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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02

by 농자천하/ 2019. 8. 31.

 

한마음 칼럼 : “나는 왜 농목으로 사나? 02”

사실 나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 인근 교회의 동료 목사에게서 이런 교회가 있다고 소개를 받았을 때, 아이들을 일찍 재워두고는 아내와 자동차를 몰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내려왔었다. 교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아서 아마 오래 있기는 어려운 교회일 거라는 동료의 말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농촌교회이기에 그러나 싶었다. 당시 서해안고속도로는 서해대교를 지나 당진 직전의 송악까지만 개통되어 있었다. 고속도로 송악IC에서 내려와 당진에서 서산을 지나 태안, 그리고 남면까지 오는 77번 도로는 이게 국도인가 할 만큼 굽이치는 2차선의 좁은 도로였다. 당시 남면 사무소의 작은 주차장 바로 옆의 게이트볼 연습장에는 붉은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아내를 차에 둔 채 주차해 놓고 교회당 마당까지 나 있는 좁은 진입로를 걸어가는데 벌써 마음이 아득했다. 승합차 바퀴 자국 단 두 줄만 희미한 달빛에 하얗게 드러나 있고, 교회당 옆 너른 마당까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농촌교회 예배당이야 다 작고 낡고 또 사택도 말할 수 없이 허름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낡고 허름해도 교인들의 애정과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교회당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그 진입로를 돌아 나오는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서글픔과 노여움 같은 것이 가슴에 차올랐다. 교회당이 이렇게 방치될 수 있다니! 자동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에게 말했다. “우린 이제 클랐다. 여기서 죽어 나가게 될 거 같아.”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교회도 아니고, 장로 권사 집사들이 있는 교회가 무작정 버려둔 창고 같다니. 교회당이나 사택이 새집이 아니더라도 교인들이 애정을 담아 돌보고 가꾸면 바로 표시가 나게 마련이다.

20대 후반에 나는 둘째 아이가 만삭이던 아내와 함께 청남대 부근의 농촌교회를 목회하는 신학생 전도사였다. 예배당은 폐업한 마을 정미소 바로 옆의 작은 창고 바닥에 얇은 비닐장판 한 장을 깔아놓은 그런 곳이었다. 열댓 평 정도의 그 예배당 뒤에 딱 두 평쯤 되는 작은 공간을 잇대어 사택으로 사용했고, 식수는 바로 앞에 있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설치한 양수기에서 나오는 물을 이용했는데 농약 냄새가 풀풀 났었다.

마을 아이들이 연일 바글거렸는데 어른들은 할머니 두 분과 농사짓는 청년 하나 그리고 집안사람들의 핍박을 혼자 다 받으시며 나오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분들은 지날 때마다 연일 쓸고 닦고 하여 비록 아주 작고 허름한 예배당이었지만 주변은 늘 정갈했었다. 도대체 자신들이 매 주일 예배드리는 교회당에 그처럼 애정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이삿짐을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이웃분들한테 인사하느라 마을을 한 바퀴씩 돌아보니, 다들 약속한 듯 외면하였고 노골적으로 인사를 피하는 기묘한 상황은 결코 농촌 사람들의 단순한 낯가림만은 아니었다. 



 /계속(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