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러시아 정부의 선의만 믿고 헤이그 밀사를 파견했으나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다>
/ 전집현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막되었다.
이 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여 세계 열강 국에 한국 독립과 주권 회복을 호소하다 강제 하야 당했다고 알려졌다.
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정체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또는 헤이그 회담(Hague Conventions)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
이 회의는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강대국 간의 군비제한을 통한 세력균형과 식민지 분쟁 해소를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다루거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성토할 수 있는 회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일본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대한제국의 밀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2. 밀사 파견 배경 : 대한제국 병합 관련 러일간 비밀협정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러시아가 일본에 타격을 주려고 밀사 파견을 유도
러일전쟁 결과 포츠머스 조약에 따르면 일본이 비록 대한제국에서 우월한 입장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데 그쳐,
대한제국을 실제로 합방하는 데 러일간의 외교적 협상이 필요했다.
이와 관련 러일 양국은 1907년 3월부터 비밀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병합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는 고종과 대한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한 방 먹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비밀작전을 추진했다.
고종을 설득하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밀사를 파견시키고자 했다.
이들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저지르는 내정간섭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한다는 계획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국제회의에서 밝힐 수 있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헤이그 평화회의 넬리도프(A. Nelidov)
에게 "대한제국 대표단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해 모든 협조를 하라"는 훈령을 보냈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에 불만을 가졌던 고종은 러시아 정부의 선의만 믿고 밀사를 파견했다.
당시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 있던 고종은 이미 궁정 비용조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2. 밀사 파견 자금은?
밀사자금은 한성전기 사장인 콜브란이 15만엔을 대 준건데 이것도 영수증을 주고 받은 걸로 보아 대가성이었다
그런데 밀사로 파견된 인사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교민들의 후원금인 일만팔천원을 받는다.
콜브란의 15만엔이 고종으로부터 아예 전달이 안됐거나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밀사 파견 인사들은 밀사 자금 15만엔은 고종에게 받지도 못하고 블라디 보스톡 교민들 후원금으로 간신히 헤이그에 도착한다
3. 회의장 입장이 거부 : 러일간 비밀협상이 극적 합의되자 러시아 입장에서 이용가치 상실
밀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날은 회담(1907.6.15~10.18)이 개막된 지 열흘 후인 6월 25일이었다
그런데 교착상태에 빠졌던 러일 비밀협상은
대한제국 특사의 헤이그 도착 전날인 6월 24일, 극적으로 합의되었다.
그 즉시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대표위원이면서 평화회의 의장이었던 넬리도프(A. Nelidov)에게 "한국 특사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라"라는 새 훈령을 보냈다.
그에 따라 넬리도프는 대한제국 밀사의 회의 참석 요청을 거부했다.
일본은 이들이 사칭한 특사라 주장했고 회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밑 작업으로 방해했다.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도 회의 참석 협조를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4. 이위종 호소문 발표 : 일본도 고종도 비판
상황이 이렇게 되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8일 저녁 각국 신문 기자단이 주최한 국제 협회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당시 회의장 주변에는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시민 운동가들이 몰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이 연설에서 이위종은 일본 뿐 아니라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대한제국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가혹한 행정 등으로 인해 인민이 고생하고 있던터라 기대를 가지고 일본을 맞이했다
일본이 이를 바로잡아줄 줄 알았는데 신의를 배반하고
1905년 11월 외교권을 가져가는 을사조약을 무력에 의한 협박으로 체결했다"며 호소했다.
그의 연설에 많은 기자가 호응했지만, 활동은 거기서 끝났다.
5. 역사적 날조 : 이준 열사가 분사
7월 14일,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이준은 투숙하던 헤이그의 호텔에서 사망했다.
이것을 보고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위암문고에서 "할복 자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내장을 꺼내 던졌다더라."고 기술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는 이준 밀사가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자
"이준 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사실 확인 결과 양기탁, 신채호, 베델이 협의하여 이준의 죽음을 민족적 긍지로 삼아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꾸며내 보도했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준은 뺨에 난 종기 제거 수술 도중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의 정보 보고서에는 이준이 헤이그에서 단독병(丹毒病, 급성 접촉성 전염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 고종은 퇴위되고 내정까지 장악당하다
비밀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일본은 고종의 밀사 파견을 역이용하고 나섰다.
일본은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비밀각서에 의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여 내정권 장악, 사법권 및 경찰권을 장악했다.
제3차 한일협약이 조인된 지 6일 후인 7월 30일, 러일 양국 대표는 제1차 러일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현재 관계를 인정하고, 이 관계가 계속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이때 비로소 일본은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도 무위로 끝나고, 의병 봉기도 실패하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로의 정치 망명"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준수와 극동 질서를 강조하면서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진실은?, 매일신문(22.11.21) 참조
'함께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狂훈이, 재미 들렸네~👏 (0) | 2023.04.12 |
---|---|
주 4일 근로자, 3일 주말 활용하기,, 사람으로 살자! (0) | 2023.04.09 |
한국교회여, 이세벨을 용납하지 말라? (0) | 2023.02.15 |
온라인 시대, 작은 교회들의 돌파구!! 역시 답은 이미 주어진 거!!! (0) | 2023.02.13 |
[공부하세] 챗GPT도 혁신은 아니다 (0) | 2023.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