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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제 5 장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by 농민만세 2020. 7. 20.

 

[ 제 5 장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제 5 장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논자는 한마음교회가 우리의 말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마을과 이웃에게 그리고 남을 예단하기 좋아하는 이웃 교회들 앞에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교회임을 선언해 나가는 긴 노정(路程)을 위해, “우리는 예수교다!”는 진술을 지난 2014년 11월 30일 주일예배 설교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예수교 선언’은 이곳에 부임하기 직전의 교회에서 2001년 4월 1일, ‘예수님 공동체’라는 주일 설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는 신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농촌교회의 목회를 잠시 접고, 대도시로 이주하여 5~6년 동안 부목사 직무를 감당하면서 도시 교회들의 내부적인 온갖 비리와 갈등 그리고 심각한 분열을 연속하여 경험하던 중,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던 교회에서 또다시 교회의 분열과 상처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던 때였다.

5.1. “인간교(人間敎)를 넘어 예수교로!”

  그 교회는 상당히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하다가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로 거의 와해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그처럼 고통 속에 있는 교회를 지켜내고 있던 남은 교우들과 함께 교회 회복에 진력하던 중이었다. 논자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교회에 분란을 가져온 외적 요인을 주목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들의 안을 주시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었다. “인간교(人間敎)를 넘어 예수교(敎)로!” 말하자면 교회와 예수를 자신들의 욕망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그런 신앙의 양태들이 난무하는 현상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예수교라는 정체성을 거의 상실한 한국교회에 대한 반성과 함께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리하여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을, ‘인간 자신을 목적하며 하느님을 수단화하는 종교’라는 의미로 기독교/그리스도교나 예수교가 아닌 ‘인간교(人間敎)’라고 명명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기독교‘ 아닌 ‘예수교’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교회의 갱신 개혁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것에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신학생 때부터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그것은 ‘본래의 그 처음’을 찾아내는 긴 여정 곧 태평양의 연어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태어난 강줄기를 찾아 여행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교회를 넘어, 미국교회와 서방교회들, 종교개혁시대와 개혁자들의 신학 그리고 중세시대 교회들, 교부들의 교회들과 그들이 교리들,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기독교와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 초기교회와 바울, 그리고 바울의 예수와 원시 공동체, 마침내는 ‘갈릴리의 그 역사적 예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었다.

  논자가 이전의 교회에서처럼 한마음교회에 부임할 때도 역시 교인들에게 반복했던 당부는 이것이었다. “나도 한 사람의 절실한 신자(信者)로서 부지런히 성장해 갈 테니 함께 성장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와 같은 ‘그 처음의 예수 찾기’의 길고 긴 여정을 그것의 보람과 좌절들까지 모두 솔직하게 숨김없이 이야기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 모든 과정의 한 매듭 점에서 ‘우리는 예수교다!’는 우리의 자기 선언을 이처럼 진술해 두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예수가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면 무슨 이유 때문인가?’를 지역사회는 물론 기독교인들 특히 다음 세대가 우리에게 여전히 묻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계속해서 지역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주민으로 살아가는 일을 통해 ‘미완의 우리 예수 이야기’로 나누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교다!”는 우리의 자기 선언은 그처럼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곧 우리의 갈릴리 예수께서 그토록 하고자 원했던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면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로서 ‘그 예수를 옹위(擁衛)하고 함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매우 근본적인 요청이다.

5.2. “우리는 예수교다!”

