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마을목회에 대한 제언 그리고 마을목회신문 편집기자단 연수자료" (초고)

농민만세 2024. 6. 27. 03:03

우선,
이번 제1회 마을목회신문 기자 연수모임에 원근 거리 마다않고 참여하여 주시는 목사님들께 앞서 말씀 올립니다.

전문 언론인도 또 그럴만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닌 평범한 한사람의 마을목회자로서 다만 그 필요성을 열망하던 마을목회신문을 이렇게 진짜로 시작하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정작 마을목회신문을 진짜로 창간하시겠다고 오필승 목사님이 또 한 번 그 각별하신 실천력(!)에 전격 시동을 거실 때, 오히려 저는 그걸 마다하며 도망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ㅜ

더구나 송구한 말씀은 조기은퇴 후 경제적 자립을 나름 필사적으로 도전하느라, 정작 창간감사예배를 드리고는 곧바로 거의 휴업상태가 되었고요ㅜ 이에 우리 마을목회신문을 제대로 발전시켜나갈 뜻이 있는 분들을 정말로 간절히 구하고 찾아야 했습니다.

(거의 휴업 상태였음에도 무려 1년 동안 꾸준히 '매일만나'를 올려주심으로 우리 마을목회신문을 혼자 붙들어주신 윤정진 목사님과 또한 변치않는 마음과 회비를 통해 믿고 기다려 주신 강대석 목사님 그리고 이번 연수 모임에 참여해 주시는 목사님들께 그리고 발행인 오필승 목사님께 이렇게나마 죄송한 말씀과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용처럼 제가 경험이나 관련 지식이 일천하여 어쩔줄 말라 몹시 당황하는 중(또 도망치고 싶ㅇ,,,ㅡ,ㅡa;;)이오니 모쪼록 참여해 주시는 목사님들께서는 이번 모임이 더없이 풍성하고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그동안 발행인 오필승 목사님과 많은 시간 나누어 온 이야기들을 두서 없이 생각 나는대로 비망록처럼 일단 써놓은 아래 내용이나마 한번 훑어보아주시고, 당일 모임에서 취사선택 교정 보완보충 등의 소중한 고견을 나누어 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려 봅니다.

당일 자료집에는 아래 내용을 정리하고 신문편집 매뉴얼을 다시 수정 인쇄 첨부시켜 도움이 되시도록 하겠습니다.


==>


2024-1차 마을목회신문 기자단 연수

♧일시 : 2024.7.2.(화) 12:00~20:00
♧장소 : 마을목회연구소, 홍성 신동리교회당

1부
친교 및 점심식사

2부
대화 마당 : 마을목회의 정체성 지향점 그리고 마을목회신문의 구성 방향과 역할 제고에 대한 제언 / 마을목회신문은, 진보적 기독교운동인가? 사회적 교회공동체운동인가? 갈릴리 언약회복 메시야운동인가? 광야의 세례자 요한인가? / 마을목회 플랫폼의 역할은 가능한가? 무엇부터 시도할 것인가? 독자 회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참여는 어떻게 가능한가? / 마을목회신문의 카테고리 구조의 이해와 발전적 구성, 기사 노출구조와 키워드 확보 및 포털 사이트 연동 등에 대하여

3부
기자 연수 : 마을목회신문 기사 편집, 사진 편집, 영상 보도, 실시간 온라인 보도 외에, 예를 들면 챗GPT 활용, 공 기관들의 보도자료 활용, 현장 취재, 보도 기사 글쓰기 등등은 질문과 공동 해답찾기로 진행 되오니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4부
저녁식사와 마무리

 

(참고 자료 1: 마을목회에 대한 제언)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 - 해방하는 아나케이마이 마을공동체"


제언 : 이 진 목사(마을목회연구소 소장, 마을목회신문 편집인)

