄 선고와 더 큰 싸움에서 로마의 통치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 곧 예수의 악령 축출은 보다 큰 싸움에서 외세로부터 해방된 지역적 승리들이라는 예언자적 가르침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갱신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보다 건설적인 것으로서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예수는 예언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복을 약속하고 로마 제국주의가 병들게 만든 것을 치유하고 악령을 축출함으로써 하느님이 그 백성을 갱신시키는 것을 선포하며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예수는 마을공동체에 초점을 맞춘 선교에서 억압이 없는 사회 정의와 협동의 사회질서를 대안적 질서로 선포한 것이었다.”152)
========= 각주
115) 시인 김지하의 시 "밥은 하늘입니다"의 첫 구절. (전문 : "밥은 하늘입니다/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밥은 하늘입니다//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밥이 입으로 들어 갈 때에/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밥은 하늘입니다/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116) 김지하, 『김지하 이야기 모음 밥』 (왜관:분도출판사, 1984), 81.
117) 박재순, 『한국 생명신학의 모색』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0), 404.
118) 박재순, 『다석 유영모』 (서울:홍성사, 2017), 149.
119) 박재순, 『한국 생명신학의 모색』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0), 130-131.
120) 박재순, 『민중신학과 씨???사상』 (서울:도서출판 천지, 1990), 143.
121) 竹中正久(다케나카 마사오)는 일본 도지샤(同志社) 대학에서 기독교윤리학 교수였고, WCC 산업선교분과 자문회의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도시산업선교 운동에 많은 지원을 준 인물이다.
122) 다케나카 마사오, 김기석 역, 『하느님은 밥이시다』 (서울:다산글방, 1991). 이 책은 1989년에 WCC 출판부에서 출간한 책으로 다카나카의 강연집이다.
123) 앞의 책, 30.
124) (호 2,21-22/공동번역) “그 날이 오면, 나는 들어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내가 하늘의 청을 들어주면 하늘은 땅의 청을 들어주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청을 들어주고 이 모든 것은 이즈르엘의 청을 들어주리라.”
125) 민영진, “우리의 밥상을 위협하는 것들”,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엮음, 『생명을 살리는 밥상』 (서울:도서출판 동연, 2012), 26-27 참고.
126) 앞의 논문, 27.
127) 1988.2.29. 공포함. 전체 선언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홈페이지 (구)자료실 게시물 No.7에 있음.
http://www.kncc.or.kr/sub03/sub00.php?ptype=view&idx=9087&page=41&code=old_pds
128) 서광선, 『신 앞에 민중과 함께』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1), 206-207 참고.
129) 앞의 책, 207.
130) 앞의 책, 207-208.
131) Leonardo Boff, 이정희 역, 『주의 기도 - 총체적 해방의 기도』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6) 129-130.
132) 앞의 책, 133-134.
133) 앞의 책, 134-135.
134) Cargill은 세계적인 식량 위기에 어둠 속에서 웃는 자들인 국제 곡물 시장의 지배자, 먹을거리의 지배자인 7대 곡물 메이저들 중 최대 곡물 메이저이다. 지난 2017년 5월 방한한 카길의 데이비드 맥레넌 회장은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는 카길의 최우선 과제 가운데 하나다.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려 2025년까지 한국에서 연 매출 1조5000억 원을 달성할 것이다. (...) 현재 160만t 수준인 카길의 한국 내 사료 생산량을 8년 안에 270만t까지 대폭 늘릴 계획이다. 이미 2015년 1억 달러를 투자해 전 세계 카길 공장 가운데 최대 규모인 평택 사료 공장을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매일 경제, 2017.5.12.자 뉴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7&no=318803 2017.11.3. 접근)
135) 구정은 외, 『지구의 밥상 - 세계화는 전 세계의 식탁들을 어떻게 점령했는가』 (파주:글항아리, 2017), 5. 이 책은 2015년 8~9월에 경향신문 기획취재팀이 신분에 연재했던 <지구 밥상> 시리즈다.
136) Brewster Kneen, 안진환 역,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 Invisible Giant』 (서울:시대의창, 2010), 18.