  이처럼 한마음교회와 논자는 ‘우리는 예수교다!’라고 우선 우리 자신에게 꾸준히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기존의 기독교도들이었기에 그 기존의 것들로부터 일련의 간격을 얻어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함으로써 스스로 설 틈새를 얻기 위해, 우선 ‘기독(基督)’이라는 정체불명의 신조어(新造語)를 거부하면서 시작한다. 구약성서 히브리어 ‘마쉬악흐(משׁח, 메시야 - 기름을 붓다 또는 기름을 바르다)’를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로 의역(意譯)하였다. 이 말을 중국어 성서에서 ‘지리수뚜(基利斯督)’라고 다시 음역(音譯)한 낱말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서 ‘기독(基督)’이라는, 발음도 뜻도 모호한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처럼 발음도 그 의미도 불분명하여 그것을 말하고 듣는 동시에 그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없다 보니 자기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된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을 버리고, ‘예수교’를 우리 자신을 지칭하는 우리 본래의 명칭으로 복원한다. 우리가 소속된 교단의 명칭도 명확하게 ‘대한 <예수교> 장로회’(P.C.K.)이다. 그 외에 ‘그리스도교’라는 일반적인 명칭도 있지만, 그 말은 주로 문맹 또는 무학(無學)의 노년층이 대다수인 우리의 지역사회 주민들에게는 그 의미를 두세 번 다시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 발음도 쉽지 않은 이유로 그것을 굳이 채택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불완전한 교회들이 고백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최초의 시작점으로 역사의 한 시공간에 실존했던 ‘그 예수’가 절실하다. ‘우리는 예수교다!’는 지속적인 자기 선언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신앙의 목표에 근접해 나아가려는 각성을 잃지 않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목표는 당연히 그 갈릴리 예수 자신의 지향점이었던 ‘인간 구원의 길’이다. 이를 위해 한 사람으로서의 끊임없는 혁신과 성장을 그 모본인 갈릴리 예수의 영(성령)이 우리의 일상 속에 지속적으로 촉발시키고 있음을 믿는다.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①신앙의 초보를 넘어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히 5,12-6,2; 엡 5,1).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라(벧후 1,4). 그러기 위하여 ②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12,3). 바라보라(히 12,2). 본(本)을 받으라(롬 8,29; 고전 11,1; 엡 5,1; 빌 3,10; 살전 1,6). 그래야 하는 우리를 위해 그는 맏아들이시다(롬 8,29; 히 1,6). 우리에게는 그가 곧 길-진리-생명이다(요 14,6). 그것을 위하여 ③입으로만 아니라 중심을 다 하여 공경하라(마 15,8-9; 요 5,23; 막 12,30-31). 그의 교훈으로 육(肉)의 사람이신 예수를 모시라(요이 1,7-11; 요일 2,18; 22 4,3). 그리하여 마침내 ④죽기까지 순종하여 현양(顯揚)되신(빌 2,5-11),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히 2,10; 5,7-10), 십자가를 참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은(히 12,2-3), 죽음에서의 부활로 하늘의 아들로 인정되신(롬 1,4),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까지 자랄지니라(갈 6,2; 엡 4,11-16 ). 이것이 ‘한 인간의 구원’이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저 제대로 사람 되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 됨의 기초를 위해 이렇게 마무리한다. ⑤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1-22; 4,11-12).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지역사회를 향해 더욱 효과적으로 ‘예수의 정의ㆍ평화ㆍ생명 밥상’을 차려내는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실천하는 삶으로 구한다.

