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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087

by 농자천하/ 2021. 5. 23.

 

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목회 현장을 떠난 목사의 심적 고통이 너무나 크다고 해서, ‘찬송가 인도’라도 해 보겠냐고 했다. 본인도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 아니냐? 20분 정도 찬송 인도만 해라.” 그러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설교에 굶주린 목사가 마이크 한 번 잡으니까, 이게 자꾸만 말이 많아지네.”

하지만 다음 주일도 또 그다음 주일도 그렇게 반복한 걸 보면 처음부터 찬송 인도만을 하려던 건 아니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교회 빈자리가 많은 건 결국 담임목사 책임이라느니 뭐니 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게는 그와의 악연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상황을 한 번 더 지켜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몇 주 뒤 집에 돌아가는 그를 불러 정색하고 다시 말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까? 귀농귀촌협의회와 귀농귀촌신문도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데 목사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자고 했던 겁니다. 사실상 강단교류가 금지된 교단이니 나는 설교를 맡긴 적 없습니다. 찬송가 인도는 됩니다.” 그러자 역시 적반하장. 도리어 자신이 너무나 억울하다며 마구 큰 소리를 냈다.

“그게 뭔 말이야. 엉? 내가 그래도 목사인데, 목사가 설교할 게 아니면 왜 마이크를 잡겠어?! 그리구, 내가 그래도 이 목사를 도와주려는 거잖아!” “그러면 처음부터 내가 찬송 인도를 해 보겠냐고 했을 때, 그 말을 했어야죠.” “뭐라구?! 내참, 생각해 봐. 만약 내가 처음부터 그랬으면 이 목사가 나한테 마이크를 줬겠냐구!? 난 찬송 인도만 못해!” "아, 그러면 그만 두시죠."

그렇게 정리된 몇 달 뒤, 어느 귀농인 친구분이 조심스럽다며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하도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워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걸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남들에게 그러더라는 거였다. 아마 자신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했을까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물론 더구나 교회 공동체는 그 구성원인 사람들에 의해 최상의 선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또는 매우 속된 내면을 감추는 추악한 가면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이건 이 목양칼럼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갑자기 우리와 가까운 삼성교회의 어느 교인님이 생각난다. 지금은 다른 교회로 이임한 목사님이 주일 오후, 앓아누운 할머니 집사님을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또 다른 이웃 몽산포교회에서 교회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60대 남자 교인님이 마침 텃밭에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승합차를 잠시 세우고,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는 그 교인께 인사했다. 조금 전 주일예배 때도 본 그분도 인사를 받았고 목사님은 교회당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 뒤 어느 집사님이 크게 걱정하셨다. 그 교인님께서 동네 사람들한테 노발대발하니 어쩌냐, 얼른 심방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교인을 만난 목사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인사하더라!” 이런 젠장.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