0.
마을목회연구소(설립자 및 대표:오필승 목사)가 더 나은 길을 찾아가도록, 특히 여러 신학 목회 전공분야의 목회자들께서 함께 마을목회신학을 풍성히 완성해 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도롤, 아래의 제언에 대하여 보충 보완 교정 고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갈릴리 예수는 가장 궁극적인/'세상'을 구원하는 세계 변혁자로서 저 세상 질서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도모하였다. 여기에서 '세상'은 교회 밖의 세계 또는 기독교 밖의 문화가 아니라 뭇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기본 욕구들이 얽히고 부대끼면서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조로서의 세상을 가리킨다. 갈릴리 예수는 불의한 사회적 구조 곧 인간성을 말살하고 소수가 착즙하는 사회구조를 무효화시키고 정의 평화 생명보전의 하느님 나라 질서로 대체되는 세상/사회구조로의 변혁에 한 결정적인 이정표와 마침표가 되었고, 그것은 오롯이 '주의 기도'에 담겨 있다.

2.
그리고 제자들을 랍비의 도반으로 삼아 모본을 보였다. 그것은 언약 신앙의 의례들이 남아있던 갈릴리 농촌마을공동체 곧 갈릴리소작농민들의 쉬나고게 중심부에 참여하여 이미 좌절되어 잊힌 희년 정신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현세성에 물고를 트는 일이었다.

3.
그것은 브로커 피라미드라는 불의한 이 세상 제국의 질서 최하부에서 모든 하중을 떠맡은 숙명을 대물하며 짊어진 갈릴리 농민들이 하느님 아버지 곧 하늘 후견인의 전격적인 피후견인/친지/아들 딸이라는 사실에 각성하여, 모든 족속과 민족과 나라들을 실질 지배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들로서 저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이나 참주 여우 헤롯의 왕궁이 아니라 자신들의 하느님 나라를 침노하여 되찾게 하는, 그리하여 저들의 부대를 터뜨리는 새포도주였다.

4.
그것은 갈릴리 농민 자신들의 심각한 고질병들을 스스로 고쳐내는 마을공동체가 되도록, 절망의 끝에서 주변부 마지널리티들 끼리의 잔혹한 희생양 만들기 저줏굿을 중지하고 서로를 그리고 약자들을 환대하고 함께 누워 먹고 마시는 아나케이마이 마을 공동체로 살아가는, 출애굽 유월절 희년이 일상화된 해원 해방 공동체로 회복하여 마침내 약탈 착취 강압 지배할 백성이 없는 등골 서늘한 상황을 통해 거라사 레기온 악령에 사로잡혀 무덤 사이에서 자신을 제국의 레기온이라 여기는 자들을 무장 해제시켜 사람 되게하는/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운동이었다.

5.
그것은 완고함 환란 생존의 염려등으로 결실할 틈이 없게 하는 약탈 제국의 땅을 좋은 밭으로 바꾸어 결실하고, 덧뿌려져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꿋꿋이 이겨내고, 갈릴리 소작농들을 자자손손 농노로 운명지우는 예루살렘의 패역한 제사장들과 헤롯의 토지에 몰래 뿌려 그들의 땅을 망가뜨리며 질긴 생명력으로 자라나 마침내 광야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하는 겨자씨와 같은,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꿈틀거리는 그래서 가장 위험한 마을 만들기 운동이었다.

6.
마을목회의 많은 실천과 온갖 변주들이 갈릴리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꿈꾸며 살고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 하느님 나라 저 세상 운동의 맥락에 잇대도록 함으로써, 저 레기온 제국주의자들의 바벨탑을 근본부터 무효화시켜 저들을 죽을만큼 당혹스럽게 만들고, 우리는 다만 갈릴리 예수의 길에 있으니 그의 패거리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비로소 안도하고, 종려가지를 미친듯 흔드는 환희와 엠마오 마을로 오는 동안 이미 동행하며 이 하늘의 일들을 상세히 풀어 일러주신 분의 환대의 성만찬에 초청되어 함께 누워 먹고 마시는 위로를 최상의 보상으로 기대할뿐인, 모든 지금 여기를 전복하는, 저 세상 나라를 희망하는 일이다.