이는 또한 복음서들이 진술하는 본래 갈릴리 예수께서 지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푯대(빌 3,14)의 정점에 있는 갈릴리 예수 곧 ‘모든 케뤼그마’(κηρυγμα)326) - 기존 한국 기독교의, 한국 기독교에 영향을 준 서구와 특히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의 시작이라 하는 소위 종교개혁자들의327),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제국주의적 기독교(Christendom)의, 역시 종교개혁자들처럼 역시 자신들의 현실에서 씨름한 교부(敎父)들의, 초기교회들의 흔적인 복음서들의, 복음서들과 특히 바울의 케뤼그마 - 들을 ‘뛰어넘어’ 최대한 ‘원(原) 예수’에게 접근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에는 아직 여러 논쟁과 주장들이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1세기 초반 팔레스타인 근동지역의 ‘원시 예수 운동 공동체’들에 의해 선언되고 보전된 ‘갈릴리의 그 예수’, 바울(그가 ‘케뤼그마 그리스도론’의 창시자라면)과 베드로(그가 ‘역사적 예수의 목격자’들 중 대표자라면)를 넘어서 ‘그 예수’ 찾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 예수의 밥상에 함께 비스듬히 누워(아나케이마이) 우리가 제대로 ‘예수의 한 패거리 곧 갈릴리 패거리’328)임을 계속해서 모든 일마다 때마다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그 예수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복음서의 ‘소자’, 또는 박근혜 탄핵 이후 촛불 혁명의 발걸음 앞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어떤 자들의 표현대로 ‘개나 돼지로 취급되는’), 내일의 끼니를 예측할 수 없는 가난뱅이, 소작농(小作農) 겸 날품팔이(잡부 목사)로 숨 막히는 하루하루의 생계에 내몰리는 비정규직 육체노동자였다는 성서와 외경들 그리고 고고학적 연구들의 흔적들329)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반가운 복음이다. 그런 예수로부터 우리는 그처럼 절실한 ‘땅의 사람이 하늘을 품게 된’ 그 가장 큰 이적(異蹟)을 오늘 여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하늘의 표적(表迹)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이 표적은 우리의 땅에서도 여전히 실현될 수 있는 하늘의 이적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1세기 갈릴리 지역이라는 상식적인 정황에서 볼 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의적 선택이라는 것을 해 볼 수도 없었던 사회적 신분인 문맹(文盲)이었다거나, 헤롯 안티파스의 도시 건설 노역(勞役) 동원된 수개월 동안의 품삯이 체납되어 빈손으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던 한 사람의 전형적인 가장(家長)이라거나, 하루하루의 막막한 생계의 두려움으로 잠든 아이들 머리맡에서 ‘물 말아 삼킨 밥알이 위장 속에서 곤두서던’ 막달라 마리아의 남편이었다거나 한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큰 희망과 위로의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처럼 고상한 어떤 위엣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날마다 생계의 벼랑 끝에서 숨 가쁘게 고역(苦役)에 시달리고 가족의 끼니를 걱정하면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어 볼 겨를도 없이 주린 배를 바닥에 깔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에 휘둘리면서도, ‘하늘을 품게 된 또는 하늘을 품은 사람’이었다는 이 엄청난 일보다 더 큰 이적과 희망과 위로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교(敎), 예수당(黨), 갈릴리 도당(徒黨; 막 14,69-70/개역개정)이며, 예수와 한 패(막 14,69-70/표준새번역, 공동번역)이고, 나사렛 이단 또는 나사렛 분파(행 24,5; 14)로 불리기를 기꺼이 자처한다.330)

  월터 윙크는 기독교가 세상에 줄 것은 ‘단순히 예수’라고 하면서 이렇게 천명한다. “나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예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예배했던 하느님을 예배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기독교가 줄 필요가 있는 것은 ‘인간 예수의 신화’다. 그것은 유대인 예수(그는 엄밀히 ‘갈릴리 사람’ 예수였다:논자 주), 한 인간, 성육한 사람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331)라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월터 윙크의 참사람 예수론은 그의 말처럼 논자에게는, 한편 지나치리만큼 신화적이고 신앙고백적이어서 ‘그 갈릴리 사람 찾기’를 도리어 방해한다. 우리의 예수 찾기는 그처럼 반드시 놀랍도록 신화화된 예수일 필요는 없다. 물론 복음서 안에 그런 예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갈릴리 소작 농사꾼 목수 노동자 예수이고 그런 그에게 어떤 의미로라도 한 줌의 하늘이나마 품겨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5.3 “참으로 사람이고자!”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영 곧 성령은 당연히 ‘예수’를 또는 ‘예수의 부활’을 우리 안에서 촉발시키는 갈릴리의 예수 자신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영성』 영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방의 영성(예수님을 따름)은 삶의 모든 차원에 관련된다. 이것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 인간실존의 모든 단계에 침투한다는 참다운 성서적 영성이다.”332) 그리고 구티에레즈는 앞의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사색(곧 신학)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데서부터만 시작될 수 있다. 온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사랑을 생각하고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감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영성(곧 예수님 따름)은 공동체의 모험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사막의 위협과 고독을 넘어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진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우리가 마셔야 하는 우리의 우물’이다.”333)

