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諫諍·封駁] 선교적 교회, '바울파' 목사들
[封駁/諫諍] 2017.02.11
013 / 선교적 교회, 바울파 목사들
한 SNS에 작지만 매우 고무적인 어느 모임의 공지가 떴다. <혁신형 미션얼 모험가들의 잡담회>이다. 선교적 교회론 10년째, 교회 변혁을 꿈꾸며 ‘기존 틀을 깨고 과감한 선교적 시도를 하는 혁신형 미션얼 모험가들의 창의적인 모임’이라고 했다. 여기 ‘미션얼(missional)’은 ‘파견/파송’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파견을 받았다’는 소명을 실천하는 선교적 교회론이다. (장신대 한국일 교수의 강의와 책, 글들을 공부 바람) 당연히 이는 새로운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역시 ‘그 본래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목회적 소명은 단순히 어떤 한 교회를 돌보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교회 내적 사역이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몸/지체로서 그 교회 주변의 세상 곧 지역사회에로 보내고 계신다. 이 당연한 ‘교회론’이 새삼 대두되어 논의되는 배경은, 교인들을 한 것에 끌어 모아 성을 높이 올려쌓고 ‘우리는 안전하다’‘우리가 대표다’라는 괴물 교회론/목회론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렇게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반성 때문이다.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않고, 담을 헐지 않고, 다 내려놓지 않고, 자신들에게로 ‘와서 소속되라’고 하는 ‘방주형 교회 부흥론’은 결국 인간의 사사로운 탐욕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우리 교단에서 총회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소위 ‘자립대상교회 교역자 생활비 지원정책’은 처음부터 그 한계가 예견될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교단 총회 차원에서도 ‘목회자의 겸직/겸업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미 예견된 일인데 떠밀리듯 거론하는 것도 참 딱한 일이다.
더구나 이 중차대한 일을 ‘복음 선교’의 차원이 아니라 교역자 가정의 생계의 문제라는 협시적 차원에서 겨우 논의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교회를 부흥시켜 호의호식하지 못하는 목사’는 능력 없고 영성 부족한 목사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목회자라고 여기는 정신 나간 인식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이는 바울이 ‘텐트 메이커’가 된 것이 아덴 선교의 실패로 인한 좌절 때문이었다는 이 한심한 성서읽기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엉뚱한 바울 읽기의 대표주자가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이다.
바울 서신에서 맨 처음 쓴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라. 바울은 ‘그 처음 편지에서부터’자신이 복음 전도자로서 무엇에도 매이지 않겠다는 신념을 분명히 하는 걸 모른다고? 그리고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갑절의 수고와 고생과 헌신과, 충성을 다해야 했었다는 것을 교인들 들으라고 설교할 뿐 정작 자신들은 남의 말로 여긴다. 게다가 바울의 실존적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덮어놓고 그를 말한다고?
그리스도 예수께 미쳐서 행복했던 바울은 반복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 받으십시오!”어째서 이 놀라운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에게 들려와 이제라도 이를 따르겠다고, 가난한 교회에 물질적 부담을 주는 게 싫다고, 그런 일로 매이느니 ‘텐트 메이커’로 살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어째서 환영 받지 못할까? 우리는 이들을 ‘바울파 목사들’이라고 불러 주자. 그렇다고 이들은 남다른 무슨 상급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더우기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이 겸업 곧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만 생계만을 위한 게 아님을 공식적인 논의에서 언급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단 내에서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을 다만 바라는 당사자들의 말은 거의 들을 수 없다. 단순히 큰 교회를 만들거나 차지하지 못한 목사들의 생계문제를 더 떠 맡아 지원할 수 없으니 허용하자는 식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더 진실하여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목사들일 수 있다. 남들만큼 기회주의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목회자들일 수 있다.
그처럼 물질적 풍요를 간구하는 것조차 혹여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 같아 차라리 자신에게 허락된 여건을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활용하며 고된 삶을 사는 게 고난의 주님 앞에 조금이라도 더 떳떳한 생각이 드는 이들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그런 신앙 자세나 진지한 설교 그리고 성서읽기로 인해 한국교회 절대다수의 기복적 기독교인들이 부담을 느끼고 모여들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서울 대도시에서 목회할 때 이웃에 정말 그런 교회가 있었다. 목사와 사모가 웬 ‘부동산 투자 은사’가 있다고 소문이 났는데 교인들이 바글바글 모여들더라. 제발 부끄러워하자. 특히 능력주의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장로들에게 종이 되어 자기 목의 자랑스러운 착고(着庫)를 내어주지 말자.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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