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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한 젊은 가수의 자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by 농민만세 2017. 12. 21.

 

 

지나치게 복잡한

신경세포들의 교란,

아이들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

이 지나친 시련!

 

 

 

 

구조칼럼 › 샤이니 종현의 자살 

김동렬 | 2017.12.19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생계형자살도 있고 모방자살도 있다. 자살로 내몰리는 사회적 타살도 있다. 죽음을 예찬하는 낭만주의도 있다. 더럽혀지는 것보다 죽는게 낫다든가 혹은 자신이 숭배하는 사람을 위해 따라 죽는 경우다. 미학적 자살이다. 봉건시대에 많았다. 구경거리라고는 사형집행장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TV도 없고 월드컵도 없었던 때 죽음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죽음은 때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했다. 열녀라는 식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워낙 삶이 팍팍하던 시대라 강제하지 않아도 죽음은 차고 넘쳤다. 홍루몽의 많은 등장인물처럼 이래저래 다 죽어 나가는 거다.

 

    한 젊은 가수의 죽음은 각별하다. 우울증이라고는 하는데. 정신과의사는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거다. 그렇다. 정신과의사가 문제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TV에 나와서 아는 척하지만 알긴 개뿔 무당보다 나을게 없다. 인간이 배고프고 추우면 죽지도 못한다. 따뜻하면 오히려 죽을 수 있다.

 

    문제가 있으면 일단 환경을 바꿔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규칙이 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 상황에서는 저렇게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 말이다. 그 규칙을 다 바꿔야 한다. 예컨대 민망할 때는 이렇게 배시시 웃으면서 분위기를 추슬러야 한다든가 이런 식의 눈치코치 규칙 말이다.

 

    그 규칙을 다 깨부수었을 때 삶은 리셋되면서 적어도 한 참은 더 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내기다. 그러다가 다시 우울해질지라도. 세상과의 관계를 전부 새로 설정해야 한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고 어머니는 사랑의 대상이고 국가는 충성의 대상이고 이런 식의 규칙들 말이다.

 

    아버지는 꼰대로 바꾸고, 어머니는 미친년으로 바꾸고, 친구는 씨바로 바꾸고, 국가는 조까로 바꿔준다. 환경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사고를 쳐야 한다. 일의 흐름에 올라타서 정신없이 바쁘면 어느 틈에 하루가 살아져 있다.

 

    최인호의 소설 고래사냥의 주인공 병태도 미란에게 딱지 맞고 절망에 빠졌다가 왕초를 만나서 사회의 먹어준다는 규칙을 산산이 깨부수고 춘자를 만나 하루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았는데 말이다. 인간을 잡아가두고 질식하게 하는 그 규칙깨기를 왜 정신과의사가 아닌 왕초에게 알아봐야 하나?

 

   http://v.media.daum.net/v/20171219180003084

 

    “스트레스가 발생했을 때 주위에 사회적 지지를 기대하고, 이때 지각된 긍정적 지지는 스트레스에 대한 부적응을 감소시킨다”는 논문도 있다. 친구와 부모의 지지가 중요하다. 역시 환경이다. 환경을 바꿔야 한다. 보다 긴밀해져야 한다. 느슨해질 때 서로는 어색해지고 불안해지고 우울해진다.

 

    가족을 바꾸고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 된다. 평판과 체면과 위신과 에티켓과 매너와 예절이 인간을 잡아가두기 때문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그러한 사슬이 깨뜨려지는 거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환경을 설계해 가는 초인이 될 수 있다. 붓다가 되어보기다.

 

    연예인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니 햇볕을 못 봐서 우울증에 걸린다는 설도 있다. 일리 있다. 북유럽의 겨울에 특히 자살이 많은 게 그러하다. 밤이 계속되면 죽음이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환경을 바꿔야 한다. 연예인 생활을 때려치우는 것도 방법이 된다. 자연인들은 환경을 바꿔 살더라.

 

    유서에 단서가 있다. “그래도 살으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수백 번 물어봐도 날위해서는 아니다. 널 위해서다. 날 위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 나의 존재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 나는 평판, 체면, 위신, 신분, 매너로 깎인 가짜 나다. 나를 규정하는 것들의 백퍼센트는 사실 나가 아닌 것들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호르몬이다. 우울증은 호르몬 때문이다. 호르몬은 상당부분 뇌가 결정한다. 나와 너의 구분이 중요하다. 거기서 인간은 죽음을 느낀다. 너와 나의 사이가 단절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간은 살며 무수히 죽음을 경험한다. 상실했을 때, 이별했을 때 맥락의 단절이 죽음이다.

 

    죽는다는 것은 진행되던 일이 끊긴 것이다.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가 가는데도 상대가 수화기를 들지 않는다. 내 통화가 거절되고 있다. 그런 때 인간은 죽음을 경험한다. 맥락이 연결되어야 한다. 죽음을 부르는 것은 우울이고, 우울을 부르는 스트레스이고 스트레스의 원인은 맥락의 단절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가짜 맥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맥락을 만드는 역할이 철학인데 철학자가 현대문명을 쫓아가지 못한다. 반대로 산업이 맥락을 만드는 시대에 철학의 맥락이 상대적으로 가치절하된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일의 다음 단계로 부단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의 링크를 조달하려면 애초에 사건의 판을 크게 벌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신에게까지 닿게 된다. 신의 미션이 없으면 지금 내가 여기서 왜 이러는지 납득이 안 되는 거다. 이런건 그냥 판단으로 되는게 아니고 연습을 해서 체화시켜야 한다. 본능의 수준까지 도달한다면 자연스러워진다.

 

    삶이 자연스러워야 사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우면 맥락이 끊기고 답답해지고 우울해진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 중에 나를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단연코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 잠시도 살 수 없다. 너와 나가 갈리는 지점에서 인간은 죽는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만 죽지 않는다.

 

    맥락이 살면 삶은 계속된다. 너와 나의 경계를 끊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왕초를 찾아가지 않고 춘자를 만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왕초의 얼굴에 네 있고 춘자의 얼굴에 나 있다. 인간의 존재는 얼마간 타인에게 스며들어 있다. 타인의 모습에 스며든 나를 읽어낼 때 인간은 하루를 더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