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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눔

인간의 마지막 권리, 죽어감의 윤리학으로의 초대

by 농자천하/ 2020. 6. 24.

https://www.facebook.com/100000108690563/posts/3518783294801926/

/ 박충구 교수

<죽어감의 윤리학으로의 초대>

2020년 봄/여름호 <사회이론>학회지를 받아보니 2019년 출판한 나의 책 <인간의 마지막 권리 -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한 13가지 물음, 동녘출판사>에 관한 서평 “죽어감의 윤리학으로의 초대”가 실렸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니, 서평자 연세대 하홍규 선생께서는 내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나의 이해를 평하기보다는 “죽음의 윤리학으로 초대’받은 마음으로 서평을 쓴다고 하셨다.

살아있는 자는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고 했던 에피큐러스와 유사하게 우리가 죽음을 겪는 순간 우리는 “시간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시간적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일러주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시선을 가지고 하 선생은 서평에서 나와 대화하듯 공감을 나누어 주셨다. 저자로서 서평자의 진지함과 성실한 마음이 고마웠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가기도 하고, 억지스런 의료화된 죽음을 강요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처럼 그가 죽어갈 때 죽음을 상투적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는 일이다. 상투적인 죽음 이해는 정형화된 죽음이라는 절차 속에 죽어가는 이를 몰인정하게 집어 넣는다. 여기서 죽어가는 이는 무력하게 그의 마지막 권리를 박탈당하기 십상이다.

생명을 가진 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삶과 죽음을 맞는다. 죽어가는 이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가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왔듯이 그의 죽음의 과정에 우리가 연대하며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그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스스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또는 서로 지켜주며 살듯이, 죽어가는 이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관계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있어서 삶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약자가 되어 맞는 우리의 죽음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위하여 우리 대부분의 사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죽음을 앞둔 인간을 위해서는 오직 일부 사회만 그의 마지막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운 삶보다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 결과 19세기 이후 우리는 다양한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독 죽음에서만큼은 이미 적절성을 상실한 과거의 규범을 관행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그친다. 가장 생명력이 약한 이를 관행이라는 절차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나는 삶에서나 죽음 앞에서나 “행복한 사람”이 될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권리를 소홀히 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 권리를 제도적으로 지켜주자고 하는 것이다. 인간답게 존엄한 삶을 살 권리를 지켜온 이라면,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관리해 왔듯이 자신의 죽음 역시 타인의 결정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있게 관리할 권리, 그 마지막 권리도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하 선생은 이렇게 서평을 마쳤다: “박충구 교수는 인간다운 죽음에 나를 비롯하여 모두를 초대했다. 초대에 응하여 나는 한 가지 더하고 싶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사회가 그 존엄성을 지켜주는 죽음, 그리고 그것에 내가 덧붙이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그렇다. 존엄한 삶은 행복한 삶과 내밀히 연계되고, 존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존엄한 죽음 또한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