7.
마을목회가 뭐냐는 질문보다 늘 따라오는 질문: 마을목회로 교회가 부흥되냐, 그런 사례가 있냐? 이토록 빈한하고 허망한 질문이라니! 마을목회는 교회를 부풀려 키우려 교회를 망가뜨리는 제국주의 목회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회복시켜 스스로 자라나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교회갱생운동이다. 마을목회를 통해 회복되는 것은,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세워지고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결실하는 교회의 존재론적 속성이다. 또한 교회와 어떤 신앙적 종교적 대척점에 있는 비기독교적인 세계, 그런 의미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구조 자체를 그야말로 저 세상, 이 세상에는 없는/주의 기도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뿌리로부터 작동하는, 그처럼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사회 변혁을 희망 실천하는 이것이, 마을목회와 지금까지의 기독교가 실천해 온 다양한 이웃 사랑 내지 전도활동들 사이에 있는 차별점으로 또한 지금까지 만난 많은 마을목회자들의 특성으로 보인다. 리차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말하는 '변혁자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설명된다.

8.
보다 사회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는 그것은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진면목을 제대로 재현하는 교회로 복원되는 교회 갱생운동이다. "마을이 교회를 칭송하니 믿는 무리가 많아지더라." 마을목회는 그렇게 그 마을이 변화되었다는 부분에 방점을 둔다. 그러므로 마을목회는 한두 번 또는 몇 년 유행처럼 해 보며 요행수를 바라는 목회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회복시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과 그 화육이신 갈릴리 예수께로 어느 누구보다 집중하므로써 교회 자신을 살리는 목회이다. 마을목회는 교회가 마을을 도와 함께 양생하는 하느님 나라 생명 운동 곧 마을 살림의 목회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런데 마을은 교회가 자신들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교회가 있어서 세상 살 맛이 나고 사람으로 비로소 고양되어 가도록 자신과 주위가 빛으로 환해진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교회 곧 우리 에클레시아 민회들이 마을의 교회로서 마을에 자부심이 된다면 우리는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온 교인이 한 마음 되는 것,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바람인 걸까?

9.
이에 주목해 볼 것 하나: 홍성군 장곡면 신동리교회 오필승 목사의 마을 목회. 왜 그는 농촌목회를 넘어 마을 만들기를 지나, 초기에 많은 이가 개념 충돌을 일으켜 생경스러워 하던 '마을+목회'라는 용어를 너무도 당연하게 이질적인 느낌 전혀 없이 목사인 자신이 줄곧 견지해온 하느님 나라 운동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명제로 삼았던 것인가? 그것은 첫째 대가 없는 아가페 우리가 지나치게 잘 알아서 습관처럼 간과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너희도 그와 같이 하라!는 목소리에 공명을 일으킨 영성, 둘째는 '목사가 하는 일은 다 하느님 나라 일인데?!' 곧 내재적이고 현재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 인식, 셋째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그런 하느님 나라 운동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알고 실천해야 당연하다는 마을 곧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 넷째는 마을목회자들의 공통적 곧 앙가주망 현실참여로 지속하여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대처함으로 마을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솔루셔니스트로 자처하게 되는 힌넨니 소명, 말하자면 이것이 오필승의 마을목회에서 발견되는, 교회를 마을목회교회로 성숙하게 하는 원재료들로 보인다는 것. (마을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이런 경향성 내지는 공통적인 특성들을 모두 읽어내고 싶은  어떤 사명감 같은 숙제,,,)

