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acebook.com/100000108690563/posts/3314220245258233/
/ 박충구 교수
목사들의 선행 뉴스
큰 교회 목사들 일곱이 모여 삼억 오천만 원을 모금하고, 5천은 어디, 3억은 대구로 보냈다는, 몇 목사들의 사진이 곁들인 뉴스가 나왔다. 과연 잘하는 것일까?
예산 집행의 민주적 절차와 합의 과정 없이 목사가 한마디 하면 돈을 내놓는 교회, 목사에게 참 편한 교회다. 목사는 퍽 능력이 있어 보인다. 이런 목사들이 이명박, 박근혜가 청와대 예산, 국정원 돈 마구 가져다 쓴 것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오래전, 감리교 감독 선거를 앞두고 가까운 목사 편에 내게 건네진 007가방, 그 안에는 교인들의 헌금을 수합한 듯한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나는 즉시 돌려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교회 장로가 하얏트 호텔에 있는 고급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으시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놓고 갔다. 다시 돌려보냈다.
마치 속이 뻔한 호의를 보인 목사와 상극적 관계로 들어가는 듯한 긴장까지 느껴졌다. 어느 자리에서 그 목사는 자기 교회 장로들이 자기에게 얼마든지 돈을 쓰라고 한다면서, 교단을 바르게 바꿔 놓는 일이 수십억보다 더 귀한 일이라 하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솔직히 양면적 느낌이 있었다. 도대체 그 교회는 헌금을 어떻게 관리하고 집행하기에 목사에게 마음대로 돈을 쓰라는 예산을 세우나 하는 생각과 이 목사를 움직이면 큰돈이 들어가는 일을 쉽게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목사의 형이 감신 채플을 지어줄 듯하더니 이런저런 요구를 했다. 그의 말을 안 들어주니 차일피일 모른 척했다. 그러는 중에 어느 장로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몇 주 시간을 달라더니 결심을 알려왔다. 그는 수십억을 들여 채플을 지으면서도 익명으로 짓기를 당부했다. 예산을 훨씬 초과했지만, 그는 모든 경비를 다 부담했고, 다 지어진 채플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야 한다며 오르간도 십수억을 들여 익명으로 봉헌했다.
신학대학 영성의 요람인 채플을 지을 기회를 놓친 그 목사는 학생 기숙사를 짓겠다고 했다. 디자인이 좁고 답답했지만, 지어준다니 학교 당국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숙사 명칭을 그 목사 아호로 해야 한다는 요구가 들어왔다. 나는 반대했다. 감신 기숙사 짓는 돈은 그 교회 교인들의 헌금이니 교회 이름으로 한다면 반대하지 않겠으나, 목사 돈도 아닌데 젊은 신학생들이 공동생활하는 기숙사 이름에 왜 그의 아호를 붙여야 하는가 따져 물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짓을 앞서 하는 총장에게 내가 함량 미달이라 비판했더니, 나중에 내가 그의 성차별적 교수 인사에 반대하여 갈등이 일어나자 그는 나를 법에 고소하면서 이 항목도 넣어 고소했다. 물론 혐의가 모두 조각되고 만 일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모인 교회 돈을 우습게 안다. 자기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다고 여긴다. 800 억 까지 교인 모르는 계정을 가진 교회도 있었다. 대형 교회 목사가 결재만 하면 쓸 수 있는 돈이 일반인의 상상을 불허한다. 전광훈이에게도 뒷돈도 대고, 교단 행사에 생색내고, 교회 광고에는 당연히 목사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게 한다. 모두 목사의 자의에 맞아야 지출되거나 쓰이는 돈이다.
교회 예산 떡 주무르듯 하는 목사, 그게 종교계의 비리와 권위 남용이라고 아직도 목사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구태를 이어가고 있다. 착한 일 했는데 왜 그러냐고? 착한 일은 목사가 자기 개인 돈을 갹출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왜 목사가 교회 돈을 제 돈처럼 내고, 사진은 왜 찍어 선전하나? 부끄럽지도 않나? 늘 하던 짓이라 당연하기만 한 것인가?
목사 한 마디에 돈 수천만 원, 수억이 오고 갈 수 있는 교회는 교회 예산 집행의 투명성이 없는 교회다. 그 교회 일반 교인들은 교인들이 수시로 보내주는 기름진 헌물에 더해 목사 봉급을 비롯한 패키지가 얼마인지도 하나도 모른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 양심적이라면 급여 명세를 낱낱이 공개하기 바란다. 대형 교회 목사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직격탄을 맞은 이들을 도울 뜻이 있다면 큰 교회 목사끼리 모인 클럽에서 “우리 오천씩 낼까...” 하며 의기투합할 것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에 따라 모든 교인이 동의하고 합의한 헌물을 내놓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인들의 정성이 담긴 헌물이니 요긴하게 사용해 달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세대가 바뀌어도 교회 목사는 참 안 바뀐다. 목사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오가게 된다. 이렇게 흐려진 영역에서 소아적 임금 노릇을 하는 목사들은 깨끗하고 투명하게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다. 그 왕 같은 편안함을 포기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나 싶다. 부자 교회 목사들이 공과 사를 제대로 구별하며 투명하게 사는 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함께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 무덤> (0) | 2020.04.12 |
---|---|
법안스님의 안심법문,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수준있는 법문인가? (0) | 2020.04.10 |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0) | 2020.04.05 |
치가 떨린다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자비심 없는 일벌백계만이 이 나라를 살린다/ProjectReSet (0) | 2020.03.25 |
누가 기독교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나 (0) | 2020.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