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2/충남NCC 총회 세미나 강의안/신동리교회당
강의 제목 : “ 역사적 예수의 마을 목회 - 아나케이마이 마을 공동체 운동”
성서 본문 : (누가복음 4,1-42)
[1] 왜 ‘역사적 예수’인가?
(1) ‘또 다른 예수’가 필요한가?
① 경계선의 그리스도인들
교회와 세계 사이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아는가? 주일이나 잘 지키고 헌금이나 잘하면 되지, 웬 쓸데없는 관심인가? 그들이 신앙적 경험보다 신 부재(不在)의 경험을 더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 그들의 이중적 삶의 한계상황 곧 이중적 삶의 피로를 넘어 자아분열적 상황임을 얼마나 고려하는가? 갈등과 체념이 당연하니 현상유지나 시키주면 되는 것인가? ‘세상의 변혁/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남인가?
② 현재로 충분하지 않은가?
위로와 위안을 주는 예수?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주는 예수? 죄를 씻어주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예수? ‘기도 응답 5분 대기조’ 예수? 신 부재의 경험을 심화시킨다. J.P.IC(정의-평화-창조질서 보전)의 실천은 어쩌는가?
③ 한국교회의 고질병, 신행(信行) 불일치
‘구원 확인’ 쳇바퀴가 교회의 할 일인가? 소위 기도 체험이 신행 불일치의 심화 원인은 아닌가? ‘신적(神的)인 것의 경험’인가? ‘신성(神性)에의 참여’인가?1) ‘구원, 그 이후’ 곧 은혜 받은 그 다음의 삶은 필요 없는가? ‘현재적 구원’2)을 망실하다? 이정표와 모본은 없는가?
(2)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
① 첫 번째 이정표, 요한
“독생자”(νομογενης)3) - 요한 공동체의 신학. 영지주의를 극복하려는 ‘독생자 신학’이었는데, 지금 우리는 신 영지주의 함정에 빠져 버렸다. 요한은 다만 ‘육체(σαρξ)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한다.4)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훈(διδαχη)안에 줄곧 머물러 사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길이라5) 한다.
② 두 번째 이정표, 바울
“맏아들”(πρωτοτοκος)6) - 바울과 히브리서 공동체의 신학. 요한보다 최소 50년 이상 앞선 바울과 원시 공동체는 ‘독생자’를 몰랐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맏아들 예수’였다. 원시 공동체의 신앙 주제는 ‘본받음’7)이었다. 우리는 이룸교인가? 아니면 따름/본받음교인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συμμορφος; μιμητης/닮음).8)
[2] 갈릴리 예수 ‘찾기’
(1) 왜 ‘갈릴리 예수’인가?
① 전가의 보도, 믿음과 은혜
믿음만능주의와 은혜편리주의. ‘δια πιστ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πιστεως της εν Χριστω(ι) Ιησου’이다. 자력 구원의 위험? ‘바늘구멍 사진기’와 ‘큰 바위 얼굴’. 갈릴리 예수를 “바라봄”9)
② 교리적인 문제 해결
‘예수의 인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느님의 불완전한 자기계시’인가?10) ‘불완전한 성육신’인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신앙한다는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을 거부하는가? 그는 기도의 대상일뿐 신앙의 사표(師表)는 아닌가?11) “나를 따르라”(Ακολουθει μοι.)를 복음서의 제자들만을 향한 것으로 여겨야 할까?
③ 초거대 AI의 급습
ChatGPT의 돌풍? 기존 기술의 활용일 뿐 앞으로 더 한 것들이 온다. 누구나 원하는 맞춤형 설교와 상담을 제공 받는다. 이제 이론(Theoria)은 ‘개인 AI’의 도움을 받고, 목회적 신앙적 실천(Praxis)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기독론이다.
(2) 역사적 예수 ‘찾기’?
① ‘부정의 신학적 방법’
그 한 사람의 실체가 남을 때까지 모든 신화적 요소들을 제거하여, 그 속에서 ‘그’가 걸어나오게 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는 갈릴리 목수 소작농사꾼(peasent)이다. “그래도 그는 하느님의 아들인가?” 그의 실존적 고뇌, 삶의 목표, 관심사는 무엇이었나? 그는 무엇을 기뻐하고 노여워했나? 그가 좌절하고 또 희망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무엇에 투신했나? 어떤 일에 의분하고 또 어떤 일에 고무되었나? ‘갈릴리’에서 불과 2년 8개월 동안 그가 그토록 절실하고 치열하게 하고자 했던 일은 과연 무엇이었나? 하느님은 왜 하필 ‘이런 그’를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 하셨는가? 하느님의 실수나 모자람인가? 아니면 그것이 완전하신 하느님의 의도/의지/뜻인가? 이 갈릴리 농사꾼 예수를 통해서 드러내신 그의 의와 그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 나라 곧 그 ‘저 세상 나라’의 질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방식으로 작동하는가?
