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다시 만나는 네비우스-1”
‘네비우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본 건 대부분 그렇겠지만 신학교 선교학 수업의 ‘네비우스 10대 선교정책’이라는 내용을 통해서였다. 그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사 자신이 아니라 1890년에 한국을 방문한 그의 영향으로 1893년 한국 장로교 선교사 모임에서 제시한 10대 선교 방법론이다.
그것은 ①노동자들에게 우선 전도 ②가정주부 개종 중시 ③지방 소학교 설립, 기독교 교육 실시 ④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주력 ⑤한글성경 번역 ⑥모든 종교서적의 한글 출판 ⑦자급 자치의 교회로 ⑧신자는 누구나 전도자가 되게 ⑨의료 선교사는 사랑으로 환자를 감화 ⑩지방 환자는 그의 고향까지 심방한다 등으로 특히 ④⑦⑧번이 유독 강조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10대 선교정책’만 배우고 정작 그 ‘네비우스’라는 분이 누구인지 왜 이런 선교정책들이 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1890년까지 우리 땅에 들어온 10여 명의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사실 별다른 기초적인 선교 훈련도 없이 열정 하나만 가지고 온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갓 목사 안수를 받은 이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한국 땅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을 일으켰는데, 오죽했으면 미국 선교본부에서는 그런 그들을 가르치도록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 1829 ~ 1893) 중국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중국 이름 ‘니 웨이 시’(倪維思)인 존 네비우스 목사는 당시 60세로 1854년에 청나라 말기의 중국에 파송되어 이미 36년째 사역하는 중이었다. 그는 1855년 자신의 선교 활동을 토대로 〈선교사역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영국과 미국 선교부로부터 큰 호평을 받고 있었다. 1890년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에 온 네비우스는 젊은 후배 선교사들에게 많은 강의를 해 주고 중국으로 복귀한다.
네비우스 선교사는 처음 중국 땅을 밟은 이후 1862년 산동에 여학교를 개설하여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에게 서양 기독교는 금전을 앞세운 외세 침략자들로 인식되고 있던 폐단을 극복하고자, 1871년 ‘연태’ 일대의 황무지를 일구어 손수 시범농장을 만들었고 사과, 배, 포도, 매실나무를 심고 재배기술을 가르친다. 다른 선교사들이 대도시에서 자신들의 안위만 추구하고 있을 때 그는 피폐 되어 가던 중국 농촌에 눈길을 돌린 것이었다. 현지 중국 농민들과 일군 농장에서 마침내 신품종 사과를 출하, 1877년 인근 지역에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자 은(銀) 7천6백 량을 기부할 만큼 활발한 농촌 자활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을 목표하고,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 등의 세 가지를 자신의 선교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유명한 중국교회의 ‘3자(三自) 정신’이 바로 이 네비우스의 헌신적 선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계속)
*** '농목의 농촌살이' 칼럼은 다다음 주부터 계속 됨
'[갈릴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마음 칼럼] 네비우스를 아시나요? 2 (0) | 2021.07.17 |
---|---|
목회자 생활비, 최저임금과 격차 더 벌어져,, 2260개 자립대상교회 월평균 58만 원 지원받아 (0) | 2021.07.16 |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093 (0) | 2021.07.03 |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092 (0) | 2021.06.26 |
오, 요즘 이런 문학도가!ㅡ,ㅡ 그럼, 이런 신학도는?! 에고! (0) | 2021.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