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찾기 제 3 운동 속의 '부활'
/ 홍정수
[목차]
들어가는 말
1. 예수 찾기 운동 1, 2와 3의 방법론적 특징들
2. 예수 찾기 운동 속의 부활
2-1. 스트라우스(D. F. Strauss)의 부활 이해
2-2. 보른캄(G. Bornkamm)의 부활 이해
2-3. 크로산(J. D. Crossan)의 부활 이해
3. 보수파의 반박
3-1. "철학적 편견"
3-2. "부활 사건 없이는 부활 신앙의 발생이 불가능하다"
4. 생각할 문제
들어가는 말
예나 오늘이나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리고 예나 오늘이나 예수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또한 위험한 일이다. 특히 그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하여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며, 나아가 그렇다고 하여 그 이야기를 덮어두는 것은 지성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온 96년도의 예수 부활 계절에는 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진지한 성서학자들이 예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평가 없이) 소개하려 한다.
오늘을 가리켜 성서학자들은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라고들 한다. 얼마 전 나는 LA 근교에 있는 클레어몬트신학교 책방과 풀러신학교 책방, 그리고 북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근교, 버클리에 있는 GTU(연합신학대학원) 책방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 곳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조직신학 코너가 아니라 성서신학 코너였다. 조직신학 코너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연구 서적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에 성서신학 코너에서는 새로운 연구 서적들이 어딜 가나 가득가득 꽂혀 있었다. 특히 80년대 이후에 쏟아져 나온 예수에 대한 연구 서적들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신학교 책방들의 책꽂이 하나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로써 나는 과연 이 시대가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에 틀림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학자들은 80년 이후의 예수 연구를 영국의 성서학자 라이트(Tom Wright) 이래로 [예수 찾기 '제 3 운동']이라고 이름한다(Stephen Niel and Tom Wright, The Interpretation of the New Testament, 1861-1986,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379. 다음에서 인용, Hershel Shanks ed., The Search for Jesus, p.28). 이것은 오늘날의 예수 르네상스가 예수 찾는 방식이 과거 200 년 동안 기독교 신학자들이 벌여 온 예수 찾기 운동과 매우 다른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찾기 운동 1과 2에 대한 사적 배경은 {세계의 신학} 24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면 지난 200년 동안 진짜 예수 찾기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그 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검토해 보자. 그러나 이 주제를 역사적으로 자세히 검토할 수도 없거니와(지면관계상) 그런 일은 큰 의미도 없기 때문에(우리의 예수는 결국 우리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만을 다룬다.
1. 예수 찾기 운동 1과 2, 그리고 제 3 운동의 특징들은 각각 무엇인가?
2. 제 1, 제 2 운동의 주역들이 말하는 예수 부활과 제 3 운동의 주역들이 말하는 예수 부활은 실제로 어떻게 다른가?
3. 예수 찾기 제 3 운동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동은 무엇인가?
1. 예수 찾기 운동 1, 2와 3의 방법론적 특징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역사-비평 의식이 독일의 기독교 신학계에 도입되자 기독교인들의 사고 속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진짜 예수"(real Jesus) 찾기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진짜 예수"라는 말은 교회의 전통, 교의 혹은 신화에서 벗어난 예수, 역사가 입증할 수 있는 예수, 신앙인의 눈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보았던 예수를 말한다.
이 운동의 구체적 시작은 이렇다. 1774년, 독일의 극작가요 볼펜뷔텔(Wolfenb ttel) 도서관 사사였던 레싱에 의하여 사후에, 그것도 익명으로 발행된 라이마루스(Samuel Reimarus) 단편집이 있었다. 이 단편 모음집이 학자의 사후에 그것도 익명으로 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기독교 세계의 공포 분위기를 대변해 준다. 이런 공포 분위기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왔지만,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1697년, 스코틀랜드의 18세 소년이 모세 오경은 모세가 아니라 에스라가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져야 했던 시절이다.
