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참고 문헌
[ 결론 / 참고 문헌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결 론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自活)의 길 찾기는 ‘예수의 밥상 공동체’에 있음을 기대하면서 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실험하며 나아가야 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한마음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과 이제부터 나누며 이야기해 나아가야 하는 출발점이 여기 어디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여기에 이 논문의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 비슷한 처지에서 보이지 않는 길 찾기에 매진하고 있는 갈릴리 예수의 또 다른 도반(道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그러한 길 찾기에 작은 영감을 주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이 논문의 결론을 대신하여 논자는 생뚱맞게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를 다시 물어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한스 큉의 말로 그 답을 대신한다.
“잘라 묻건대 : 왜 그리스도인인가? 참으로 사람이고자! 무슨 뜻인가? (...) 그리스도인은 사람다움을, 참으로 사람다움을, 인도적(人道的)임을 바라보되, 사람과 사람의 하느님을 바라보되, 인간성을, 자유ㆍ정의ㆍ생명ㆍ사랑ㆍ평화ㆍ의미를 바라보되 - 예수에 더하여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분이 구체적 척도, 곧 그리스도이시다. 이 예수에 더하여 그리스도인은 그저 모든 진ㆍ선ㆍ미와 인간성을 긍정하는 임의의 한 인본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위ㆍ악ㆍ추와 비인간성도 포용ㆍ극복할 수 있는 참으로 철저한 인본주의를 옹호한다.”341)
참으로 ‘사람’이고자! 그렇다. 이 모든 기대와 갈망들이 그저 ‘제대로 사람이려고’ 하는 일들이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이른 추위에 얼어 죽은 양파 모종을 넘어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심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속된 가뭄과 병충해로 농사를 망친 밭머리를 바라보며 내년의 농사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느새 굽은 허리 때문에 대문 앞의 텃밭을 손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먹먹해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녀들이 객지로 뿔뿔이 흩어진 빈집 한쪽 구석방에서 기름보일러를 줄이며 좀처럼 녹지 않는 손발을 담요에 넣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꼬리치는 강아지 밥을 주면서 며칠 동안 드나든 이 없는 대문을 혼자 닫고 있을 것이다.
늘 혼자 차려 먹어야 하는 서늘한 밥상에 올린 밥 한 그릇에 이미 깃들어 계시는 하느님을 삼가 받들어 먹음으로써 늙은 몸을 보양(保養)하고, 붉은 김칫국물을 한 숟갈 꾹 눌러 짜 마시며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그 밥상머리에 진작부터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온 마음 다한 합장(合掌)으로 삼가 찬미하며 살아가도록 도울 수는 없는 것일까? 엠마오 길목에서 홀연히 동행하는 부활의 예수께서는 오늘도 이 텅 빈 마을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계실까?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뒤뜰, 엎어놓은 장독대에 차가운 ‘정한수(정화수/井華水)’ 한 사발 떠서 올려놓는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드러난 하얀 사발에 담긴 청명한 물에 내려온 하늘이 파르르 진동한다. 전쟁 통에 겨우 살려낸,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조현병이 오래 깊은 외아들과 달덩이 같은 손주 4남매, 쌀독에 남은 보리쌀을 긁어내 어제 저녁밥을 지어 먹였다. 아무 말 없이 새벽예배 간 며느리는 혼자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썩어 내리는 초가지붕 위에 흰 달이 걸려 괴롭도록 환한 빛을 낸다. 춤을 추듯 두 팔을 크게 크게 뒤로 돌려 앞으로 손을 모은다. 그리고 다만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고 또 그저 빈다. 그렇게 겨우 마음이 진정 되면 할머니는 가만히 방으로 들어와 찬바람 들어오는 문틈을 수건으로 다시 꾹꾹 눌러 막고 세상모르고 잠든 손주들 차낸 이불을 끌어 덮어 주시곤 했다. 다 사람이고자! 그저 다 사람으로 살고자!
