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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제 4 장 한마음교회 자활(自活)공동체 - 4.2.

by 농민만세 2020. 7. 20.

 

[ 제 4 장  / 4.2. ‘남면, 한마음, 성만찬, 예수교회, 공동체’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4.2. ‘남면, 한마음, 성만찬, 예수교회, 공동체’

아래는 지난 2016년 9월 18일부터, 한마음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해 둔 ‘우리의 선언문’이다.311)

<우리의 선언>

1.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 본연의 예배로써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갈릴리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 죽기 위해 기쁨으로 따른다.

2. 우리는 누룩과 소금이 되라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지역사회 속에 녹아들어 맛을 내는 선교의 일을 계속한다.

3. 우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단의 총회적 결의와 신앙고백들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따른다.

4. 이 모든 일을 태안반도...라는 특별한 역사적 장소에 살아온 교우들에게 맞춤옷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

(1) 우리의 정체성 :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①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정체성 안에 살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예수교 신앙으로 응답한다.
  ②우리는 '예수교'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찾아 나아간다.
  ③우리는 '장로회 교회'라는 개혁주의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킨다.
  ④우리는 PCK 교단의 총회적 정체성을 적극 수용하고 함께 한다.

(2) 우리의 이름 : "한마음교회"
  ①예수님처럼 하나의 마음(The One of spirit)으로 하늘 뜻을 공경하는 교회 공동체 (예배)
  ②예수님과 같은 마음(Identical spirit)으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 (신앙의 삶)
  ③예수님의 큰 마음(Great spirit)으로 세계와 우리 마을을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 (선교)

(3) 우리의 역사 :
  ①1974년 ~ 2001년까지 : 선교적 교회라는 정체성이나 의식이 제대로 발전할 기회조차 없던 농촌교회
  ②2002년 ~ 2006년까지 : 선교적 교회로의 탈피(脫皮)를 도모한 시기
  ③2007년 ~ 2011년까지 : 선교적 교회로의 변화를 위한 건설적 파격의 시기
  ④2012년 ~ 2015년까지 : 선교적 교회의 기초를 놓은 시기
**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우리 교단(PCK)의 ‘하느님 선교(Missio Dei)론’에 의한 교회론임.

(4) 교회 공동체의 구성 및 사역의 지향과 목회 방향 : “소금과 누룩”
※ 특성 : 우리교회의 정체성 2가지(예배와 선교)를 반영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공동체>
  ①예배 공동체를 위한 구성 ; 모여서 > 내향적 정체성 > 염전(鹽田) 물 가두고 소금 만들기 또는 누룩 띄우기 = 예배와 예수 읽기 / a. 칼뱅과 녹스 이후의 장로회 개혁주의교회 본연의 예배 회복 (개회 > 말씀 > 성찬 > 파견) / b. 예수님을 본받아 따르는 정체성을 1주에 한 번 조율(tuning)하는 시간 / c. 정형화된 예전으로 문맹률이 높은 농촌 노인교우들 스스로 예배의 주체가 되게 함
  ②선교 공동체를 위한 구성 : 나가서 > 외향적 정체성 > 마을에 녹아들기 또는 가루 서 말 속에서 전체를 변화시키기 = 지역사회에서 예수 환호하며 따르기 / a. 주루골 공동 체험농장 : 생명과 치유의 농촌, 체험마을 / b. 자립형 노인 자활 공동체 : 공동 가공센터, 젊은 노년 살기 / c. 푸근한 고향 마을 살리기 : 용서-화해-평화의 마을

(5) 우리의 협동조합 운동
  ①우리는 세계적인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우리의 교회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선교적 소명을 우리 안에 발전시켜 갈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한다.
  ②“한마음살림협동조합”을 “햇살공동체협동조합”으로 재편하고 나아가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발전시켜 명실상부 태안군 남면이라는 지역사회의 사회적 활력소로서 기능하도록 실천한다.
  ③그리하여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그 주변 지역사회를 유기적으로 돕되 드러나지 않는 변화의 동력을 자처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도구여야만 그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고 믿고 꿈을 꾸며 실천한다.
  ④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라는 뜻도 발음도 불분명한 명칭보다 ‘예수교’라는 본래의 명칭을 우리 스스로 되찾아 가는 과정으로,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자들의 공동체로 세워져 가는 과정으로 알고 함께 실천한다.