② 참고, 바울의 경우
바울의 목회 현장은 약탈과 번영의 제국주의였다. 극소수만을 위한 약탈장악흡혈의 피라미드 체제였다. 이런 ‘이 세상 질서’는 갈릴리 예수의 ‘저 세상 질서’로 대체된다. 그리고 ‘신의 아들, 세계의 구원자, 평화의 왕, 왕 중 왕, 은혜 베푸는 주님, 심판자, 신의 현현, 온 세계의 대속자’ 등 황제의 공식 칭호들을 저 변방 중의 변방 갈릴리의 한 소작농에게 모두 기꺼이 헌납 공포한다.
그리고 황제가 ‘은혜’ 베풀어 군단을 파견, 또 다시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탈한 자원으로 로마시의 번영과 향락은 영속할 것이라는 소식이 ‘그들의 복음’(ευαγγελιον)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제국을 근원적으로 무효화시키는 저 갈릴리 농사꾼의 ‘대속’을 통해 그의 ‘저 세상 나라’로 대체된다는 것을 복음으로 공포한다. 또한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인들의 ‘저 세상 민회(民會, εκκλησια)운동’으로 시작한다. 이 ‘지상 최고의 역설’12)을 복음으로 전하느라 그는 줄기차게 에클레시아들을 개척한다.
(3) 역사적 예수의 모습
① 그 갈릴리 사람=갈릴리 소작농
‘갈릴리 목수’는 2~3차 소작농(peasant)과 농노 사이의 빈민 계층이었다. 갈릴리 인구의 절대 대다수였던 갈릴리 농민들은 모든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면서, 헤롯가와 결탁하여 농토 대부분을 차지한 대제사장들의 소작농으로 그들을 위해 올리브와 포도 농사를 지었고 또 헤롯 안티파스와 그의 도시들을 위해 지독한 세금까지 짊어지느라, 끝도 없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그 숙명을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해야 했다. ‘예루살렘의 높은 것들과 그 가증스러운 가식들’에 대하여 반항심이 당연했던 ‘갈릴리 농민들의 저항 본능’은 구약성서의 민중 ‘히브리 하비루’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목수의 아들’ ‘목수 요셉의 아들’ 또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 ישוע’, 야고보와 요세와 시몬과 유다와 누이들의 형제, 나사렛 친지들에게는 기대와 비난을 받던 무모한 농사꾼 예언자, 집을 나선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 갈릴리 농민들이 매우 격렬히 환호하며 따랐던 농사꾼 출신의 랍비. 당시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은 ‘갈릴리 시골에서 소작농사나 짓는 더럽고 불온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② 당시 갈릴리의 정황
로마제국의 치밀하고 잔혹한 피라미드 지배구조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피라미드의 최하부 기층민인 갈릴리 농민들이 짊어졌던 경제 정치 사회 종교적 억압과 착취는 오늘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구나 유대 갈릴리 지역은 최상층 로마 권력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변방 중 하나였다. 갈릴리는 온갖 종류의 메시야 저항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는 본거지였고, 농민들의 저항과 무력 봉기는 지독하게 계속되었다. 황제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레기온을 매우 ‘적당한’ 곳 거라사에 주둔시켰다.
직간접적인 여러 기록물들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연구들로 알 수 있는 당시 갈릴리는 일촉즉발의 민란 상황이 일상이었다. 모두가 치열하게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의 일제 침략기에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복음서가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오랜 일상이었던 것이고, 당시 ‘유대 전쟁’ 전후라는 ‘묵시록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혈족 후견인과 중개자’라는 오랜 관습은 ‘뇌물 후견자와 브로커’라는 제국주의적 피라미드 구조악으로 대체되었다. 차별과 배제의 주인공인 갈릴리 농민들의 자학적 ‘천벌 받은 자 만들기’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3] 갈릴리 예수의 마을목회
(1) 그의 목회 활동
① 갈릴리 ‘떠돌이’ 예언자 (눅 4,1-44)
- 한 갈릴리 농민 예언자의 등장 : (4,1-15)
- 그의 출사표, ‘브로커 없는 세상’ : (4,16-30)
- 그의 ‘저 세상’ 후견권 : (4,31-37)
- 그의 ‘저 세상’ 운동 방식 : (4,38-42)
- 실천적 견유자(cynicist) : (4,43-44)
② 그의 ‘마을 목회’
이와 같은 갈릴리 예수의 실존적 상황과 목회 현장인 갈릴리의 형편과 그곳 사람들을 덮어두고 예수님을 말하는 건, 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만드는 일이다. 그는 늘 걷는다. 홀로 광야에 머문다. 그리고 언제나 마을 모임(συναγωγη는 건물이 아니다)을 찾아가 참여한다. 그리고 이미 도래하여 내재하는 ‘저 세상 질서’를 받아들이게 긴박한 혁신(μετανοηω)을 촉구한다. 그들은 피할 길이 없다. 가르치고, 그들의 삶과 마을을 치유하고, 열린 공동식사를 통해 계약 공동체를 복구 재편입시킨다. “하느님 나라를 침노하라! 우리가 주인이다!” 갈릴리 농민들이 상당히 고무되어 이 사람을 호응하며 한 무리를 이룬다. 이로써 헤롯 안티파스와 대제사장들/사두개파에게 심각한 위기가 촉발 된다.