여기 어딘가에 ‘예수’가 계시다. 마을 어귀 어둠 속에 높이 솟은 미루나무처럼 계시길 바란다. 왜 예수인가? 한갓 우리의 사람됨을 참으로 존중하신다기에, 우리의 인간성을 가장 용감하게 하신다기에, 그 자신이 그토록 곤고하셨다 하기에, 풍랑 치는 바다 위 작은 배 안에서도 그대로 곯아떨어지곤 하셨다기에, 혹독한 광야를 홀로 마주하고 또 언제나 승리자로 다시 일어서셨다 하기에, 날마다 치열한 생계 노동의 벼랑 끝을 사셨다 하기에, 그러면서도 기적처럼 하늘을 품어 보이셨다 하기에, 죽어도 죽지 못하고 자신의 길을 사랑한 이들 속에 불꽃처럼 되살려지셨다 하기에,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고 가용자원이라고는 ‘가난해서 더 애틋한 밥상’이 전부인 농촌교회이지만 여기까지 길을 찾아오도록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 아니면 누군가가 계시기에, 우리가 가장 친애(親愛)하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마을을 치유하는 밥상을 지역사회와 이웃의 사회적 필요에 따라 차려낼 수 있는 자활의 밥상 공동체가 되기까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이곳 갈릴리, 주변부의 주변부에서 “생명 밥상을 통하여 일구어내도록 촉구하시는 평화 세상”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도록. (끝)
=========각주
341) Hans Küng, 앞의 책,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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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 수여식 발표문 ====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 증발의 시대. 이제 더 이상은 누구도 자기 스스로 주체일 수 없는 마감의 시간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형체 없는 공포로 느끼며 절망하는, 자기 상실을 넘어 자기 증발의 세대입니다. 증발된 자신을 다시 소비하려 사이버 세계 속을 유령처럼 떠도는 세대에게 어떤 자들은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조작된 기독교를 유통시키며 그 뻔뻔함을 또 판매합니다.
이런데도 “기독교는 여전히 유효한 걸까요?”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 걸까요?” 이데아를 복제만 해도 그 유사성을 담아내기만 해도 충분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저 모더니즘의 종말과 함께 박물관 수장고의 유물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걸 뛰어넘어,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면서 실재(the real)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시뮬라끄르가 도리어, 이데아를 혼란에 빠뜨려 전복시키는 이런 주객전도가 어느덧 자연스러워진 세대인데?
그래도 “예수는 모든 이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인가?” “어떻게 그러한가?”
만일 초기교회들에 의해 ‘조작된/고백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눈앞에 조사(照射)하여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을 넘어 실재의 그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틈새만이라도 있다면, 그렇다면 아직은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틈새를 2천 년 전에 이미 영지주의라는 허상과 씨름했던 요한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요 1,14) “로고스가 육체(σαρξ)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 19,33-34) “그중에 한 병사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바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그가 너무나 ‘육체(flesh)의 사람’이었다는 이 당연한 언급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군다나 갈릴리의 그 사람이 아래로부터 위를 전복시키는 게 진정한 하늘이라고, 자신의 하늘이라고 선포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브로커 없이 버려진 땅의 민중에게 그러한 자신의 하늘이 압바(Abba) 곧 무조건적 후견인이라고 실천으로 선포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조작된 약탈제국의 모든 거짓을 철저히 전복하고 이데아를 재구축하는 대안마을운동을 인류구원의 길로 선언하며 그 가장 급진적인 세계 변혁을 실천하였다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나는 그가 생계형 자급자족 소작농(peasant)에 일용직 목수로서 매일 숨 가쁜 노동으로 생존하던 절실한 한 인간이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더없이 충분합니다.
비록 존 도미닉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 -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책에 쓴 다음과 같은 말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이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 주지만 말입니다. “이는 읽어야 하는 목록도 심지어 선포해야 하는 설교도 아니다. 이는 연주해야 할 악보이며, 실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또한 나의 희망은 늘 새롭게 솟아납니다. “Emmaus never happened, Emmaus always happens. 엠마오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또는 그래서) 엠마오는 항상 일어난다!”
[갈릴리 신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자, 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