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신의 복음을 살자
7년 전, 면 소재지에서 바로 눈에 띄도록 번듯한 새 교회당을 마련해 이전했다. 발이 시려서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고 비가 줄줄 새서 실리콘으로 때우느라 혼자 지붕에 올라갔다가 사다리가 넘어가거나, 사택 지붕이 푹 꺼져서 안으로 떨어진 일도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시 유명했던 몇몇 교인들로 마을 주민들은 우리를 몹시 나쁜 교회로 여겨 담뱃불을 던지고 가래침을 뱉고 지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더구나 그렇게 퇴락해만 가던 교회당과 사택은 어느새 면 소재지에서 가장 낡고 허름했다. 교회를 욕하다 못해 ‘예수 믿는다면서 거지꼴’이라는 험담도 한다고 가까이 사시는 노 권사님은 늘 속상해 하셨다.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졌다. 새로운 교회당을 마련하느라 한 반년을 거의 혼이 빠져 지내야 했다. 그런데 마을잔치를 하며 입당한 다음에는 결코 웃을 수 없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시시때때로 어떤 방언하는 무리가 찾아와서 우리 교회당 십자가 탑을 향해 두 팔을 들고 통성기도하는 것이었다. “주씨옵소서! 주실 줄로 믿쎱네다!” 밭에서 일하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면사무소 청소차 뒤로 숨는 그들을 쫓으며 숨바꼭질하곤 했다.
요즘도 신천지들은 웃기지도 않는 편지를 교회로 보내고, 어떤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이 시대의 교회가 깨어야 한다’며 대형 스피커를 승합차 지붕에 얹고 교회 앞에서 마구 떠들고 가거나, 잘 떨어지지도 않는 스티커를 교회당 벽에 떡하니 붙여놓고 가곤 한다. 영문도 모르게 지은 죄가 많은 게 요즘의 교회요 목사인가 보다.
어저께는 다시 몇 가지 확인 할 일이 있어서 군청을 다녀오는데 몹시도 가물었던 겨울 끝, 땅을 적실만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농협이랑 우체국 앞 길거리에서 같은 시찰 내의 이웃 교회 교인들이 전도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 날은 마침 부산에서 우리 마을로 귀촌했으면 하는 분이 있어서 상담을 약속했었고, 오랜 시간 그분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분은 방금 전에 전도지를 나누는 그 교인들을 보았다면서 우리의 지역사회 선교가 특별해 보인다며 궁금했다. 이웃들이 애달프게 살고 있는 현실에 관심은 없이 교회당에 교인을 채워 보려는 전도를 이미 우리는 십수 년 전에 만 4년 동안 줄기차게 했지만, 그것으로는 우리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이웃의 삶의 현장에 예수님 마음으로 함께 거주하며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는 걸 살아 보여주는 일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시간이 꽤 되어 그분을 배웅하려고 교회당 문을 여니, 아까 그 교회의 전도지가 떡하니 놓여있다. 아이고, 우리 권사님 댁을 심방하고, 집사님 가게 개업예배 드리러 오고, 우리가 오랜 기도와 돌봄으로 전도하는 이웃을 잘도 채가더니!? 도대체 교회 부흥이 뭐라고. 그래도 겨우 ‘건빵 한 줌 담아 넣은 전도지’는 너무했다. 그러지 말고 제발 너희 복음을 먼저 살아 보여 보라구!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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