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튼
이렇게 대단한 초자연적인
이적들 속에 실로 기이하게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예,수,라는 이 두 글자가
항상 빠져 있다는 거 그러니
이는 예수교가 아니라는 거는 명백하지
그냥 하나님이라는
가장 애매해서 아무 데나
갖다 붙이기 좋은
기호를 사용하는
이적교 기적교 일 뿐!
다른 아무런 의미 없어
[지렁이의 기도]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
2017.12
김영봉 목사(와싱톤사귐의교회)
1.
새물결플러스의 김요한 대표가 쓴 기도책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출판한 지 한 달만에 1만부 판매를 넘었고 지금도 거의 모든 인터넷 서점의 종교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점령하고 있다. 책을 읽은 사람들로부터의 반응도 뜨겁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기도 부탁을 해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저자의 바램대로 이 책이 기도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국진 목사는 은사중지론자의 입장에서 우려를 표명했고, 김재영 교수도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저자로부터 이 책에 대한 추천평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페이스북 친구로 소통을 튼 이후로 가끔 글로 교제를 나누었다. 또한 새물결플러스에서 간행되는 책에 대해 간간히 추천평 부탁을 받기도 했다. 평소 그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원고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의 독서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저자의 체험 이야기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초월적인 체험 이야기들이 거듭 나를 방해했다.
나는 감리교인답게 은사지속론자에 속한다. 그뿐 아니라 은사 운동의 분위기 안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에 내가 살던 고향에는 약 10년 동안 강력한 은사 운동이 일어났고 내 어머니는 그 중심에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밤마다 기도집회에 다니셨고 그 덕분에 나는 방언, 통역, 축사, 신유, 입신 같은 모습을 일상사처럼 보고 자랐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내면서 다닌 교회도 역시 강력한 은사 운동의 중심지였기에 계속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나에게도 그리고 그동안의 나의 사역 속에서도 성령의 나타나심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 성서학도로서 나는 은사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믿음에 반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영적 체험에 대한 저자의 글에서 거듭 멈춘 이유는 은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의 체험 이야기 중에는 믿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전기 차단기가 내려진 상태인데도 전기가 들어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한다.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 사람이 아니라고 믿지만, 미심쩍은 구석은 남아 있다. 은사 운동 가운데 일어나는 웬만한 사건들은 다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저자의 경험들은 그 경계선을 자주 넘어선다.
2.
문제는 그러한 영적 경험을 묘사하는 저자의 단정적이고 과장스러운 어투에 있다. 영적인 세계는 함부로 단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늘 조심스럽게 분별하고 말해야 한다. 분별의 끈을 놓는 순간 위험한 땅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해롭고 읽거나 듣는 이에게는 더욱 해롭다.
저자는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어떤 사람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딸을 낳았다면 자신이 분별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살피고 침묵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내가 언제 다음 아이가 아들일 거라고 했느냐?”고 반문한다. 그의 말대로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자신의 영적 체험과 직통 계시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보면서 염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기도 체험에 대해 말하면서 자주 “가볍게 손을 얹고 기도해도 별의별 병을 다 고쳐 주셨다”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겨우 몇 십초만 기도해도 척척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기도 체험을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의 기도’가 모든 것을 일으킨 것처럼 표현한다. 영적 강자가 되기를 혹은 그렇게 알아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기도의 능력을 과시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매우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저자가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에 매우 억울하다는 반응을 냈는데,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표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도 특별히 은사가 강력히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자가 그런 특별한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단정적이고 과장적인 표현에 깊은 염려를 느낀다. 목회자들 중에 영적 강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반 신도들 중에 하늘이 쪼개져 열리는 사건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할 수 있으면 자신을 영적 강자로 보이기 위해 과장하고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읽고 자극 받으면 아주 위험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저자가 좀 더 세심하게 분별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분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이냐에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가 성서적으로 승인될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주 들었다. 말하는 사람이 믿을만하면 그 사람이 체험한 것이 아무리 황당해도 사실로 인정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살 귀신을 보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신학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성경에서 귀신은 늘 사람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드러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이 성서적인 빛에서 승인할 만한가에 있다.
