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칼럼]

[封駁/諫諍] 개혁주의 교회 체제의 본질과 의미

농자천하/ 2017. 10. 25. 01:35
[封駁/諫諍] 2016.08.16


015 / 개혁주의 교회 체제의 본질과 의미



‘개혁주의(改革主義) 교회’는 ‘개신교회’나 ‘개혁교회’와 같은 일반적인 호칭과 달리 종교개혁의 역사성이 있는 말로, 당시 서방교회를 ‘개선’하려는 루터파 교회 외에 ‘재건’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주도했던 칼뱅에 의한 대표적인 개혁파 교회인 ‘장로회 교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와 함께 사용되던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에 대해 칼뱅 본인은 예레미야 주석에서 “이 말보다 더 큰 모욕을 우리에게 붙일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이 나를 대적하는 증오심에서 왔다고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했으니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회 외에 등장한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 곧 장로회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 등 신조(Creed)를 고백하며 ‘장로회 제도’라는 고유 체제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칼뱅파와의 논쟁 이후 대부분의 알미니안이 감리회와 칼뱅파 침례회 외의 일반 침례회, 그리고 오순절 교회 등의 일원이 되면서 ‘개혁주의 교회’라는 말은 ‘장로회 교회’로 더욱 고정되었다. 칼뱅의 장로회 교회 신학은 어거스틴과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여 당시 서방교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알미니안의 5대 항론이 제기되자 도르트회의에서 ‘칼뱅주의 5대 강령(TULIP)’으로 변호하였다.

‘장로회 교회의 정치체제’의 시초는 2차 제네바 개혁을 위해 복귀한 칼뱅이 다른 5인 위원회와 제네바 의회에 내놓은 <교회의 법질서>이다. 여기에서 통솔, 지배, 관리를 의미하는 ‘치리(治理, regimen)’라는 말은 ‘섭생, 양생’을 목표하는 꾸준하고 엄한 교육 훈련을 가리킨다. 그리고 장로회 교회의 정치체제는 회중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위하여 운용되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있다는 이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장로회 교회 체제의 3대 특징은 첫째는 유일한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치리자들의 동등성 그리고 둘째로 목사와 장로는 ‘장로’로서 동등하며 회중의 선출을 받는 치리자들이라는 것과 셋째로 노회는 교회 일체성의 구체적 실천이며 당회와 함께 상설 치리회라는 것과 총회는 비상설기구이며 치리회인 당회 노회 총회는 교회를 지배할 수는 없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교회 정치의 성패는 ‘치리’와 ‘지배’를 혼동하지 않는 데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혁주의 교회의 이 장로회 정치체제는 교황 1인 체제를 넘어 교황 신성불가침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던 중세 서방교회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의도였지만,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지배 권력으로 변질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다시 극복하려는 ‘회중교회 체제’가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정치체제가 완전할 수 없으니 기왕에 우리의 장로회 체제가 등장한 배경과 그 속성을 재검토하여 우리 자신을 갱신하는 기초로 삼자는 것이다.

함께 권력을 유지하고 향유하던 소위 성직자들이 공고히 하고 있던 서방교회의 1인 집중 피라미드 체제를 넘어서는 중에 등장한 ‘평신도’ 칼뱅이 제네바 개혁에서 채택하여 기존 교회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했던 장로회 교회 체제는, 극단적으로 분화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집단 지성’이 곳곳에서 요청되고 있는 현재에 매우 유용한 교회 체제일 것이며 또한 정체성 망각으로 혼란에 빠진 오늘의 교회를 갱신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 장로회 교회체제의 장점을, 지나친 종적 구조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찬탈하게 되는 감독제와 동시에 지나친 횡적 구조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자칫 그 실효성을 잃는 회중제의 폐단을 조화롭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다시 주목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인류가 지금껏 찾아낸 최선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지속하여 발전시켜가는 일에 우리의 장로회 교회들이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역시 과도한 희망일까?

우리는 어떤 이유로 또 어떤 폐단들을 극복하려고 개혁주의 교회가 되었는가? 이런 일종의 집단 체제를 갖게 되었는가? 이것이 오늘의 세계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자고로 길을 잃었을 때는 맨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봐야 하는 법이다.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