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81
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 시쳇말로 ‘호구’된다. 경쟁보다 양보가 미덕이고, 허약한 이웃과 함께 가야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참아 주고, 자기의 유익보다 모두의 유익을 구하고, 거짓을 말하거나 도모하지 않고, 꼴찌를 자원하고, 남을 먼저 대접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하고... 과연 이렇게 사는 사람을 요즘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대할까? 오죽했으면 우리 옛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했던가.
더구나 주님 말씀에는 우리에게 가장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눅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현실은 어떨까? 일곱 번 용서하면 그런 자들은 일흔 번을 더 속여서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절실히 배웠다. 수십 명의 귀농귀촌인들을 만났던 지난 몇 년 동안은 말 그대로 ‘심화학습 기간’이었다.
차라리 어느 교회도 다니지 않는 분들이거나, 차라리 독실한 불자이거나,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다니는 교인이 차라리 아니거나, 교회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분들이거나, 교회에 다니고 있거나 또 집사나 장로라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이거나... 주변에서 만나는 그런 분들이 오히려 저런 진심을 알아주고 협조해 준다는 것, 특히 수십 명의 귀농귀촌인들을 만났던 지난 몇 년 동안 절실히 알게 되었다.
결코, 잊지 못할 어떤 목사를 만난 것도 태안군 농업인대학에서였다. 처음에는 나를 몹시도 경계하다가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를 조직하고 몇 번의 모임이 잘 되자 뒤늦게 가담하더니, 전체 식사 모임에 나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식사 기도를 먼저 해야지, 여기 목사가 둘이나 있고 집사도 장로도 몇 명이 있는데 이게 뭐냐?’고 나무랐다. 그렇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독실한 불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분들은 내가 목사인 걸 알면서 허물없이 좋은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얼른 내가 그 말을 받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이 모임은 기독교 모임이 아니니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알아서 합시다~” 그러자 모두 와~하고 웃으며 다시 분위기가 살아났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 목사가 모임이 끝날 때까지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을 미처 몰랐다. ‘목사님이 이렇게 좋은 모임을 만들어 함께 하는구나 하고 놀랐다’던 어떤 분이 걱정하며 알려줬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망신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더구나 목사들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서 되겠나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일단은 먼저 사과하고 오해를 풀려고 바로 찾아갔다. 선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일방적이고도 격정적인 책망의 설교를 장장 4시간 동안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