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惺牛 경허의 오도가, 오도송 (驪事未去 馬事到來, 牛無鼻孔處)

by 농민만세 2022. 6. 2.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四顧無人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衣鉢誰傳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四顧無人

봄 산에 꽃은 웃고 새는 노래하며
春山花笑鳥歌
가을밤 달은 밝고 바람은 맑다
秋夜月白風淸

바로 이러한 때에
正恁麽時
몇 번이나 무생의 노래 한 곡조를 불렀던가
幾唱無生一曲歌
한 곡조 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一曲歌無人識
어이하리, 시절인가 운명인가
時耶命耶且奈何

산 빛은 문수의 눈이요
山色文殊眼
물소리는 관음의 귀요
水聲觀音耳
소를 몰고 말을 모는 이가 보현이요
呼牛喚馬是普賢
장삼이사가 본래 비로자나불일세
張三李四本毘盧

부처와 조사의 말씀이라 하지만
名佛祖說
참선과 교학이 어찌 다르리
禪敎何殊
단지 분별을 일으킬뿐이로세
特地生分別

돌 사람은 피리 불고
石人唱笛
나무 말은 조는구나
木馬打睡
사람들은 자성을 알지 못하고
凡人不識自性
말과 성의 경계이지 내 일 아니라 하니
謂言聖境非我分
가련코나, 이런 이들이 지옥의 잔재로다
可憐此人地獄滓

내 전생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回憶我前生事
사생 육취의 온갖 험한 곳에서
四生六趣諸險路
오랜 겁 동안 윤회하며 신고를 겪었네
長劫輪廻受苦辛

지금 눈 앞에서 자성을 분명히 보니
今對目前分明
이내 마음 견딜 수 없구나
使人叵耐兮

다행히 숙세의 인연이 있어
幸有宿緣
사람이요 장부로 태어나
人而丈夫
출가하여 도를 얻었으니
出家得道
사난 중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어라
四難之中無一闕

어떤 이가 지나는 말로 '콧구멍 없는 소'라 하는데
有人爲戱言作牛無鼻孔
그 말을 듣자마자
因於言下
나의 본 마음을 깨달았도다
悟我本心

명과 상이 모두 공하니
名亦空相亦空
공은 텅 비고 고요하니 늘 광명이로다
空虛寂處常光明

한 번 듣고 모든 것을 깨달으니
從此一聞卽千悟
눈 앞에는 홀로 밝은 적광토요
眼前孤明寂光土
정수리 뒤에는 신비한 금강계로다
頂後神相金剛界

사대와 오음이 청정한 법신이며
四大五陰淸淨身
극락국은 화탕과 한빙이요
極樂國鑊湯兼寒氷
화장찰은 검수과 도산이며
華藏刹劍樹及刀山
법성토는 썩은 흙이요 똥무더기이요
法性土朽壤糞堆
대천계는 개미굴이요 모기눈썹이로다
大千界螘穴蚊睫

삼신과 사지는
三身四智
허공과 만상이요
虛空及萬像
눈길이 닿는 곳이 본래 진짜 하늘이니
觸目本天眞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也大奇也大奇

솔바람 서늘하니
松風寒
사면이 푸른 산이요
四面靑山
가을 달 밝으니
秋月明
물과 하늘이 하나로다
一天如水

꽃은 노랗고 대나무 푸르니
黃花翠竹
꾀꼬리 울고 제비 재잘거린다
鶯音燕語
늘 그러한 큰 쓰임이
常然大用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구나
無處不現

천자의 문이 열린들 어찌 취하랴
市門天子何須取
평지에 파도를 일으킬 뿐이니
平地上波濤
구천 옥새는 참으로 괴이하고
九天玉印眞恠在
해골의 눈동자일 뿐이로다
髑髏裏眼睛

무량 부처들이 늘 앞에 나타나니
無量佛祖常現前
초목과 돌과 기왓장이 그것이요
草木瓦石是
화엄과 법화를 내가 늘 설하니
華嚴法華我常說
가고 서고 앉고 눕는 일이 다 그것이라
行住坐臥是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도다
無佛無衆生

내가 망언을 하는 게 아니다
是我非妄言
지옥을 바꾸어 천당을 만드는 것이
變地獄作天堂
모두 내 손에 달려 있고
摠在我作用
백천 가지 법문의 한량 없는 이치가
百千法門無量義
흡사 꿈이 깨어 연꽃이 핀 것 같도다
恰似夢覺蓮華開

이변과 삼제를 어디서 찾으랴
二邊三際何處覔
가없는 시방세계가 큰 광명이니
十方無外大光明
단숨에 한 마디로 말하자면
一言而蔽之乎
나 자신이 대법왕이라
我爲大法王

모든 법이 내게 있으니
於法摠自在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是非好惡
어찌 걸림이 있으랴
焉有罣碍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無智人聞此言
내가 거짓을 말한다고 여겨
以我造虛語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겠지만
不信又不遵

혹시 귀 뚫린 나그네가 있다면
若有穿耳客
살피어 믿고 의심하지 않아
諦信卽無疑
안신입명하는 자리를 얻으라
便得安身立命處

속세의 사람에게 이르노라
寄語塵世人
한 번 사람이 몸을 잃으면
一失人身
만겁에 다시 얻기 어렵다
萬劫難逢

하물며 이 덧없는 목숨
況且浮命
아침에 저녁을 도모할 수 없으니
朝不謀夕
눈먼 나귀가 발 닿는 대로 가서
盲驢信脚行
편안과 위태를 모르는 꼴이라
安危摠不知