이 연구에서 라이마루스가 일관되게 관심을 둔 것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과 기적)을 운운하는 신구약 성서의 이야기들은 지도자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특정 이유에서 꾸며낸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공인되어 오던 성서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관계도 후대의 조작이며, 기독교의 부활도 예수의 십자가라고 하는 비극적 사건을 시정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꾸며낸 조작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시작된 진짜 예수 찾기 운동은 1906년, 독일이 낳은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쳐의 신학 작품, {역사적 예수 찾기: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에 이르기까
지}(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로서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슈바이쳐가 예수 찾기를 그만 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세기 예수 찾기는 중대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잘못 그렸다는 것이다. 곧 예수의 사고와 언행에 일관되게 작용한 것은 예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묵시적 종말론"이었는데, 예수전을 작성하는 모든 학자들이 이 사실을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자신의 (당시 일부 유대인들과 공유하고 있던) 종말론은 자기 당대에 이 세상의 종말이 대파국과 더불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한, 결국은 잘못된 믿음이었다. 이것을 발표한 후, 그는 잘못된 종말론을 살았던 예수를 따라 "생명 경외"의 윤리를 실천하러 밀림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즉 예수를 더 이상 찾을 이유도 필요도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나고 만 예수 찾기 운동 1은 성서 속에서, 특히 공관복음서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한 예수상"을 만들려 하였다. 우리는 이하에서 이 운동의 대표자인 스트라우스가 실제로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그 후, 곧 슈바이쳐의 작품이 나온 이래 약 50 년 간은 예수 찾기 운동의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긴 침묵 기간 동안에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정당화해 준 기반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독일의 성서학자 불트만이 이 침묵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인간은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공로)이 아니라 값없이 내리는 신의 은총을 수락하는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게 "개신교의 원리"라는 사실을 들어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을 안심시켰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 역사적으로 예수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없으며(역사적 예수 찾기의 불가능성), 자료가 있다고 할지라도 (2) 신학적으로 보면, 개신교 원리에 의하여 역사적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구원에 불필요한 것(불필요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3년, 불트만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예상했던(?), 그러나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곧 불트만의 한 제자 케제만(Ernst K semann)이 "역사적 예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선생님의 회의주의를 깨뜨리고 나섰다. 즉 복음서들이 "신앙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역사적 예수 찾기를 중지해야 할 충분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소위 "케리그마"(초기 교회의 설교) 속에서도 '역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새롭고도 당연한 주장이 나왔다. 그 후 약 20 년간 예수 찾기 운동 2가 진행되었다. 판넨버그, 몰트만,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의 작업이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이들은 '신앙'의 문서인 복음서 가운데서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일은 역사적 예수 찾기 운동 2 속의 "역사적"이라는 말은 예수 찾기 운동 1이 말하던 "역사적"이라는 말과 다르다고 하는 점이다. 예수 찾기 1이 말하는 "역사"가 실증사(제 3 자의 눈으로 본 사건/Historie)를 가리킨다면, 예수 찾기 2가 말하는 "역사"란 실존사(당사자가 경험한 사건/Geschichte)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반화가 이 시기의 모든 예수 연구들에 한결 같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적어도 대표적인 연구가들의 이해라는 점은 틀림없다. 이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이들은 1959년에 나온 로빈슨(James M. Robinson)의 저작, {역사적 예수 찾기 새 운동}과 우리가 이하에서 검토할 이 시기의 대표작, 보른캄(G nther Bornkamm)의 {나사렛 예수}(1956)를 보라. 이 시기의 관심이 실존사적 예수 찾기였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그 연구 초점이 "예수의 가르침(과 언행)이 오늘의 현실에 주는 의미"에 있었다는 것이다(Ben Witherington III, The Jesus Quest: The Third Search for the Jew of Nazareth, InterVersity Press, 1995, p.11).
그러던 중 1985년, 클레어몬트의 성서학자였던 펑크(Robert W. Funk)와 시카고의 드폴대학 성서학자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중심이 되어, 소위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라는 방대한 학술 프로젝트가 1993년까지 수행되었다. 물론 여기에 참여한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북미 대륙의 진보파 성서학자들이다. 이들이 1980년대의 미국계 성서학자들을 모두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찍이 이렇게 거대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가 기독교 역사 속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공신력은 인정받아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 세미나]를 통하여 "예수가 진짜로 한 말들"을 정밀하게 가려내는 작업을 한 후, 그것을 {5복음서}(도마복음서 포함)라는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5복음서}는 빨강, 분홍, 회색, 그리고 검정의 4 색깔로 확실한 예수의 말, 했음직한 예수의 말, 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예수의 말, 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예수의 말로 구분하였다. 이 책이 발간된 주요 목표의 하나는 오늘날의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진지한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도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적중하여,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오늘날의 진보적인 성서학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게 되었고, 그 결과 보수파들의 홍수 같은 비판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하에서 이 [예수 세미나]의 한 대표적인 학자이며, 최근 미국의 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Historical Jesus Section of the Society of the Biblical Literature) 위원직을 역임한 바 있는 크로산의 생각을 살펴 볼 것이다.