  그리고 박재순은 그의 밥론(論)에서 ‘밥’을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 사건의 매개’로 본다.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도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밥을 먹는 시간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는 것” 박재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 (서울:도서출판 천지, 1988), 69. 이라고 한다. 이는 논자와 한마음교회가 부활한 예수의 모든 현현이 유독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에 반복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특히 ‘엠마오의 두 제자를 동행한 예수’를 줄곧 집중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권진관 교수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부활’이 우리에게 그 일을 재현시킨다.

  “예수의 민중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동참하며 결국은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예수와 같은 삶의 과정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저항적 역사참여의 삶을 살고 그것으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했으나, 예수의 민중은 먼저 예수의 부활을 그들의 삶의 가운데서 경험한다. 부활은 삶의 전체적인335) 변화를 의미한다. 민중은 자신의 삶의 한 시점에서 부활의 사건을 경험한다. 그것이 집단적인 부활이 될 경우 민중혁명이 일어난다. 민중의 부활은 객체적 수동적 민중으로부터 예수의 민중, 곧 주체적인 민중으로 변화하는 것336)을 말한다.”337)

  권진관 교수는 이처럼 부활은 피동적인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변화시킨다고 하는데 논자는 이를 ‘해방시킨다’로 이해한다. “이러한 주체로의 부활은 다시 십자가를 지는 해방의 역사 속에 뛰어들도록 민중을 이끈다. 십자가를 지는 민중의 분투는 다시 민중의 승리 곧 부활로 이어진다.”338) 그러면 어떻게 객체에서 주체로 변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삶 속에서 ‘계기적 사건’과의 대면을 통해서 일어난다339)고 하므로, 실로 우리는 우리의 ‘밥상’ 곧 한마음교회가 매 주일 차려내는 주일예배의 성만찬 밥상 속에서, 하루 세끼의 고독한 밥상을 차려야 하는 노년의 교인들과 주민들의 밥상 위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농촌을 찾아와 땅을 일구듯 새 삶에 도전하는 귀농인들의 외로운 밥상 위에서, 홀연히 엠마오의 두 제자와 동행한 예수처럼 ‘계기적 사건들과의 대면’을 예수의 영이 촉발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동시에 논자는 우리가 절대 잊지 않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활에 대한 진술이 또 있다는 사실 하나를 여기에 상기해 둔다. 이를 위해 매우 짧게나마 그 실마리를 남겨놓으면서 이 논문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것은 홍정수 교수가 진술하는 ‘개벽(開闢)으로서의 부활’인데,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부활을 진술할 수 있는가?”에 직면해 있다는 문제의 핵심에 송곳처럼 직면하게 한다. 부활은 실로 모든 것이 해원(解寃)되고 해방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으로, 우리가 예수의 밥상 위에서 시공을 꿰뚫어 경험하게 되는 눈물겨운 참 정의의 실현이다. 이러한 해방의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최후 종말론적으로 희망하는, 희망할 수밖에 없는 부활이다.

  “사실 기독교의 부활 사상은 이처럼 강자들의 불의(不義)에 의해서 힘없는 자들의 희망이 철저히 제거되어 버리는 죽음이라는 그 한계 상황에서조차 다시 희망을 외치는 항거로서의 부활이다. 신약성서의 ‘부활’은 인간의 자연스런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인간론적 접근)도 아니며; 신약성서의 ‘부활’은 지구 또는 우주의 종말에 대한 도래를 알리는 경고(우주론적 접근)도 아니며; 신약성서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정의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특정 시대 유대인들의 신앙의 언어(신정론적/神正論的 접근)로서; 한국인들의 경우, 그것을 ‘개벽(開闢)’이라고 번역해 준다면 오히려 몇 가지 장점이 있다...”340)

  논자의 이 모든 진술은 여기에 최종점이 있다. ‘참으로 사람이고자!’라는 우리 구원의 희망과 갈구는 이처럼 저 갈릴리 예수의 밥상에서 치유되고 해방되는 동시에 부활하여 예속(隸屬) 곧 기꺼이 한 몸을 이루면서 ‘그의 오클로스’로서 모이고(부르심) 또 ‘그의 패거리’로서 흩어지는(보내심) 이 역동적이고 종말론적인 밥상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갈릴리 예수의 얼이시어! 부디 우리 모두 안에 ‘그 예수’를 촉발시키소서!