  지난 2014년 4월 27일 주일, 드디어 우리는 40여 년 동안 지역사회에서 아주 나쁜 교회로 명성이 자자했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감조차 없었던312) ‘남면교회’의 간판을 내리고, ‘한마음교회’ 간판을 그 자리에 붙이면서 ‘우리 교회의 본래 이름은 <남면 한마음 성만찬 예수교회 공동체>’라고 선언했다. 이는 물론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한마음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4.2.1. 태안군 남면의 교회

  우리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저 놈의 교회는 여기 왜 있냐?’는 지역 주민들의 지탄의 소리를 들으며 여기까지 왔다. 물론 그 고통스럽던 역사를 단절하고 한마음교회로 새 출발을 한 그동안의 엄청난 고군분투는 이미 기술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목소리들을 쉽게 잊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교회 밖 세상의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 정말 ‘교회라는 것이 왜 마을 안에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면 고맙고 반가운 소리일 것이지만, ‘교회라는 것’이 지역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무슨 유익은커녕 도리어 사회적인 물의나 일으키고 지역사회 공동체를 해치고 있다면 지역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고 시위해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인즉, 이것은 교회를 등에 업고 지역사회에서 숱한 물의를 일으키며 부정적 존재감을 과시했던 몇몇 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농촌 지역에서 어차피 교인이 될 리 없는 주민들에게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이 이러나저러나 조롱과 냉소의 대상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은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그러니 지역사회 선교사로 보냄을 받은 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이고 또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주인공인 교인 자신들이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 전 만난 귀농인이 아직 한마음교회에 함께 할 여건은 아니지만, 몇 달 전에 남면 소재지의 한 식당에 들러 교회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했다. 이곳에 다닐 만한 교회가 있냐고. 그러자 남면 원주민으로 한마음교회와 논자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식당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 했다. “이 동네에 다닐만한 교회는 없슈. 그런데 저기 한마음교회 목사는 쓸 만하데?!”

  이것은 절반의 진전도 무엇도 아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목사만이라면 아직은 제대로 된 열매를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에 꽤 쓸 만한 목사이기보다 지역사회에서 결코 없어 안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씨름은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이다. 지역사회가 칭송하는 교회가 되고, 함께 하고 싶은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아직 알껍데기를 깨지도 못한 것이다.

오래전 같은 시찰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 후배 목사313)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역사학을 전공한 덕에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틈나는 대로 전국의 유적지나 고찰(古刹)들을 탐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안목이 생겼는데 오래된 어느 마을을 처음 방문할 때부터 그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이 평온하고 살기 좋아 보이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게 보이는 마을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물론 만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나 인상 또는 살림살이들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마을의 풍토나 분위기 때문인데,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유독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을 환대하고 친밀도가 높으며 평온하게 보이는 마을에는 반드시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온 절집이나 교회당이 반드시 있더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세상 곧 이 땅, 지역사회에서 심기고 자라고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으며 자신의 주변 지역의 풍광과 마을의 풍토를 바꾸어 가는 것이기에, 그것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우리는 태안군 남면의 교회여야 한다.

