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시대
입헌군주제의 긍정적인 의미
권력의 실체를 상징화하여
독점 불가로 만든다는 것
그나마 꽤나 효과적으로
참주(僭主, τυραννος) 등장을
방지하는 장치라는 것
좋은 통찰이다
(세 번째 결론 글은 아직 없음)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 눈에는
이건 뭐, 1천7백억 원짜리😡
우끼는 코미디🤣 🥱👊
역시 '평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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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게 뭐냐곸ㅋㅋㅋㅋㄱ
그리고 다음은
아래 좋은 글 내용과 함께 볼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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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가져온 곳
https://www.facebook.com/youngho.youn.5?mibextid=ZbWKwL
/ Youngho Youn
자유, 민주와 평등 그리고 대관식
(1) 자유의 시대와 왕의 의미
지난 토요일에 찰스 3세가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왕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왕, 민주와 왕, 평등과 왕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 시대에 무슨 왕이냐는 냉소를 넘어 왕에 대해 고민해 봅니다.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권좌에 오른 우리 대통령도 UN에서 자유와 민주를 반복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의 시대에 왕은 과연 무엇인가요?
대학시절에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다카시였던 것 같아요. 말수가 적었고 다소 소극적으로 보였습니다. 정확한 친구였고, 참으로 짠돌이였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는데, 그게 맞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친구였죠. 다카시와 일본어를 조금 알던 친구 세 명이서 밥을 자주 먹었습니다. 어느 날 약속을 취소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친구가 다카시에게 묻더군요. ‘취소하다는 일본어로 뭐야?’ ‘칸세루’ ‘칸세루? cancel를 말하는거야?’ ‘응! 그 말에서 왔지!’ ‘그거 말고, 칸세루 이전에 일본어로 취소하다는 말이 있을 거 아니야?’ 다카시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대화에는 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죠. ‘일본은 영국 사람이 오기 전에는 칸세루 자체가 없었나 봐. 생각해 봐! 사무라이가 무슨 칸세루를 하겠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유입니다. 사자 한 마리가 무리의 왕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사자 왕이 말합니다. ‘먹다 남은 음식만 먹다가 들소나 하이에나와 싸움이 나면, 제일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짝짓기를 해서도 안된다.’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면 여기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무리에서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무리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인간도 대게 그러한 순간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지 않지만, 그런 옵션만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자유를 선택하는 순간, 무리에서 이탈하고 하이에나의 밥이 됩니다. 인간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도 짐승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는 liberty의 번역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 번역을 일본에서 했는지 중국에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너무나 완벽한 번역입니다. 치밀함으로 보았을 때 일본 번역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스스로 자와 말미암을 유가 합성되었습니다. 스스로 말미암는다. 사자는 할 수 없고,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이 스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에서 liberty가 오기 전에 동양에는 자유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자유로운 상태는 물론 있었고, 형용사로서 자유롭다는 표현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는군요. 조상이 어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거기에 얽메이는 것이지 무슨 자유가 있었는가? 칸세루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가 있었겠어? 자유는 있었지만, 동양고전에 자유라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주’라는 단어를 썼고, ‘해탈’이라는 단어도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자주와 다르고 해탈과 다릅니다. 자유라는 단어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게 개입되어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UN 총회에서 강조한 자유도 정치적인 의미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시대에 삽니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누립니다. 대통령을 비방하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자유가 시작된 곳이 바로 영국입니다.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고, 그의 4대손인 존이 왕이 되었을 때인 1215년에 마그나 카르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곳에서 비로서 왕으로부터 신민의 자유, 왕으로부터 종교의 자유가 등장합니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영국왕은 신민에게 조금씩 양보해왔고,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s), 권리장전(Bills of Right)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자발적인 양보는 아니었습니다. 영국왕들은 지속적인 양보를 해 왔고, 덕분에 피를 최소한으로 흘리고, 정치적 발전을 이뤄왔습니다. 누군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했지만, 우리의 자유와 민주는 타협의 결과물입니다. 양보와 타협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유의 시대에 무슨 왕이고, 무슨 대관식이냐고 냉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 자유는 엊그제 대관식을 한 찰스 3세 조상들의 현명한 판단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양보의 대가로 우리는 현대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아직까지 대관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서로 양보한 훌륭한 타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유의 시대에 무슨 대관식이냐는 말에는 역사의식의 빈곤함이 있습니다. 누구는 왕이라는 제도를 칸세루하자고 말하지만, 칸세루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니어서 그런 것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London Life 2.0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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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민주와 평등 그리고 대관식
(2) 민주의 시대와 왕의 의미
민주주의를 교실에서 배우지 못하고 거리에서 배운 세대가 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민중민주주의에 가까웠다. 민중민주주의자일수록 민주주의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증권회사에 입사했을 때, 회사 게시판에 닉네임으로 글을 쓰게 했는데, 나의 닉네임은 민주주의였다. 백성 민(民), 주식 주(株), 조심하자는 의미의 주의(注意)를 썼다. 국민의 주식투자는 마땅히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시대에 맞지 않게 계몽적인 닉네임이었다. 나의 젊은시절도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민주제가 있고 군주제가 있다. 데모크러시(democracy)와 모나키(monarchy)를 번역한 것인데, 의미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훌륭한 번역이다. 데모크라시보다 민주주의가 더 정확한 말처럼 보일 정도다. 민주제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의미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 군주제란 주권이 임금에게 있다는 의미다. 왕이 나라의 주인이다. 우리가 주인이 아닌데, 자꾸 주인주인하니까 감이 안오는 것도 사실이다.
