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封駁/諫諍] 이중직 목회자? 누가 벼랑으로 모는가!
[封駁/諫諍] 2014.12.12
014 / 이중직 목회자, 누가 벼랑으로 모는가!
한국교회의 목회자라면 누구든 전통적인 목회를 통해 한 번쯤은 큰 교회를 이끌 꿈을 키워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목회 활동으로 교회 부흥은커녕 가족의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몰리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과 함께 목회자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개척한 교회가 희망만큼 되지 않거나 기존의 교회라도 더는 교인 수를 늘리기 어렵게 한국교회가 자초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 밖의 생업 현장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그들은 모두 이렇게 심경을 토로하게 된다. “전통적 목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목회자 수는 포화상태이고 임지는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급격한 인구 감소 현상은 교회들도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중한 현실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다 하신다. 통일 후 북한교회를 재건하러 보내면 된다’는 식의 무책임으로 신대원생 수를 무작정 늘려 받은 결과이지만, 실은 신학대학들이 양적이고 외형적인 위상 제고 경쟁과 방만한 확대 경영이라는 욕망의 결과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는 목회자 가정들이 생활고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에 총회에서도 더는 ‘목회자 가정의 생활비’ 문제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교회 동반성장 정책’이라고 하지만 이전에는 ‘교역자 생활비 평준화 정책’ 또는 ‘미자립교회 자립화 정책’이었다. 이후 ‘미자립교회’라는 말을 ‘자립대상교회’로 바꾸었지만, 교역자 생활비를 자체 지급하는 교회가 ‘자립한 교회’라는 것이니 이 또한 한심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교역자 한 가정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역사회에 복음의 영향력을 충분히 끼치는 예배-교육-선교-봉사-친교를 실천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느님도 해결 못한다’는 난제에 어떤 정책이든 내야 하는 총회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것을 ‘선교적 목회신학적 교회론적 공동체적 차원’이 아니라 ‘미자립교회 목회자 생활비 지원’이라는 ‘지원하는 자들’의 관점으로 시작한 것부터 어긋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원하는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자기 돈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성공자나 된 양 우월감을 느끼게 조장하였고, 상대적으로 지원 대상인 목회자들은 실패자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목회자 이중직’이라는 더욱 심각한 현실 문제가 시급해졌다. 언제까지나 지원하는 편에 있을 줄 알면서 그동안 양적 풍요를 맘껏 누리던 교회들도 ‘코로나19 펜데믹’이라는 전에 없던 일을 겪으면서 소위 ‘대마불사(大馬不死)’라던 자만심에 위기를 맞아 더 이상의 ‘목회자 생활비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볼멘소리들을 하고 있다. 당연히 가진 자들의 총회는 발 빠르게 ‘목회자의 이중직’을 허용하는 선에서 자기 명분을 잃지 않는 결정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목회자의 이중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문제의 핵심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교단의 총회라면 그처럼 소위 ‘이중직’의 현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목회자들의 소명에 손상이 가지 않게, 도리어 사도 바울의 목회적 선교적 신념을 따르는 목회자들이라는 자긍심을 고취해 줄 방안을 먼저 고심해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더욱 직관적이게 ‘목회자 가정의 생계문제 해결을 위한 목회자 겸업에 관한 정책’이라고 했어야 한다.
실로 한심한 일은, 바울의 ‘자비량(自備糧, Tent Maker) 선교적 목회’에 대해서 아덴에서의 실패 이후 고린도에서 ‘세속 일로 나간 바울의 좌절’이었다고 하는 어떤 자들의 무지이다. 바울은 그의 첫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미 자신의 자비량 사역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이러한 바울의 신념과 실천 앞에 우리 모두 부끄러워하는 날이 어서 오기 바란다. 그런데 이제는 지원금에 의지하고 있는 자립대상교회 목회자들과 달리 큰 용기로 생계 노동의 현장으로 나간 소위 이중직 목회자들이 ‘믿음 없는 목회자’라는 벼랑으로 다시 내몰리고 있다. (聾)
원글 보기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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