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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눔

순교자 문준경,, 사실의 왜곡과 미화, 신화 만들기/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실!

by 농민만세 2020. 11. 15.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570

“진실 그대로도 훌륭하신 분, 사실 왜곡으로 신화화해서는 안 돼”


전남 신안군 ‘섬마을 전도자’로 일 년에 아홉 켤레 고무신이 닳도록 복음을 전한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 한국 성결교회 역사상 첫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의 복음 전파와 순교를 불사한 믿음 덕분에 증도면 주민 중 90% 이상이 기독교인이 됐다.

올해 전국적으로 문준경 전도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사진전, 뮤지컬 공연, ‘섬티아고’ 순례길 개발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때, 문준경 전도사의 과거사 논란이 일고 있다. 2014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원영(제일교회) 목사는 교단지 에 기고한 글을 통해 문준경 전도사의 결혼과 삶에 관한 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교단 측에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

2019년에는 문준경 전도사를 사랑받는 아내요, 시댁의 지원으로 전도사역에 자신을 내어 놓는 펼치는 선교사로 그린 을 출간했다. 문준경 전도사 문중 4대손인 정원영 목사가 말하는 진실을 일산 카페에서 만나 들어보았다. 

문준경 전도사의 첫 일대기는 다. 1985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출간됐다. 몇년 뒤 도 출간됐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정원영 목사는 이 책을 하룻밤 사이에 읽었다고 말한다.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삼촌 손을 잡고 찾아간 어느 묘 앞에서 삼촌은 말했다. “원영아! 이분이 누구신 줄 아니? 한국전쟁 때 교회와 성도들을 살려내기 위해 대신 돌아가신 우리 집안의 순교자 할머니 문준경 전도사님이시다.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너는 순교자의 자손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정원영 목사는 어린 나이였지만, 가슴이 먹먹해졌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후 저는 순교자의 자손임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우리 가문의 후손들은 모두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순간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할머니는 버림받은 여인이었고, 할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용에 이쪽저쪽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발견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책 내용 또한 서남해에 외롭게 떠 있는 한 깡촌 섬 이야기 정도로 작게 취급되었기에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희미하게 잊혀졌습니다.”

새천년이 시작되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에서는 최초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 이야기를 한국교회 전체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CBS에서 영상물이 만들어지고, 2013년에는 교단 산하 순교기념관까지 증도에 개관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 이름모를 섬마을에서 일어난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순교자 이야기로 떠올랐다.

결국 교단에서 발행한 책과, 방송국의 영상물까지 더해져 문준경 전도사는 부도덕한 남편 정근택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 정원영 목사는 문 전도사와 남편 정근택의 관계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1908년 17세에 결혼 한 문 전도사와 정씨는 10년 간 부부로서 본보기가 되는 생활을 했다. 문 전도사는 1919년 시아버지의 별세로 3년 상을 치르고, 정씨 문중의 효부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문 전도사가 직접 남편의 두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1922년 1월 두 번째 부인 소복진 씨와 결혼했고, 소 씨는 같은 해 여덟 달만에 난산 끝에 딸아이를 낳았다. 이 때 곁에서 미숙아와 산모를 정성을 다해 살려낸 이가 문 전도사다. 이를 지켜본 큰 시숙은 아이의 이름을 ‘문준경의 마음’이란 뜻을 담아 ‘문심文心’이라 지었다. 

또 정원영 목사는 ‘남편 정 씨와 둘째 부인 소씨가 문 전도사의 복음 사역을 방해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문 전도사가 목포 죽교동으로 옮겨 생활할 때, 이미 정 씨 부부도 북교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두 집은 서로 왕래하는 사이였고, 아이들은 문 전도사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문 전도사는 족보와 호적에 다 정 씨의 부인으로 올라 있었고, 아이들도 법적으로는 다 문 씨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 전도사가 버림받은 여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삯바느질로 연명했다는 이야기도 오해입니다. 목포에는 정근택 부부 가족뿐 아니라 문 전도사님의 오빠도 여관업을 크게 하고 있었습니다. 두 집안은 당연히 왕래가 있었구요. 문 전도사님은 혼자 생활했기 때문에 바느질 일을 소일거리 삼고 있었는데, 당시 귀하다는 재봉틀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 특히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왜곡되어 전해진 것일까. 정원영 목사는 초기 전기가 나올 당시 증언을 한 고 백정희 전도사를 언급했다. “백정희 전도사님은 1940년부터 1950년 인민군에 의해 순교하실 때까지 10년간 문 전도사님과 함께 생활하며 사역을 도왔던 수양딸입니다.

이 시기는 가정을 완전히 떠나 사역에 헌신하던 때입니다. 백 전도사님은 불행한 부부생활로 고통 받았던 분인데, 자신을 위로하는 문 전도사님의 결혼생활에 자신의 불행한 부부생활을 투영해 아이도 못 낳았고 둘째 부인이 있으니 당연히 불행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리 증언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백 전도사님 자신의 간증에 나와 있는 결혼 생활과, 문 전도사님의 결혼생활이라고 증언한 내용이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후손들이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닐까. 정원영 목사는 아니라고 한다. 처음 책이 나왔을 당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인 고 이만신 목사에게 항의했다는 것. 이 목사는 문 전도사의 수제자이자 외가 쪽 조카뻘 되는 친인척이다.

이 목사는 총회장으로 본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직접 감수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사과했고, 다음번에 다시 책이 나올 때는 꼭 고치겠노라 약속까지 했다. 2014년에는 교단지 에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공개적으로 잘 못 되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책과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내 전시물에는 수정된 부분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정 목사는 문 전도사를 “신혼 첫날부터 남편에게 소박맞은 동정녀로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폐쇄적 특징이 강한 섬에서 입지전적 선교가 가능했던 것은 마을 유지요, 큰 사업가였던 남편 정 씨의 영향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한 아픔을 결국 복음을 위해 조성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며 놀라운 사역을 일궈냈던 점, 목숨을 걸고 증도에서 인민군과 맞서며 성도들을 지켜내려 했던 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결과물임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략

문준경 전도사는 신안군에 세 개의 교회와 세 곳의 기도처를 세웠다. 일 년에 아홉 켤레 고무신이 닳아 없어지도록 돌아다니며 전하던 복음전파와 목숨을 내 던지는 순교 정신에 영향을 받아 문준경 전도사 순교 후 오히려 100여 곳의 교회가 더 생겼다. 복음률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90%. 열에 아홉이 문준경 전도사가 전하던 그 예수를 믿노라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은 결혼 생활의 여부에 관계없이 훌륭했다. 잘못된 역사는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문 전도사 후손들)이 있다면, 아니 없더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교단 내 주도권 싸움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우겨서도 안 될 것이다.

“바른 역사 인식 속에서 바른 신앙의 유산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정원영 목사의 믿음이다. 교단에서도 납득할 만한 조사 과정과 교단 안팎의 전문가를 통해 바른 역사를 발굴하고 정착시키는 것이 문준경 전도사의 신행信行을 오늘날에 올바로 되살리고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