역사적 예수 찾기 제 3 운동은, 로빈슨이 1959년, 곧 그가 아직 실존주의에 심취해 있을 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당시 역사적 예수 "새 연구"는 새로운 '자료'나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바로 그 자신을 포함한 많은 성서학자들이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방법으로 역사적 예수 찾기를 시행하고 있다.
새로운 자료란 1940년대에 발굴된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 문서, 그리고 그 후에 끊임없이 이어져 온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이란, 새로운 자료들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예수의 사회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맥락(context)에 대한 큰 비중의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과거 200 년 동안 우리가 3(혹은 4)복음서 속에 있는 예수를 찾았다면, 이제는 4복음서와 도마복음서, Q 자료(혹은 복음서)를 주요 대본으로 하면서, 예수 당시와 그 전후의 희랍-로마 사회의 포괄적인 연구와, 다른 한편, 팔레스타인, 특히 갈릴리의 유대교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서 예수라는 인물의 실재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고 애쓰고 있다(그러나 나 자신은 아직도 이런 연구의 범위에 그리 만족하지 못한다. 기독교 초기의 부활 신앙에 관한 한 유대교의 지혜/묵시문학과 희랍의 철학/종교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페르시아 종교의 하나인 조로아스터 사상의 영향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일 예수 찾기 제 3 운동의 기본 특징이라면, 왜 이런 일이 보다 일찍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인물이 모든 면에서 무인도에 홀로 태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그를 이해하는데 그 주변 정세와 역사를 살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아니었겠는가? 나아가 "새로운 자료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1940년대에 그 존재가 확인된 자료들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서학자들이 대체적으로 그 전공 분야에 있어 기독교 "경전" 중의 일부분 연구라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으며, 따라서 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연구 대상도 희랍이나 로마를 포함한 고대 근동 종교와 역사에 관한 자료들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할 일이 전혀 아니다. 한 성서학자의 말에 의하면, 심지어는 고대 희랍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불트만의 서재에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는 기독교의 한 외경인 도마복음서가 근 20 년간 꽂혀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학자들이 하듯, 이 외경을 "경전"과 동일한 정성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2. 예수 찾기 운동 속의 부활
2-1. 스트라우스(D. F. Strauss)의 부활 이해
2-1-1. 연구에 임하는 전제
한때 신학자 슐라이엘마허와 철학자 헤겔에 심취해 있었던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74)는 1830년대 초반에 독일의 튀빙겐대학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을 강의하던 신학자이다. 그는 1833년 가을에 행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강의를 기초로 하여 1835년에 {예수전}을 간행하였다(여기서 우리가 사용할 책은 David Friedrich Strauss,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tr. by George Eliot and ed. by Peter C. Hodgs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이다). 이 책의 간행은 학자로서의 그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었으나, 이 저작은 그 후 독일 신학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일 우리가 그가 신학계에 준 영향을 간단하게 요약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신약성서도 오랜 동안의 (1) "구전"(口傳, oral tradition) 기간을 거쳐왔으며, 그 동안에 역사적 사건들이 (2) "신화"(mythus)로 발전되어 갔다.
스트라우스의 {예수전}은 당시 유럽 교회의 신앙 상황에서 출발한다. 당시 유럽 교회들은 그 신앙/사상에 있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초자연주의적" 사고를 계속하고 있는 정통파, 다른 하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견지하려는 신진파(영국의 자연신론자들, 독일의 관념론자들)였다. 스트라우스 자신은 원론적으로 이 두 진영 사이를 빠져나가고자 하였다. 초자연주의적 진영에 대하여는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신의 직접적 간섭"('기적'의 전제 개념)을 부정하였으며, 합리적 진영에 대하여는 그들의 신약성서 속에도 긴 구전 기간이 있었고, 따라서 그 사이에 "신화적" 이야기들이 들어갔는데, 그들이 이 사실에 거의 주목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신약성서 속의 신화적 이야기들에 대한 "적극적" 이해에 실패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스트라우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였든, 우리는 오늘날 그가 진보적 합리주의자의 길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과 "신화"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거리에 대하여 당시의 합리주의자들이 충분히 진지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스트라우스와 합리주의자들은 아주 중요한 점에서 결국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신의 직접적 간섭"은 고대 종교 일반에 보편적이었던, 이제는 낡은 개념이라고 하는 생각이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불어닥친 기독교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 결과에 대한 각자의 태도는 결국 "신의 직접적 간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결정적 질문에 달려 있다.