(2) 그의 대적자들
① 한 갈릴리 농사꾼의 위협?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총동원’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한 갈릴리 빈농의 예언 운동이 헤롯家와 대제사장들의 강고한 권력체제를 위협했다고? 그들에게는 사실 하찮은 갈릴리 농사꾼이었을 뿐인데? 갈릴리에서 그 정도의 예언 운동은 흔한 일이었고, 그 결말은 모두 자연 소멸 또는 농민 저항군으로 봉기한들 시리아 총독의 레기온이 본보기로 다시 진압해 버릴 텐데? 도대체 이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가장 근원적인, 너무나 근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세계를 가장 아래로부터 아예 무효화시키는/전복시키는 ‘저 세상’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갈릴리 농사꾼의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었는가?
② 그의 하느님 나라
그의 설교와 주기도문에서 보이는 ‘그의 하느님 나라’는 저들의 땅을 전복하는 ‘저 세상의 질서 곧 통치’이다. 그것은 언제나 절실한 노동의 현장인 땅에 심기고 넣어지고 이미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싹을 내고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온 재산을 탕진시키고 주변을 해지게 하고 또 아예 터뜨려 버린다. 더구나 그 나라의 작동 방식은 ‘밭에 심은’ 겨자씨(!)로 설명된다. 겨자씨를 ‘심는다’는 것은 갈릴리 농촌에서 가장 몹쓸 짓이었다. 겨자나무의 매우 질긴 생명력은 한 번 번지면 쉽게 제거할 수 없어서 밭 전체를 모두 망치고 마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문에서 하늘은 ‘우리 곧 갈릴리 하찮은 농촌 것들’의 아버지 곧 최고의 ‘후견인’이다. 그 이름의 명예와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은 놀랍게도 매일 먹는 밥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빚(‘αμαρτια가 아니라, οπειλημα) 탕감 그러니까 <현세적인, 너무나 현세적인> 삶의 방식에서 온다. 그리고 그에 반(反)하는 것들의 유혹을 이기고 그 악에서 구출되어 그것을 전복시키는 실천들이 곧 아버지의 나라요 권능이요 영광이다.
두 개의 수도 찌포리스와 티베리야스를 건설한 여우, 헤롯 안티파스와 성전 권력을 독점한 왕 같은 대제사장들이 겨우 이 갈릴리 농사꾼 하나를 죽이려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운동이 저들의 근본을 뒤흔드는 위협이었음을 반증한다. 그 근원을 신속히 제거하지 못하면,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처럼 마침내 저들을 대대로 호가호위하게 해 주는 모든 농토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나아가 ‘광야의 새떼’같은 갈릴리 농촌민중을 모이게 할 것이다.
(3) 그의 ‘제3의 길’
① 유대-갈릴리 메시야 운동들
첫째는 사두개파, 바리새파였다. 둘째는 셀롯당, 시카리, 농민 의적단이었다. 셋째는 가나안 정화 재현운동, 광야 정화 재현운동, 초월적 종말 고대 에쎄네파였다. 넷째는 헤롯당과 요세푸스와 같은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갈릴리 예수의 길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길이었다. <저 세상적인, 너무나 저 세상적인!> 그래서 이 세상을 완전 전복하는 예수님의 제 3의 길은?
② ανακειμαι13) '아나케이마이 마을공동체 운동'
겨자나무처럼 확산되어 약탈 자들의 세계를 그 근원으로부터 전복 대체시키는 ‘마을공동체 회복운동’이었다. ‘함께 누워’(ανακειμαι) 밥을 먹는, 그 어떤 경계심도 적대심도 정치적 복선도 가식도 사심도 없는, 후견자가 ‘저 세상 아버지’여서 또 다른 어떤 브로커도 필요없는/무효가 되는, 차별과 배제로 단죄하던 ‘소자’들을 귀빈으로 환대하는, 열린 밥상 마을공동체! 저 갈릴리 사람의 길! 세월호 홀로코스트, 하늘에 대한 낙담 곧 신 부재의 경험을 피할 수 없이 사는 우리와 또한 우리가 차별 배제하는 이들이 함께 이루는 ‘ανακειμαι 세상, 마을 밥상공동체’! 서로 치유하며 일어서는, ‘서로 양생(養生)’하는 일! 우리의 출사표!14)
[4]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끝.
