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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배움

박정희 시대, 서산에 강제로 끌려온 신부들

by 농자천하/ 2017. 11. 17.

 

 

 

박정희가 만든 '매머드 결혼식', 강제로 끌려온 신부들

 

[서산개척단④] "한밤중에 포장 트럭에 태우더니..."

'윤락' 낙인 찍어 강제 결혼

 

17.11.16 10:15

 

http://www.ohmynews.com/NWS_Web/Tenman/report_last.aspx?CNTN_CD=A0002376738&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1963년 9월 26일. 거친 흙바닥 위에 새하얀 버진로드(신부가 입장하는 비단 길)가 깔렸다. 남녀 125쌍이 흙길 위에 양 옆으로 줄지어 섰다. 모두 죄인 마냥 얼굴을 푹 숙였다. 웃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을린 얼굴에 갓 스물을 넘은 앳된 얼굴. 신랑의 얼굴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퉁명해 보였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속으로 수 만 번 외친 분노는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맞아 죽을까봐 두려웠다. '명령을 거부하거나 도망치면 맞아 죽는다' 이곳에 내려와 인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태어나 처음 본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니.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씨는 유달리 화창했다. 결혼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만국기가 가을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몸서리치는 그날의 기억 

 

"그래, 수놓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어유." 윤기숙(83)씨는 54년 전 자신을 생지옥에 떨어뜨린 '그 사람'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윤씨의 고향은 전남 해남군. 큰집 사촌언니가 사는 서울에 놀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역전에서 붙들렸다. 소담스레 대화를 나누다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물어 '집에서 수틀을 짰다'고 말했다. 그 두 마디 문답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여기가 학원이라고 하대유. 수예학원이유. 지금 생각하면 민정식 서산개척 단장(현재 사망)이 보낸 사람이유. 그래서 따라 갔어유. (가기 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가더니 한 상 걸게 차려주대요. 난 그걸 못 먹겠더라고유. 어딜 데리고 갈까봐 나를... 무서워서. 그리고 그날 밤, 트럭에 포장을 씌우더니만 10명을 거기 태웠어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수예학원이 아니었다. '서산자활개척사업장' 마을 초입에 내걸린 투박한 간판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여기서 살 바에 징역 살지, 똑바로 못 산다, 도망가라." 도착한 첫날, 마을 사람 누군가 다급히 속삭였다. "다시 나가보니까 뺑뺑 보초를 섰더 만유. 싹 다 둘러 쌌어유." 결국 윤 씨는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반백년이 흘렀다. 평생 "인정이라곤 없던" 남편은 40여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권 초반 국토 간척 사업에 열을 올렸다.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3리. 윤씨가 한밤중에 끌려온 마을도 간척 사업장 중 한 곳이었다. 오로지 노역을 위해 조성된 공동체. 

 

1961년 11월 사업가 민정식씨가 국가의 하청을 받고 이곳에 개척단을 열었다. 단원 모집은 비자발적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역전에 홀로 앉아 있던 사람, 거리에서 주먹을 쓰다 경찰서에 잡혀 온 사람, 거리를 떠돌던 노숙인...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유? 정말 무섭게 생겼었어."

 

할머니는 민씨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몸을 떨었다. 남성 단원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면, 여성 단원은 강제 결혼을 당했다. 1963년에 이어 1964년 11월에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225쌍이 합동결혼을 올렸다. 225명이라는 숫자는 곧 개척단의 '성과'로 기록됐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숫자를 채우기 위해 1963년에 결혼한 부부 125쌍 중 일부를 '재탕' 결혼시키기도 했다.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윤치영씨가 주례를 섰다. 일부 언론들은 '갱생의 보금자리' '매머드 결혼식' 등의 표현으로 호화찬란한 포장에 나섰다. 

 

여성들은 강제노역에서도 열외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남성 단원들의 밥까지 따로 지어야했다. 적게는 4~5명, 많게는 10명 이상의 단원들이 각 호마다 할당됐다. "세숫대야에 산에서 캔 돌을 이고" 바다를 함께 메우기도 했고, 위생을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자식을 길렀다. 폭력에 노출된 남편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국가와 언론은 '낙인찍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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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가 끝까지 좀

잘해주고, 그리고

다음 정부에서

전국에 산처럼 쌓여있는

이런 일들,

더욱 확실히 세련되게

깨끗이 해결하는,

희년의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