이제는 스트라우스의 {예수전} 속에 등장하는 "역사"와 "신화"의 개념을 살펴보고, 그가 이 둘을 어떻게 관계시키려 했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는 여기서 스트라우스는 성서, 특히 신약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하였는가, 즉 그는 "진짜 예수"를 찾으려고 성서를 읽을 때 어떤 마음 자세로 읽기 시작하였는가를 다루게 된다. 이 질문은 그의 연구의 방법론적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바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그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예수에 관한 복음서의 이야기들(narra- tives,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설)은 "역사"와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역사와의 연관성의 정도에 따라 "순수한 신화," "역사적 신화," 그리고 "전설"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신화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의 특정 신앙 공동체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관념의 산물"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화란 역사적인 사건 서술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이야기가 역사적 진술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이렇다: (1) 이미 사물들의 이치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보편적인 법칙과 양립할 수 없는 것, (2) 그 자체와 혹은 다른 진술들과 모순되는 이야기들(1부 16절). 스트라우스는 이같은 기준으로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역사적 진술인지 신화적 진술인지를 판단하면서, "예수전"을 재건하려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일은 그가 "신화"를 종교적 가치가 없는 허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단지 후대의 특정 종교 공동체가 "자기들의 신앙을 표상"하기 위하며 만들어낸 창안이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즉 신화는 신앙 공동체가 신앙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요소였다는 게 스트라우스의 기본 전제였다는 점이다.
2-1-2. 부활
1) 복음서 속에 등장하는 예수 부활에 대한 첫 소식들, 예컨대, 빈 무덤 발견과 예수 부활을 전하는 여인들 혹은 제자들 혹은 베드로에 관한 진술들은 그 자체로서 서로 모순되는 바가 많다. 따라서 이 대목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후대의 기록들이지 목격자의 증언일 수 없다(3부 137절).
2) 부활 후 예수 출현을 알리는 진술들도, 동일한 기준에 의하면 역사적 진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는 과연 갈릴리에 출현하였는가? 아니면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서 먼저 출현하였는가? 복음서는 이에 대하여 서로 모순되는 보도를 남기고 있다. 또 어떤 인물들에게 언제 출현하였는지에 대하여도 일치된 보도가 없다(3부 138절).
3) 부활 후에 신도들이 만났다는 예수, 그의 몸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가? 이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이에 대한 성서의 보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부활 후 예수의 몸이 지상적이며, 자연스런 몸을 지녔으며, 그리하여 음식을 먹을 수도, 손으로 그 상처를 만져 볼 수 있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변화된 천상적, 초자연적 몸이며, 이 세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성서의 보도는 스스로 모순되며, 역사적 사실에 보도가 아니다(3부 139절).
4) 예수의 부활은 진짜(실재)인가? 이에 대한 스트라우스의 대답은 명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부활 후 예수의 몸은 "신체"(corporeality, materiality)를 지녔다고도 하고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가 정말로 신체를 다시 지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참으로 죽지 않았었다고 하는 것이거나, 혹은 참으로 죽었다고 한다면 그는 정말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예수 부활 증언은, 따라서 후대의 기독교 공동체의 "관념"(idea, 표상)이다. 그러면 이런 관념, 곧 초기 교회의 부활 신앙은 어디서 왔는가? 예수의 제자들이 공연히 꾸며낸 것인가? 아니다. 성서의 보도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의 출현(현현, appearance)"이다.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 신빙성 있는 자료는 바울의 경험과 주장이다(고전 15장 5절 이하, 행전 9:1 이하, 22:3 이하, 26:12 이하). 바울은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 수 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막 한가운데서 자신이 경험한 예수 만남 사건과 예수 부활에 대한 다른 초기 증인들의 경험을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만일 초자연주의를 따른다면, 초기 교회의 부활 신앙의 궁극적 근거(원인)가 되는 예수의 현현 사건을 제자들 자신에게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밖에서 일어난 사건"(external event)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이같은 주장은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역사적 사실)이 못 된다. 스트라우스의 연구는 여기서 끝난다. 예수 부활 보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기독교 초기 신앙인들이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 현현" 사건에 기초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한 관념(표상)이다(3부 140절).