<從僕>
#아나케이마이
#아나케이마이 마을 공동체
#아나케이마이 공동체 운동
==== 각주
1)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2) (히 4,1)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느니라.” (빌 2,12)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히 6,4-6)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되게 함이라.”
3) ‘독생자’(νομογενης)가 나오는 모든 구절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4) (요 1,14) “말씀이 육신(σαρξ)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2,18-25)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생(명)이니라.” (요일 4,1-6)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σαρξ)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이 1.7-8)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σαρξ)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히 5,7-10) “그는 육체(σαρξ)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그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느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5) (요이 1,9-11)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6) ‘맏아들/맏이’(πρωτοτοκος)가 나오는 모든 구절 :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히 1,5-6)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7)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살후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8) 본 받음(συμμορφος)은,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외에 나머지는, ‘모방/닮음’(μιμητης)
9)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αφοραω).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0)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1) (고전 1,18-29)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2) (롬 15,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히 3,1-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집안)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 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자세를 복음서에서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ανακειμαι 외에 ανακλινω, αναπιπτω, κατακειμαι, κατακλινω 등으로 그냥 ‘기대 누워’ 또는 ‘기대 앉아’라고 표현한다. 잔치에 온 ‘손님’(마 22,10-11)을 원문에서는 ‘음식을 먹으려고 기대 누워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복음서는 반복해서 이 독특한 자세를 중요하게 다루어 설명하는데, 이것은 배제, 혐오, 차별, 적의, 경계심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동식사’를 가리킨다.
14) (눅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 이 강의안은, 지난 마을목회자학교에서 소개한 내용의 후반부만, 이번 충남NCC총회 세미나에서 이야기해 보라는 요청이 있어서 다시 정리하였다. 아이고 이번에는 25분 내에~!?
** 하여튼, 덕분에,,, 정말이지 무지 고민했었다. 거의 평생을 걸쳐 찾아온 걸, 더구나 기존의 기독교 목사들에게? 도대체 어떤 수준으로 해야 할지, 예를 들면 성서 비평을 어느 정도까지 얘기할지 등등이 가늠도 안 되었으니 말이다.아이고~ 만일 내가 신대원에서 목사 후보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면 '성서 비평학을 바탕으로 진짜 은혜로운 설교 작성하기'와 같은 강의를 개설하겠다. 클럭!
**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마을목회자학교 강의여서, 예수님의 마을목회를 연결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그냥 갈릴리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 따라다녀 보면, <역사적 예수의 목회활동이 바로 소위 마을목회였다>는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내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특히,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과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의 연구들을 보라.
** 노파심,, '크로싼' 어쩌구 하면서 크로산과 역사적 예수연구의 연구서들 한 번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이 주접을 떠는 쓰레기들에 현혹되는 바보는 없겠지, 만약 충분히 독서하고 연구한 다음 제기하는 의문과 반론은 대,환,영!
** 그리고 정말이지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지난 강의 내용만큼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때가 온 건가?" 꽤나 고무적이랄 수 있는 반응들을 볼 수 있었다.
** 우리 갈릴리 예수님(생각만해도 두근거리며 설레는!)을 이제 좀더 맘껏 이야기해 줘야 할 정도로 이제는 좀 아는 건가? 지금까지의 한국 개신교가 얼마나 비성서, 비교리, 비신조적이었는지? 아니 기존의 '기도교'로는 얼마만큼 스스로 비참해지는지? 아니, 아마도 이제는 그야말로 그런 걸로 해 먹을 수 있는 '고객'은 없다는 거? 그런 '기도응답이적추구점쟁이무당용기삼환번영숭배 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기독교 아닌 무속신흥종교였다는 것을? 하, 도대체가 인간에 대한 기본 사유도 없는 종교라니?! 아이고!
** 나의 이런 고백들 그리고 공부하고 있는 결과들은 모두 나의 큰 은사이신, '홍성현 원장님', '홍정수 총장님'의 가르침과 '정경호 교수님'의 지도, 그리고 '한국기독교연구소' 덕분이며, 부족한 부분은 전적으로 나의 모자란 부분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그 무엇보다도 이처럼 내 구원의 길을 찾도록 지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각골난망이나 행하지는 못하며 살고 있으니, 계속 더 공부하고 더 정리해 가면서 조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이제는, 사양치 말아야겠다는 마음 뿐이다...
** 혹여 함께 씨름하며, 치열히 공부하며, 길 찾기를 해 볼 길벗들이 있다면, jooroogol골뱅이naver쩜com ㅡ,ㅡa
이와 함께 읽어야 하는, 이곳 목회 현장을 좀더 상세히 기록한 게시물
"나의 역사적 예수와 마을 목회 현장 보고" - 제 6기 마을목회자학교 강의안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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