저 사람도 이 사람도 다 그러하구나
彼如是此如是
어이 나에게 무생을 배우러 오지 않는가
何不來我學無生
인간과 천상의 대장부가 되지 않는가
作得人天大丈夫

내가 이처럼 입 아프게 재삼 당부하는 것은
吾所以如是勞口再三囑
전에 나그네가 되어 봤기에 몹시 불쌍히 여기는 것일세
曾爲浪子偏憐客

아아! 이제 그만 두자꾸나
嗚呼已矣夫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四顧無人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四顧無人
의발을 대체 누구에게 전하랴
衣鉢誰傳


게송을 붙이노라 頌曰

홀연 콧구멍 없다는 어떤 이의 말을 듣고
忽聞人語無鼻孔
삼천세계가 곧 나임을 깨달았도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이라 연암산 아랫길에서
六月鷰巖山下路
농부는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해설

동학사 강사로 있던 경허는 1879년 34세 때 콜레라로 사람이 죽어가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무상을 절감하고 발심한다. 동학사로 돌아와 용맹정진하던 중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된다.”고 하자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다.”고 대답했다는 말을 듣고 문득 견성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속가의 형인 태허(太虛)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누이와 함께 살고 있던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와 보임한다.

1881년에 보임을 마친 뒤 법맥이 단절되어 자신의 견성을 인가해 줄 스승이 없는 현실을 알고 이 오도가와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도가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할 것인가! 의발을 누가 전할 것인가!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라고 크게 탄식한 것이다. 이 오도가와 오도송은 당시 제방에 두루 알려져 경허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방거사(龐居士)는 견성을 “마음이 공하면 급제해 돌아간다.[心空及第歸]”라 표현했거니와 선(禪)은 심공(心空)의 도리를 깨닫는 것 밖에 특별한 일이 아니다. 경허는 음주 식육을 하는 까닭을 묻는 화엄사 강백(講伯) 진응(震應)의 물음에 자신은 성공(性空)을 보고 있어 걸림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성공(性空)은 심공(心空)과 같은 말이다. 오도가와 오도송은 성공의 경계를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오도송의 해석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야인(野人)이 누구냐는 것이다. 여기서 야인을 경허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보기 쉽지만 연암산 아래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농부가 일을 하면서 부르는 농가 소리가 그대로 해탈한 무사인(無事人)의 태평가란 말이다.

능소(能所)가 끊어진 성공(性空)의 경계를 드러내는 자리에서 ‘나는 일 없는 사람’이라 하면 ‘아견(我見)’에 떨어질 수 있다. 용화사에서 녹음한 전강(田岡)스님의 술회에서도 당시는 모내기하는 철이었고 태평가는 농군들의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라 부르는 농가 소리라 하였다. 위 오도가에서 “소와 말을 부리는 사람이 보현이요 장삼이사가 본래 비로자나불이다.”라고 한 구절이 바로 이러한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아가(我家)’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내 집’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 아가는 ‘나’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문에서 ‘가(家)’ 자는 뜻 없는 접미사로 곧잘 쓰인다. 예컨대 한산시(寒山詩)에 “나는 은거하기 좋아해 거처에 번잡한 속진 없어라[吾家好隱淪 居處絶囂塵].”라고 하였다. 한문에서는 자기를 자가(自家)라고도 한다.

오도송에서 경허의 경계는 온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나와 둘이 아닌 것이지, 우주를 내 집으로 삼고 들어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집이라 해석하면 나 말고 내가 머무는 집이 또 있게 된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송경허, "여사미거驪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daum.net)

 

송경허, "여사미거驪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경허(鏡虛, 1846~1912) 본관 여산 송씨, 이름은 동욱, 법호는 경허, 법명은 성우. 숱한 기행으로 극단적인 평가가 있지만 한국 조계종의 중흥을 이끈 장본인이라는 데는 이의 없음. 1846년 8월 24일 전

blog.daum.net



문외한이나
불교를 그나마 반짝이게 하는 것은
'십우도'(또는 심우도/목우도)의
返本還源 이후, 마침내 入廛垂手에 있다고 본다.
그 모본이 '경허선사'이고.

유학 또한 실사구시 아니면
실로 공허한 것일 뿐이니.
한편 동학에서는 '해월'을 그런 이유로
조금씩이나마 공부 중이다
근데, 기독교는 대체 어디에 써먹는 겨?

 


人牛俱忘으로는 갈 수 없어
소는 없어지는데
때때로 법열에 잠겨도
나는 지워지지 않아
그럴수록 지치고 쓰러져 
아이고 이젠 그냥 좀 냅둬

아이고 ㅠ0ㅠ


(막 9: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orz

 

(히 12:2-3)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었습니다.
대적자(바울은 이를 단연코 자신이라 하지)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온 맘 다 해

갈릴리 사람 예수님, 찬미!

 

김병종의 그림


그런데, 이 모든 건, 여튼,
우리네 사람살이에 '쓸데 있어야' 한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아이고
너무 몰아치지 말고
좀 달래며 가 ㅠ,ㅠ
"牛無鼻孔處" 있지 말고 


https://youtu.be/SIJREpibbO0

https://youtu.be/tyeDXVLRD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