2-2. 보른캄(G. Bornkamm)의 부활 이해
2-2-1. 연구에 임하는 전제
이제는 예수 찾기 "새 운동"의 한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신약학 교수 보른캄(G nther Bornkamm)의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 New York: Harper & Row, 1960, 독일어판은 1956)를 읽어보자. 진짜 예수 찾기 운동이 파산선고된 지 50년 후, 왜 그는 다시 "예수전"을 발표하였는가? 그는 무엇을 찾으려 하였는가? 그는 그 책 서두에서 "이제는 아무도 예수의 전기를 쓸 수 있는 위치에 처해 있지 못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주요 이유는 작가(성서학자)들이 저마다 자기 시대의 생각(spirit of one's own age)을 예수상에 투영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3). 이런 좌절감은 우리가 공인하듯 신약성서라고 하는 그 자료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신약성서는 신앙인의 눈으로 본 예수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과 무관한 "예수 자신의 말이나 그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남아 있지 않다"(14).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터전은 존재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은 허구의 예수, 신앙인들 자신이 임의로 조작해 낸 예수를 믿는 것인가? 보른캄에 의하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이같은 역사적 연구 과정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5). 그렇다면 19세기 사람들이 찾던 역사적 예수도 아니고 신앙인들이 임의적으로 조작해 낸 예수도 아니라면,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아니 신약성서 자체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보른캄의 대답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과거의 예수가 "오늘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시는 예수 곧 주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예수를 바라본 방식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에 대한 이같은 (신약성서의) 이해는 끝에서 처음을 되돌아보고, 다시 끝을 내다보는 그런 방식이다"(16). 이리하여 신약성서는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를 선포할 때 "과거의 예수"(WHO HE WAS)를 증언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예수"(WHO HE IS)를 선포하였다(17).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각 대목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전승(tradition)은 예수의 (그런 식으로 이해된) 역사의 진실성과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복음서들의 케리그마 안에서 역사를 찾으며, 이 역사 안에서 (다시) 케리그마를 찾는 일이다"(21). 다시 말하면, 신약성서의 역사관으로 보면, "예수의 과거(once)"가 하느님의 "유일회적이나 영원한 사건(once and for all)"이 되었다는 게 신앙의 선언이다(23).
우리는 여기서 예수 찾기 제 2 운동이 새로운 자료나 성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새 이해"에 기초해 있다는 로빈슨의 판단을 실감하게 된다. 이제는 보른캄이 이런 자세로 성서에 다가섰을 때, 예수의 부활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알아보자.
2-2-2. 부활
보른캄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때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설교하던 설교자 나사렛 예수가 어찌하여 사람들이 신앙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 "결정적 전환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79)
우선 보른캄에 의하면,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 그가 영원한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 등은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거론할 수 있는 예수 생애의 최후 자료는 그의 처음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180).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보른캄의 생각에는, 한결같은 신앙 현상이었다. 심지어 바울은 이를 강조하여 말하기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도 헛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는 점을 그는 이 대목에서 상기한다. 즉 예수 부활 사건을 진술하고 있는 성서 속의 "해설 이야기들"(narratives)은 서로 다르고 모호하지만 예수 부활을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한결같다(181). 그는 이것을 "부활 전승의 문제"라고 이름한다(182). 즉 부활 사건 보도의 다양성과 메시지의 통일성, 그리고 그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보른캄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부활 사건 보도들보다 부활 메시지가 앞선다. 부활의 메시지는 장엄하나, 부활 사건은 그 보도에 있어 일치성도 없을 뿐 더러 제자들에게도 당혹스럽게 묘사되어 있다(예컨대, 막 16:8, 눅 24:5 등을 보라) (183).
2) 부활 메시지와 신앙은 부활 사건에 대한 일치된 보도 혹은 부활한 예수의 신체적 성질에 근거해 있지 않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보더라도 예수의 부활과 그의 승천/하느님 우편 좌정이 동일시되고 있음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183).
3) 그러므로 부활 사건 보도 이야기들(stories)은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신앙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 속에서 찾을 것은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이나 연대기", 곧 역사가 아니라 부활의 "메시지"(케리그마)이다.
4) 그렇다고 부활 메시지가 초기 교회의 창안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과 예수의 증인들이 전하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보른캄이 확신하는 바에 의하면, 교회의 신앙에서 본다면 예수의 부활이란 "이 죄악 많은 반역적 세상에 대한 하느님 자신의 간섭, 개입" 사건이며, 이 사건은 그 성질상 "신앙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곧 객관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183-184).
이로써 우리는 보른캄의 연구는 17,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과 더불어 스트라우스가 이미 거절한 개념, 곧 "하느님의 직접적인 세상/역사 개입"에 도달하게 되었음을 확인한다.
