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095

농자천하/ 2021. 7. 31. 10:30

 

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그렇다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 ‘희망’이라는 건 무얼까? 그것은 어떤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바라는 일들을 실행하여 내도록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의지’이다. (빌 2,13/새번역)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들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과 죽음의 경험적 현실과 그에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의 모순 속에서 신앙은 희망 위에 서서 이 세상을 넘어서도록 재촉한다고 칼뱅은 말하였다... ‘신앙한다’는 것은 한계를 넘고 초월하는 것, 그리고 출애굽(Exodus)에 가담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괴롭히는 현실을 억누르거나 뛰어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과 죽음의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에서만 신앙은 억압이 없는 열린 영역 곧 자유와 기쁨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멈추어 버리는 그 한계가 부서지는 곳, 거기에서 신앙은 희망(Hoffnung)으로 넓혀지고 대담하게 선언하고 인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희망은 ‘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키에르케고르)이 된다.”

리차드 니이버는 우리의 갈릴리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우리 곧 ‘갈릴리 예수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개변주의자(Conversionist)는 뚜렷한 독자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완강하고 독살스러운 병, 곧 영의 폐결핵, 죽음에 이르는 병을 고친다. 그는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불신, 무애(無愛), 절망을 용서한다. 그는 이것을 이념과 권고와 법으로 단순화시키지 않으며, 깊은 겸손으로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것을 시위한다.”

이런 ‘희망’에 대한 통찰들은 사실 유명한 좌파 사상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희망의 원리>에서 말하는 ‘희망하는 용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에게 그것은 사실 ‘눈물겨운 희망의 용기’이다. 희망은 우리가 쉽게 미칠 수 없는 ‘미래완료’라는 하느님의 독특한 시제(時制)이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고통이나 환멸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또한 ‘더는 희망하지 말아야지’를 습관처럼 되뇌며 산다.

그렇기에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세계에 임하시고 마침내 그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끝없이 희망하고 산다면 연속되는 좌절과 고통은 필연이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위로의 성령,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을 만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망하는 인간(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에히리 프롬)’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언젠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자주 본다.

이야기가 복잡해졌지만 한 번쯤은 이 칼럼에서 꼭 언급해 두고 싶었다. 이것이 이토록 이정표도 결론도 없는 ‘농목의 길’을 가고 또 가게 하는 동인이기에.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