사람은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자신이 서 있는 세계관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지독한 유물론자들은 모든 영적 체험을 부정한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물리적인 요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무신론적 뇌과학자들은 모든 영적 체험이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반면, 초월적인 사건의 발생 가능성에 활짝 마음을 연 사람은 초월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은 무엇이든 인정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신의 영적 체험으로 인해 초월적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최대한 자제하고 절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바울 사도에게서 얼마나 많은 은사가 터져 났던가? 그런데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딱 한 번, 그것도 다른 사람의 체험인 것처럼 밝혔을 뿐이다. 그것은”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고후 12:4)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두에 소개한 블레즈 파스칼의 ‘불의 밤’ 사건도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외투 안감에서 꿰매 놓은 양피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그 밤의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여 오직 자신만을 위해 보관했다. 그는 왜 자신의 그 뜨거운 경험을 생전에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진지하게 따져 볼 이유가 있는 질문이다.
3.
이런 이유로 인해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추천평을 쓸 수 없겠다는 뜻을 전했다. 저자가 직접 추천평을 써 달라고 부탁해 올 때는 사양하기 어렵다. 그동안 나는 적지 않은 책에 대해 추천평을 썼는데, 간혹 고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글을 충실히 읽을 수 없을 때도 그랬고, 신학적인 경향이 맞지 않을 때 혹은 책의 내용에 대해 공감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했다. 편집부의 부탁을 받을 때는 사양하기가 쉬운데, 저자가 직접 부탁하면 사양하기 어렵다. 하지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저자에게 매우 미안했는데, 책이 나온 후에 책에 29개의 추천사를 보고 잘 했다 싶었다.
저자는 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 억울하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뒤에 이어지는 좋은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영적 체험만을 두고 시비를 건다는 식이다. 사실, 이 책에서 영적 체험에 대한 부분을 제거하면 이 책은 아주 좋은 기도 신학책이 된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열광할까? 이 책이 지금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저자의 정연한 기도 신학 때문이 아니라 앞에 나온 체험 이야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체험 이야기를 도구로 하여 인격과 삶을 바꾸는 기도의 단계로 인도하려 했다고 하지만, 그 바램이 몇 사람에게나 일어날까?
나는 은사지속론자이기도 하지만 ‘은사-후기’(post-charismatic)에 속하는 사람이다. 은사를 일상사처럼 보고 살다가 은사를 넘어섰다고나 할까? 은사 운동의 열기 속에 살면서 그것이 얼마나 무익한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해로운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가 회심 초기에 열광주의적인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받고 은사 운동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에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했다. 사람들의 본성 상 은사에 붙들리기 쉽고 은사에 붙들리면 비정상적인 언행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비한 은사들은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성령의 나타나심에 자신을 열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은사가 나타나면 공동체의 덕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
나는 박재봉 목사의 체험에 주목한다. 그분은 18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력한 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한 세대 동안 부흥회를 다니면서 수 많은 병자들을 치유했다. 그렇게 사역하는 중에 그는 문득 자신을 통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흥회를 갈 때마다 치유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해 두었다. 몇 해 후에 다시 그 교회들을 방문하여 치유 받은 후의 삶을 추적해 보니 그들의 대다수가 신앙 생활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때 박재봉 목사는 은사를 거두어 주시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교회를 두루 다니며 은사 운동을 이끌던 목회자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 본다. 7080 시대에 은사 운동의 주역이었던 목회자들 중 거룩한 성품으로 빚어진 사례가 있는가? 현실은 그 반대로, 그들을 통해 드러났던 성령의 은사가 무색할 정도로 추레하게 늙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오늘 한국 교회에 필요한 부흥은 무엇일까? 초월적인 것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자극하고 부추겨서 은사 운동을 다시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그 열기를 성숙한 신앙으로 인도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부디, 저자가 여러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오고 있는 우려의 목소리들을 귀 담아 듣고 건강한 은사운동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재영 교수가 말했듯이, 나도 이 책이 속히 개정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그의 강력한 영적 체험과 방대하고 깊은 신학적 체계가 잘 통합되고 융화된다면 한국 교회에 건강한 은사 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많은 망설임 끝에 이 글을 썼고 대중에게 공개한다. 저자는 이 책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한국 교회에 공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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