2-3. 크로산(J. D. Crossan)의 부활 이해
2-3-1. 연구에 임하는 전제와 방법론
역사적 예수 찾기 제 3 운동의 주역들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학자들, 그리고 미국의 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에서 주력을 다하는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을 일별할 수 있는 간략한 자료는 1993년 가을에 있었던 학술회 자료집을 묶어서 만든 책(Hershel Shanks ed., The Search for Jesus: Modern Scholarship Looks at the Gospels, Washington D.C.: Biblical Archeology Society, 1994)이다. 이제 이 책의 줄거리를 함께 읽어보자. 먼저 오늘날의 Q 복음서와 도마복음서 본문 연구에 대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든신학교 성서학 교수 패터슨(Stephen J. Patterson)의 강연을 요약해 본다. (역사적 예수 찾기 제 3 운동은 "갈릴리"에 대한 여러 가지 고찰을 필수적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상 신약성서 중 부활에 관한 보도에 대한 이해에 관심을 제한한다. 이 점을 주의해 주기 바란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늘날의 성서학자들은 자기들의 업무를 "역사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신빙할 만한 증거 "자료"가 없이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즉 종전의 "신학자"연 하던 자세를 지양해 버렸다고 하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어야 한다. 역사가처럼 성서를 연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약(기독교 경전)학자들은 예수 당시의 고대 일반 문헌과 성서를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비교 연구한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 찾기 제 3 운동은 당연히 제 2 운동의 연장이 아니라 중단되었던 제 1 운동의 계승임이 확실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트라우스가 "역사"와 "신화"라는 범주를 가지고, 그리고 보른캄이 "(실존) 역사"와 "케리그마(메시지)"라는 범주로 성서에 접근하였다면,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성서와 그 밖의 고대 문헌, 자료들에 접근하는가?
1)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들은 성서(정경)만이 아니라 외경, 그리고 고대 문헌들을 함께 읽어나가면서 예수를 찾는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2) 정경을 포함한 여러 고대 문헌들 중 어떤 것이 객관적 "진정성"을 지닌 자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여기서 스트라우스의 "역사적 사실" 판단 기준을 상기하고 비교하기 바란다.)
첫째, "증언의 중복성"(multiple attestation). 1957년 이래로 외경과 기독교 초기 연구에 필요한 문서들이 일반 학자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중요성을 얻게 된 원칙의 하나인데, 같은 진술을 여러 자료가 동시에 증언해 주면, 그 대목은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증언의 중복성이 그 내용의 역사적 정확성을 보증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형태의 문서의 저작자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21-22). 예컨대,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에 함께 동일하게 들어 있는 예수의 말은 예수 자신이 한 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케리그마 원리"(kerygmatic criterion). 예수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자로 인정된 이후에 나온 초기 교회의 설교(케리그마)와 그 이전에 예수 자신이 말했음직한 말은 구별해 낼 수 있으며, 또 구별해야 한다. 즉 성서의 진술 속에서 케리그마의 영향을 분별해 내야 한다(23).
셋째, "공동체 형성의 원리"(criterion of social formation). 예수 자신은 그 짧은 기간의 목회 동안에 교회라는 특정 공동체를 형성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특정 공동체 형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세련된 진술들은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24).
넷째, "독특성 원리"(criterion of distinctiveness). 초기 교회에는 예수가 독특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 구성원들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자료를 통하여서) 알고 있는 권위 있는 말들은 모두 예수가 한 말이라고 기록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이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앙적으로 보이는 말이 성서 속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황금률 같은 것이 이 경우에 속한다. 따라서 예수가 말하였다고 하는 많은 말들 중 "충분히 독특하지 않은" 것들은 예수 자신의 것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24-25).
다섯째, "일관성과 환경성의 원리"(coherence and the environ- mental criterion). 이렇게 하여 찾아낸 결과가 서로 일관성이 있어야 실재 사건으로서의 신빙성이 있다. 나아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고대 팔레스타인 혹은 근동 지방의 종교/문화적 환경에 비추어 보아 가망성이 있어야 한다(25).
2-3-2-1. 다양한 예수 상들
그러면 이런 비교적 정교한 원리를 가지고 역사가들처럼 성서를 연구한 결과, 그들이 찾아낸 역사적 예수는 그 얼굴이 서로 비슷한가?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호감(?)을 줄만한 것인가? 전혀 아닌 것 같다. 우선 일반 독자들의 혼동을 금하기 위하여, "역사적 예수 연구 르네상스"에 공헌한 오레곤 주립대학의 종교학 교수 보그(Marcus J. Borg)가 같은 책에서 정리하고 있는 오늘날의 주요 학자들이 그리고 있는 예수상 여섯 가지를 일별하자.