10.
결론적으로, 지구상에는 유일무이하게 바다로 흐르지 않고 황무지 사막 한 복판으로 흐르는 강이 있다. 아프리카의 오카방고 강이다. 이 강은 보츠와나 북부, 칼라하리 사막에 있는 세계 최대 유일한 내륙 삼각주인 오카방고 삼각주 또는 오카방고 초원을 이루는 강이다. 그 초원의 면적은 25,000km²이며(참고, 충청남도 8,352km² + 충청북도 + 경기도 면적) 하구에는 많은 호수가 있어 엄청난 동식물 생명들이 살고 있다. 2014년 제38회 유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최초의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혜택을 입는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물게 강대국들에 착취되지 않고 자립 자활하고 있는 나라이다. 교회는 이런 오카방고 강이면 안 되는 것인가? 엄청난 생태계를 이룩하도록 아낌없이 황무지로 흘러들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인가?  예수께서 자신이 그러했듯 오카방고 강처럼 소금처럼 생명과 맛으로 남고/마을을 변화시키며 사라지라고 교회들을 자신의 몸이요 지체로 세우신 건 아닌가? 크고 작은 수많은 지류가 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합류하고 또 합류하여 나홀로 내륙으로 흘러 생명의 삼각주를 남기면 안 되는 것인가? 그건 온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의 일이 아닌 건가?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머리 둘 곳도 없다시던 분의 목숨으로 대속 받았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언덕 위 헤롯의 둥지가 되려는 것인가? 오카방고 강이 되는 마을목회를 자신들을 부르신 뜻으로 알고 진력하는 교회들이 너무 적어 사막의 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드넓은 바다가 되려는 야심 가득하나 바다 근처도 가지 못하고 증발하고 만다는 걸 모르는가? 각기 제 목숨 하나 겨우 살려보려 남이 손도 못대는 우물을 파거나 남의 우물 기웃 거리면서 돌담 드높이 쌓는 데에 하늘의 재화를 오남용 사사로이 허비하는 게 정상인가? 에디오피아의 어느 교회처럼 주리고 목마른 방치된 사람/민중들의 사회구조적 상황은 외면하고 다만 교회당에 모아놓고 펌프질 기도나 여전히 하려고만 하는 이 기막힌 무력감은 어쩌려는가?

11.
이에 우리가 꿈을 꾸며 도모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마을목회자학교의 지속: 교회 고인물 자칭 완장 교인들을 동참시켜 사명감 고취, 기성 교인들의 의식 전환 위해 찾아가는 마을목회학교 운영, 이수생들의 성공 아닌 실패와 고충 중심의 현장 나눔 등 지속적인 교류와 솔루션 찾기,,,등. 둘째, 마을목회신학의 발전: 목회 현장의 신학화(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했던 정말 수 많은 조사님들, 평생 전도인 전도사님들의 농어산촌 도서벽지 마을목회 그 엄청난 현장 경험 유산들을 신학화 한 적도 없고 기억조차 하는 이 없다는, 이거 귀한 줄 모르는 1백 살이 넘은 한국교회는 매년 백일상이나 받는 어린애, 신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우고 나오는 지 그 많은 목사들은 현장 모르는 초보 이론 아마추어들, 그러니 주의 몸된 교회는?,,,, ㅜ,ㅜ), 현장 목회자들이 자기목회를 신학화 하는 일에 나서도록,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관점들이 모여 서로 통섭함으로써 마을목회신학을 함께 완성해 나아갈 수 있는 마당 역할 자원하기,,,등. 셋째, 마을목회신문의 자리매김과 역할 확대: 교회갱생 본질 찾기라는 시대적 과제에 한 부분이나마 봉사하는 플랫폼 되어가기, 보도의 현장성 제고,,,,등등.


(참고 자료 2 : 오필승의 마을목회)