========= 각주

326) 'κηρυγμα' : 어떤 사람들에 의해 고백되고, 가르쳐지고, 기대되고, 선언된 것.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되고 덧칠해진 예수가 아닌 '원(原) 예수'에게 최대한 근접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327) 우리는 특히 16세기 서구의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다. 그들에게 종교개혁자들이라는 호칭은 지나치다. 자신들의 현실에서 치열하게 답을 찾아내려던 또 다른 사람들이었던 그들의 당시 기독교 갱신 운동은 특히 종교개혁 신봉에 빠진 한국개신교가 철저하게 해체적으로 다시 읽어내야 할 점이라고 본다. 그리하지 않으면 무엇도 우리에게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328) 이는 전적으로갈릴리신학대학원 총장인 홍정수 교수의 가르침이며 자극이다. 갈릴리신학대학원 홈페이지의 총장 인사말 참고. http://www.gstseoul.or.kr/?c=1/8 (2017.10.22. 접근)

329)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J. D. Crossan & J. L, Reed, 김기철 역, 『예수의 역사 -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서울:한국기독교연구소, 2010)을 참고하기 바란다.

330)  이는 전적으로갈릴리신학대학원 총장인 홍정수 교수의 가르침이며 자극이다. 갈릴리신학대학원 홈페이지의 총장 인사말 참고. http://www.gstseoul.or.kr/?c=1/8 (2017.10.22. 접근)

331) Walter Wink, 한성수 역, 『참 사람』 (고양: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529. 이 문장에 이어지는 월터 윙크의 참 사람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지나치게 신화적이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범적이고, 권력자들에게 희생되었으나 여전히 승리자이며, 부숴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자, 힘 있는 자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땅에 먼지처럼 가루가 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자, 죽음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을 치유하고, 배척받아 변두리 인생들이 된 모든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 해방시키는 자,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배 세력의 암적인 존재들을 폭로하는 자, 그 예수는 권세들이 죽였지만 죽음이 그를 없애버리지 못하는 자다. 하느님이라는 실재와 다가오는 하느님의 새로운 세계 위에 그의 헌신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던진 한 사람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바로 예수다... 간디가 그토록 명료하게 본 것처럼, 기독교가 세계에 주는 선물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인간성의 계시자이며 촉매자인 예수다."

332) Gustavo Gutierrez, 이성배 역, 『해방신학의 영성』 (왜관:분도출판사, 1987), 11. 이 서문을 쓴 이는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이다. 헨리 나우웬은 수많은 ‘영성’ 관련 서적들을 집필한 소위 ‘영성가’로 알려진 미 가톨릭 신부인데,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예일대 심리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빈민지역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만나 강의를 들으면서 사회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의외 사실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 이곳을 참고. http://solysal.blog.me/90030841153 (2017.10.22. 접근)

333) 앞의 책, 220.

334) 박재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 (서울:도서출판 천지, 1988), 69.

335) 우리는 이 말을 ‘혁명적일 만큼 전체적이고 총체적인’으로 이해한다.

336) 우리는 이 말을 ‘해방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337) 권진관, 『민중신학 에세이』 (서울:도서출판 동연, 2012), 29.

338) 앞의 책, 29.

339) 권진관, 앞의 책, “한, 사건, 단, 역사의 주체”, 30-50 참고.

340) 홍정수, “한국의 개벽사상의 빛에서 본 기독교의 부활 신앙”, 『성곡 논총 24, 1993.06, 57-12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