유대교와 예수의 관계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하면 예수는 "다시 일어난 종말론적 예언자"이며, 갈릴리가 희랍 문화권이었었다는 점에 착안하고 Q복음서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는 맥(Burton L. Mack)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 희랍의 견유학파의 선생을 닮은 "방랑 현자"이며, 구약성서의 소피아(지혜) 전승에서 예수를 읽으려 하는 여성신학자 휘오렌자(Elisabeth Sch ssler Fiorenza)에 의하면 예수는 사해동포주의를 실천한 지혜/예언자이다. 그리고 사회학적 접근을 하고 있는 호슬리(Richard Horsely)에 의하면 예수는 엘리야 스타일의 사회 변혁을 지향한 예언자이며, 일반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다가 기독교에 심취해 들어간 보그 자신에 의하면 예수는 "신들린 사람" (spirit person, 일종의 무당)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부활 사상을 엿보려 하는 크로산에 의하면 예수는 견유학파의 방랑 생활을 닮은, 그러면서도 새로운 사회상을 꿈꾸면서 그 꿈을 시골뜨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간략한 말로 전달할 줄 알았던 유대 소작농부이다(83-103).
2-3-2-2. 크로산의 부활 이해
크로산의 예수 부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1) 예수 운동이 있었다. (2) 이 운동을 중지시키려는 권위 당국자들(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있었다. (3) 그러나 그것은 실패하였다. 그의 운동은 그의 사후에 더 널리 펴져 나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서 밖의 자료들도 일치하게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109). 이제 크로산이 이해한 부활을 살펴보자. 그는 간단명료하게 명제 형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주고 있다. [다른 한편, 성서 속의 예수의 매장, 부활 등에 관한 보도들 중 상당 부분은 "기억된 역사"(history memorized)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예언이 만들어 낸 역사"(prophecy historicized)이다. 110- 111]
명제 1: 예수 부활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의 처형 이후에도 예수 운동이 중지되지 않고 계속된 사실에 대하여 설명하는 "한 가지, 여러 방식들 중의 한 가지 방식"이다. 즉 Q 공동체나 도마복음 공동체도 예수 사후 그에 대한 믿음을 지속시켜 갔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적어도 "예수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였다. 그 공동체들은 예수 부활에 대하여 알지 못하며, 그런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대두되는 질문은, 그러면 고린도전서 15장 13, 16절, 곧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 것이다"라는 바울의 선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울 자신이 이미 하였는데, 곧 20절에서, "예수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즉 크로산에 의하면, 바울은 임박한 종말을 믿은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단지 하느님께서 그 완성을 --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하여 -- 일시 유보하고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총괄 부활(종말에 가서 있을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에게서 그 총괄 부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 것이다(120-123).
명제 2: 바울은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환상을 보았으며,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이같은 바울의 경험은 예수의 최초 추종자들의 경험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진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깔려 있다(123).
명제 3: 예수 처형 이후 그를 보았다는 경험, 곧 예수의 현현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기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권 내의 '권위'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누가복음 24장의 빈 무덤 보도를 보라. 여인들이 빈 무덤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한다. 그런데 오직 베드로만이 "빈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왜? 한편, 요한복음 20:3-10을 보라. 베드로가 빈 무덤에 먼저 "들어갔지만," "(사랑 받는) 다른 제자"가 여러 면(빈 무덤 경주, 사실 확인, 믿음)에서 "먼저" 행동한다고 되어 있다. 왜? 누가에게는 베드로가 권위자이다. 그러나 요한은 베드로 전승을 무시하지 않지만 "사랑 받는 제자"가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며, 그가 "먼저 보고, 먼저 믿었다"고 한다. 즉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사후에도 그를 "본" 사람들은 각기 공동체 속에서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124-125).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 보자.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크로산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역사적 예수가 하느님의 현현'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부활이란 이 세상 안에서는 예수가 부재(absence)하지만 그것을 현존으로(as presence), 혹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존으로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125-126).
3. 보수파의 반박
위와 같은 [예수 세미나] 학파(이렇게 불러도 좋을 것이다)의 예수 찾기 운동에 대하여 즉각적이고도 거센 반발들이 보수파 진영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에 대한 대표적 작품들은, 내가 위에서 말한 세 신학교 책방에서 모은 책들을 기준 한다면, 다음과 같은 4 권이 있다. 관심 있는 이들은 참조하라.
Gregory A. Boyd, Cynic Sage or Son of God?: Recovering the Real Jesus in an Age of Revisionist Replies (Wheaton: Victor Books, 1995).
Luke Timothy Johnson, The Real Jesus: the Misguide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aditional Gospels (New York: HarperSanFrancisco, 1996).
Ben Witherington III, The Jesus Quest: The Third Search for the Jew of Nazareth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5).
Michael J. Wilkins and J. P. Moreland, ed., Jesus Under Fire: Modern Scholarship Reinvents the Historical Jesus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5).