오필승 목사는 언제부터인가 초청강연이나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마을목회 용어'를 맨처음 사용하게 된 일을 반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이런 말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특히 마을목회는 그 현장성과 실천성 때문에 그처럼 한두 마디 말로 무엇이라 묻고 답을 규정하기 어려운 겁니다." "먹어봐야 과일 맛을 알듯 적어도 몇년은 마을 속으로 직접 들어가 참여하고 부대끼고 함께 좌절하고 희망하는 일에 진력해 봐야, 나한테 '마을목회가 뭔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답을 알 겁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내가 '마을목회'라는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여 우리가 앞으로 실천해 나아갈 일을 말하고 싶었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혹시 이 게물을 보는 비관련자들 중에는 또 무슨 난독증상자들이 있을 거 같다. 누군가를 띄워 보자는 게 아니다. 아무리 다들 유명세 욕망에 절은 한심한 세태라 해도 말이다. 마을목회는 다른 무엇과 달리 현장목회요 테오리아를 넘어서는 프락시스이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가보니 다들 입만 천국에 왔더라는 한국교회 꼴 난다. 그러므로 그냥 마을목회니 뭐니 하는 무슨 자기 이론 자랑질을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목회로 실천하려는 것이라면, 앞선 마을목회자들을 주목하고 읽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마을목회 관련 무슨 논문을 쓰는 이들은 특히 이거 명심해야 한다. 남 얘기 다른 이의 마을목회를 예로 들었다면(더구나 현장취재 인터뷰도 없이?) 그에 비추어 자신의 마을목회를 내놓으면서 마을목회에 대한 나름의 주장을 해야 한다. 이런 논문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이것이 마을목회신학에 대한 내 생각이다. 그러지 않으면 지난 1백 년이 넘는 한국교회처럼 자기 역사는 커녕 그야말로 입만 살아있는 빈깡통이 되고 만다. 숱한 오류와 남용으로 온갖 사이 이단이 나오는 이유 아닌가.

마을목회 마을목회신학 세우기는 이처럼 한국교회에 봉사할 과제를 숙명처럼 많이 안고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지금껏 현장목회신학이 거의 없는 아니 그걸 가벼이 여기고(ㅜ0ㅜ 뭐랄까 좀 쉬운 분야?어이구ㅜ 아마 다들 공감할 거다, 우리가 다들 실천신학 분야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 있었던지를) 낮게 여겨온 이 한심한 한국교회의 풍토로 오늘날 이 지경이 된 상황에 대해 손 놓고들 있을 수 밖에 없는 실정 때문이다.

https://youtu.be/0gskAr6WuxI?si=sxdoQ-4nocq-DHMb

 

https://youtu.be/YpQ1ZvRftDw?si=J97_jnBJ0hX49B_7

 

https://youtu.be/ym9bia_RX8g?si=t6oMdgGYcrpvH0Ly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십자가를 이루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게 요점


(참고 자료 3 : 마을목회신문 편집)

마을목회신문 기사 편집 매뉴얼 실전연습

1.
텍스트 편집:

2.
사진 편집:

3.
영상 자료 올리기:

4.
온라인 실시간 현장 보도:

5.
기사 편집의 한계와 통일성

6.
블로그 활성화 및 검색 키워드 확보 및 관리하기

등.


 



갑자기 또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슴당ㅜ
장맛비에 호우주의보인뎅ㅠ
돌뿌리 하나 만나면 다음에는
또 다른 복병이 연속이군요
참 인생이
잠시도 쉴틈이 없슴네다~
이번에 급히 옮겨갈 월셋집은
현관 욕실 앞베란다 수리 후
주인은 타지 거주하고
공사 뒷정리 안 해서리
콘크리트 남은 부스러기에
시멘트 먼지가 온 집안에 와오
대청소를 하고 여기저기
손 좀 보고 들어가야 해서리
얏호!ㅋ,ㄱV

다음 달부터는
한 중견기업하고
고정 운송 직계약 하게 되어
남은 몇 주 더욱 바지런히
움직여야 합.
다행인 건 그나마
얽히고 설킨 전기 배선 문제
겨우 잡아 화재위험
이제 맘 좀 놓았다는 검미당
아자

 


아이고 살과 피 같은
이 눔들은 다
어케 해야 하나유ㅜ
1년 전 그 눔의 교회
자력 탈출할 때
한 천 권은 버렸는데ㅠ
어차피 내 손이
정리해야 하니
그래도 이걸 다시
병풍으로 둘러 쳐 놓고
시시때때로 거기 엎드려야
겨우겨우 살 것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