137) 유전자재조합(변형)은 한 종(種)으로부터 유전자를 얻은 후에 이것을 다른 종에 넣어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종을 만드는 기술이다. (...) 일반적으로 유전자재조합기술에 의해 형질이 전환된 생물체를 유전자재조합생물체(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GMO)라고 말한다 (...) 2007년 1월 현재 총 181품목(옥수수 44, 유채 22, 면화 22, 감자 20, 대두 12, 카네이션 11, 쌀 9, 토마토 8, 밀 7, 담배 5, 사탕무 3, 호박 2, 멜론 2, 해바라기 1개의 품목 등)이 개발되었다. (...)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은 1991년부터 농업생명공학 연구를 착수하여 2009년 현재 18작물 88종의 GMO와 2가축 9종의 형질전환 동물을 단계별로 개발 중이다. (...) GMO에 관한 찬반(贊反) 논쟁이 맞서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과실 및 채소의 숙성 지연으로 신선도가 유지되고, 비타민 A가 강화된 쌀처럼 일부 식품의 영양적 가치가 높아지며, 병충해와 환경에 강한 식물을 개발함으로써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는 등 장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학자들은 GMO의 위해성이 과학적인 검증으로 입증된 경우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반대론자들은 GMO가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검증되지 않은 위해성과 환경 파괴 및 돌연변이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체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장기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위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같은 종의 식물끼리 교잡해 새 품종을 만드는 기존 방법과 달리 동물 유전자를 식물에 집어넣는 등 종간 구분이 없어 생태계를 교란한다는 비판도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어떤 형질이 다른 생물체에 들어가면 때로는 생물체 고유의 유전자 기능이 사라지거나 유전자 배열이 불안정해져 새로운 독이 나타날 수도 있다. 유전자가 조작된 식품을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일부 EU 회원국들은 유럽식품안전청이 안전하다고 인정한 GM 옥수수에 대해서도 판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3% 이하로 구분하여 유통 · 관리할 경우 GMO 표기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Non-GMO 표기는 할 수 없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유전자재조합식품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파워푸드 슈퍼푸드』, “유전자재조합식품”, (도서출판 푸른행복, 201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77154&cid=42776&categoryId=42783 2017.11.3. 접근)
138) Brewster Kneen, 앞의 책, 장경호, “한국의 밥상을 그들이 지배하도록 놔둘 것인가”, 416.
139) 이미 알려진 5대 다국적 기업 곡물 메이저는 미국의 Cargill과 ADM, 프랑스의 LDC, 아르헨티나의 Bunge, 스위스의 Andre 등이다.
140) 앞의 책, 416-418 참고.
141) 앞의 책, 425-427.
142) 정경호, “제국의 불의한 밥상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정의평화’의 밥상으로”, 『신학과 목회 36』 (경산:영남신학대학교, 2011.11.), 75.
143) 앞의 논문, 75-82.
144) 앞의 논문, 88 참고.
145) 앞의 논문, 91.
146) J. D. Crossan & J. L. Reed, 김기철 역, 『예수의 역사 -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서울: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43-44.
147) 『성서백과대사전 12권』, 항목 “헤롯”, (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82), 328-338 참고. “헤롯”(Herodes, 헤로데스, 유대 분봉왕 재임 기간 BCE 37~4, 일명 大 헤롯 또는 헤롯 대왕) : 유다의 하스모니아 왕가 얀네우스는 이두메(에돔) 지방의 통치자로 대 헤롯의 부친 '안티파테르'(Antipater)를 임명한다. 그는 얀네우스의 아들 힐카누스II에게 밀착하여 권력을 확장시킨다. 이후 프톨레미에 의해 수세에 몰린 카이사르를 지원한 공로로 BC 47년 로마 시민권을 받아 유다의 지방 행정관이 되었다가 마침내 유대 총독에 임명된다. 큰 아들(파사엘)을 예루살렘 총독, 둘째 아들(헤롯)을 갈릴리 총독이 되게 한 뒤 BCE 43년 암살 된다. 갈릴리의 지배자였던 헤롯은 BCE 40년 황제 안토니우스의 환심 사는 데 성공하여 ‘유대의 왕’ 칭호를 받은 뒤 군대를 이끌고 갈릴리로 진입하여 대제사장 '안티고누스'와 3년 동안의 전투를 벌이며 남하, BCE 37년에 마침내 예루살렘 입성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10여 명의 아내와 아들들을 처형하였고 그가 병사(病死)한 뒤 그의 영토를 나누어 받은 아들들의 공시적인 호칭은 '분봉왕'이 아닌 '1/4 영주'(tetrarch)였다. 성서에서는 그들 모두를 ‘헤롯 왕’이라고 한다.
148) 앞의 책, 항목 “헤롯”, 339-340 참고. /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영주tetrarch, 재임 기간 BCE 4~CE 39, 일명 헤롯 안디바) : 대 헤롯은 병사하면서 자신이 지배하던 영토를 4등분하여 각각 3명의 아들 곧 아켈라오(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헤롯 안티파스(갈릴리, 베뢰아), 헤롯 빌립(이두래, 드라고닛 - 이는 안티파스와 재혼한 헤로디아의 전 남편 빌립과 동명이인이다) 등에게 분배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대 헤롯을 가장 많이 닮아 교활하고 잔혹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며 그의 권력을 탐한 형수 헤로디아와 불의한 혼인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비난을 받는다.
149) J. D. Crossan & J. L, Reed, 앞의 책, 95 참고.
150) 앞의 책, 97 참고.
151) 앞의 책, 104.
152) Richard A. Horsley, 김준우 역, 『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고양: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3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