그러나 우리가 위의 책들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아니다. 그런 자료들은 전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이들의 책들 속에 나타나 있는 논지를 "비판"(시비를 논리적으로 가림)이 아니라 그냥 "불평"(감정적 불편의 토로)이라고 이름한다. 이제 그들의 불평의 핵심을 들어보자. 내가 아는 한 보수파들의 대표적인 불평은 미국 서부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교 곧 탈봇신학교(Talbot School of Theology)의 교수들인 윌킨스(Michael J. Wilkins)와 몰랜드(J. P. Moreland)가 편집, 집필한 {공격 당하는 예수}(Jesus Under Fire)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부활에 관한 한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불평을 들을 수 있다.
3-1. "철학적 편견"
윌킨스와 몰랜드는 {공격 당하는 예수} 편집자의 "서문: 예수를 둘러싼 광분"에서 이렇게 [예수 세미나]를 꼬집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기록을 사실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게 핵심 질문인데, [예수 세미나]의 철학은 철저한 "자연주의"에 입각해 있으므로, 그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입증되기까지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2-4). 이 "결정적인 질문," 곧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진술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성서 연구 이전의 문제, 곧 철학적-세계관적 질문에 있어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본 판단, 곧 오늘날의 신학 쟁점은 결국 "초자연주의 대 자연주의의 싸움"이라는 생각은 이 책에다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는가?" 하는 글을 기고한 에모리대학의 객원 교수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에게서도 선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초자연주의와 달리, 자연주의에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들이 자연 질서의 일부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진들과 초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 분기점이 있다."(144).
이것은 "철학적 편견"이며,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성서가 말하는 부활 사건 -- 이 점에서 크레이그는 부활 사건의 신학적 성격을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다 -- 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전무하다(146).
3-2. "부활 사건 없이는 부활 신앙의 발생이 불가능하다"
1) 크로산의 주장과는 달리, 크레이그에 의하면, 우리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든 상관없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기반이었다(159).
2)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예수 부활을 전한 초기 교회의 메시지는 객관적 사건에 근거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로 본다면,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 선교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데, 이 불리한 일을 왜 초기 기독교인들이 공연히 하였겠는가 하는 논리이다.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게 기독교 선교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1) 유대인들은 "세상 끝"에 가서야 하느님에 의한 부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가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였다고 선포하는 것은 불리한 증언이다. (2) 또한 부활은 개인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 전체가 일시에 일어나는 "총괄 부활" 사상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 형태이었는데, 예수 한 사람이 부활하였다고 선포하는 행위는 역시 불리한 주장이었다(160).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적어도 중요한 일부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것은 [예수 세미나]도 인정한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예수 세미나] 식으로 초기 교회 자체의 (신앙의) 창안(산물)이라는 방식보다는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the historical fact of Jesus' resurrection)이었다고 보는 방식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the most plausible explanation)이다(160-162).
4. 생각할 문제
1. [예수 세미나] 학파는 과연 "철학적 편견" 때문에 "부활의 사실성"을 부인하고 있는가? 혹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이 지녔던 신앙 형태의 다양성(이것이 인정된 것은 예수 찾기 제 3 운동의 공헌이다)을 인정하며, 또 예수 부활에 대한 성서 자체의 다양한 증언들을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다시 읽으려 하며, 그 표현의 차이를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인가?
2.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 중에 "예수의 부활"이란 용어 없이도 자신들의 예수 신앙을 지켜 나간 공동체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클레어몬트신학교의 신약학 교수 라일리(Gregory J. Riley, Resurrection Reconsidered: Thomas and John in Controvers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에 의하면, 기독교 초기와 교부 시대에도 예수 혹은 그 어떤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육체 부활"이란 개념을 품는 것은 신빙성 없는 논리요 혐오스런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으며, 이를 믿는 자들과 부인하는 자들 사이에 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3. 예수의 부활이 행동 주체에 있어서 "하느님의 행위" -- 인간 예수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 이며, 그 성질에 있어서 "초자연적"이라면, "역사적 사실성," 그리고 "부활한 예수 몸의 물리적 성질"을 객관사적으로 혹은 실증사적으로 입증하려 드는 것이 과연 하느님을 믿는 신앙 행위에 어울리는가 모순되는가?
4. 우리가 오늘 근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을 다시 선포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선포하든 상관없이, 부활 사건은 "이 세상 끝 날"에 가서야 그 의미가 드러나는 성질의 사건인가? 초기 교회는 수천 혹은 수만 년 후에 일어날 일의 전조(前兆, 파넨버그, 몰트만 등)를 목숨 걸고 선포한 것인가? 혹은 그들이 선포한 부활 신앙은 그들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가? 어떻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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