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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90이 넘어도 우린 사명자

by 농자천하/ 2019. 5. 25.

 

90이 넘어도 우린 사명자

캄보디아의 한 농촌 마을에서 농촌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 아들을 두신 노 권사님은 요즘 아닌 말로 롤러코스터를 타셔야 했다. 갑자기 찾아온 맹장염으로 선교사님은 간신히 대도시 병원으로 이동했지만, 시급을 다툰다고 한국으로 빨리 귀국하여 수술하라는 것이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직항로로 무려 5시간 30분은 족히 걸리는데 그나마 가장 빨리 귀국할 방법은 말레이시아를 경유하는 노선뿐이었다.

우려하던 일은 비행기 안에서 일어났다. 맹장염이 심하게 악화 되었는데 이런 경우 무조건 경유지에 내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싱가포르의 엄청난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아닌 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선교사님은 아픈 것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려고 혼자서 엄청난 통증을 참아야 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귀국하여 병원 응급실로 급히 달려가 진단을 받아보니 이미 비행기 안에서 맹장은 터진 것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인 맹장염으로 생사의 기로에 설 뻔하였다는 의사의 탄식을 들어야 했다. 닷새 만에 퇴원하였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고향 집에 꼼짝없이 누워 ‘엄마’의 간병을 받게 된 선교사님을 늦은 밤 심방했다. 두 모자분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했다. “목사님, 고향 집 어머니 밥이 최고지유?” 권사님의 얼굴에서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주간을 집에서 쉬고 선교사님은 다시 선교지로 복귀하였다. 주일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시는 노 권사님들을 승합차로 모셔다 드리는데 다시 혼자 남으신 권사님이 차에서 내리며 말씀하신다. “몇 달 뒤 며느리도 잠깐 오는데 아예 맹장 수술을 해서 보내야 할라나, 그랬슈!”

교회가 시작된 지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도시로 나간 교인이 무려 2백 명이 넘는다. 내가 2001년에 부임한 이후로도 새로운 세례교인 43명을 도시로 내보냈다. 그리고 소천 되셔서 직접 장례를 모신 분이 스물세 분이고, 도시교회로 이적한 교인이 또 20여 명이나 된다. 그래도 우리는 ‘선교적 교회’ 그러니까 ‘선교를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부터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본래의 교회’로 다시 일어서 보려고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이곳에서의 모든 고군분투를 논문으로 정리하려고 ‘갈릴리 신학대학원 박사원’에 지원했었다. 그때 나는 “사그라져가는 것이 이미 내려진 결론이 된 농어촌교회에서의 목회는 ‘황혼 목회’이다. 황혼 때는 태양이 하루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농어촌교회의 미래는 그래서 아름답다.”고 지원서를 냈었다.

“거 보세유, 권사님! ‘얼른 죽지 않고’ 여태 살아있으니 아들 선교사님 건강 회복시켜 또 선교지로 보내셨잖유! 그러니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건강히 사셔야 하는 게 권사님들 사명이란 말여유!” 우리는 90세를 넘겨도 여전히 사명자들이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