호수에 떠 있는 백조를 보자! 백조는 호수 주인의 것인가? 동네 사람의 것인가? 먼저 본 사람의 것인가? 주인이 없다는 이야기다. 바다에 떠 다니는 고래를 보자! 고래는 어부의 것인가? 바닷가 주민의 것인가? 해적의 것인가? 주인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 집에 손님 것도 아니고 집안 일을 도와주는 분의 것도 아닌 어떤 물건이 있다고 해보자! 그것이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면, 집 주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영국 호수의 백조와 바다의 고래는 왕의 것이다. 나라가 국민의 것이면 고래도 백조도 국민의 것이다. 주인이란 그런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국민은 추상적이지만, 왕은 구체적이다. 권력이 추상적이면, 권력은 무소불위가 되기 쉽다.
영국은 형식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모양새가 안 나오기 때문에 공화제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국은 공화제가 아니고 입헌군주제다. 형식적으로 영국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민주주의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두 개의 제도가 있다. 하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며, 다른 하나는 프로레타리아트 독재다. 공산당 일당 독재로 대표되는 프로레타리아트 독재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진짜 프로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형식도 민주주의며, 실질은 더욱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프로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이 국민이라는 개념보다 백배는 더 추상적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그런 문제는 그들의 안중에 없다.
영국은 실질적으로 민주적이다. 민주적이어서 문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여론이 가장 중요하며, 여론을 따라 정책 변경과 유턴을 밥 먹듯이 한다. 총리를 직접 선거로 뽑지 않아도 총리가 국민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기울인다.
영국의 총리를 대표하는 인물로 고집불통 이미지 윈스턴 처칠과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론에 귀기울였다. 처칠은 자신의 전쟁 결정이 민주적인 것인지 끝없이 자문했고, 의견을 듣기 위해 평생 타보지 않았던, 지하철을 탔다. 마가렛 대처는 노조와 끝까지 대치했지만, 많은 정책에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였다. 마가렛 대처가 철의 여인이지만 철의 남자 스탈린(스탈은 러시아어로 쇠를 의미함)과는 비교불가다.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영국의 총리가 권위적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위에 왕이 있기 때문이다. 대관식에서 리쉬 수낙 총리는 성경 구절을 봉독했다. 선생님 지시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국어책을 읽는 학생 같았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페니 모던트는 대관식 내내 왕 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왕이 있는 곳에서 그녀는 시동과 같았다. 시동의 독재를 상상해 보라. 독재는 유아독존이어야 가능하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영국에서 독재는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이 공화제를 표방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영국은 형식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사회보다 민주적이다. 민주주의 완성을 위해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것은 군주가 사회에 끼치는 democtratic한 공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한가지 더 있다. 완벽한 사회를 꿈꾸는 자, 그 사회를 망친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자, 그 민주주의를 망친다. 그 망쳐진 민주주의가 소련에 있었고, 중국에 있었고, 북한에 있다.
민주의 시대에 왕이 있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이상하지만, 실질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
자유와 민주의 시대에 왕은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문제는 평등의 시대에 왕이 무척이나 이질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왕의 존재를 좋게 봐주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 평등의 문제다.(3부에서 계속됨)
London Life 2.0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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