4.2.2. 한마음 예수교회

  ‘하나 됨’에 관련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다음과 같은 인용들로 그 출발점을 지정해 둔다. ‘한마음 예수교회’라는 이 정체성은 특히나 앞으로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막시무스 콘페소르(Maximus Confessor)는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대립자가 아닌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었어야 할 인류’가 아담의 ‘죄’로 인해 ‘개개인이라는 먼지구름으로’ 흩어져버렸다고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근원적인 조화가 파괴되었다는 이 비슷한 생각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된다. 드 뤼바크는 요약하여 말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사안은 재수립하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상실한 일체감을 다시 획득하는 것, 인간과 신의 초자연적인 합일을 재수립하는 것, 아울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합일을 재수립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소유적 실존 양식 곧 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곧 불복종이며 회오(悔悟) → 징벌 → 새로운 굴종으로 특징 지어진다. 존재적 실존 양식 곧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미결의 격리상태(소외)이며 이성과 사랑을 완전히 펼침으로써,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314)

  우리가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한 마음’은 우선 ①예수님처럼 하나의 마음(The one of spirit)으로 하늘 뜻을 공경하는 교회 공동체(예배)이고, ②예수님과 같은 마음(Identical spirit)으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신앙의 삶)이며, ③예수님의 큰 마음(Great spirit)으로 세계와 우리 마을을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선교)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님’은 다석 류영모 선생의 다음과 같은 노래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예 수

살게 할 순 숨님이고 건져 줄 순 예수시고
깊히 고이 햇겨 쉬며 놉히 고디 사리리니
가까워 다다른 자릴 졔계 든든들고맙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갈릴리 숨님(주님)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기에, 위 노래에 바로 이어지는 긴 글이지만 아래와 같이 그대로 남겨 둔다. 이와 같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심성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을 우리는 크게 공감하고 마음을 다해 고이어(현양하여) 춤추며 따르는 우리는 한마음 예수교회가 되어 가야 하고 또 더 많은 우리의 예수 이야기가 나누어지고 또 계속하여 기록되길 바란다.

  “살게 해 주시는 숨님, 바람이라고 해도 좋고, 희망이라고 해도 좋고, 브라만이라고 해도 좋고, 태허라고 해도 좋다. 우리에게 목숨 돌리고 말숨 쉬게 하는 성령의 얼김 없이는 인생의 숨은 하루라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코에 숨이 돌아가고, 몸에 피가 돌아가고, 머리에 생각이 돌아가고, 하늘에 별이 돌아가고, 땅에 물이 돌아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감이, 모두 얼김의 덕택이요, 숨님의 공덕이다. 그래서 살게 할 순 숨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가면서도 돌아가는 데 빠지지 않고 불을 끊고 물을 떠나 자연을 초월하고 이치를 초월하고 몸을 초월하고 마음을 초월하여, 마치 헌 옷을 벗어 던지듯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벗어 던지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사랑하는 인간이 있다. 예수같이 성숙한 인간이다. 인생이 인간으로 성숙해 올라감은 역시 우리 앞에 걸어가신 수많은 어른들이 줄 던져 건져주신 공덕이다.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얼들, 깊이 고이 아껴 인생을 쉬고 높이 고디 인간을 사리우신 고마운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들이 오르고 또 올라 가까이 다다른 인격의 자리는 하느님 계신 게(寶座)와 하느님께로부터 타고난 제게(良心)이다.” 315)

우리는 그 어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만 예수이고 말 그대로 오직 예수이다. 여기에 한마음 예수교의 전부가 있다. 한스 큉은 『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역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정표로 제시하는 것으로 일단의 현재적 문제점들을 진단 분석하는 본 논고의 역할을 한정시키려고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가? 그리스도교는 현대 인본주의나 세계종교나 유대교와 구별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남다른 점인즉 언제나 그리스도 그분, 역사상 나사렛 예수와 동일한 그분이다. 그리스도로서의, 결정적 궁극 척도로서의 나사렛 예수야말로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 그것이다. (...) 되풀이하거니와 그리스도교란, 이론상으로나 실천 상으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의 활성화다. 그리스도교 설계를 내용적으로 규명하려면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누가’ 예수인가를 글자 그대로 다시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핵심을 벗어난 물음이다. ‘그분’이 우리의 척도이지 교회들 교의들 경건한 사람들이 그분의 척도는 아니다. (...) 이들이 얼마만큼 훌륭하냐는 것은 이들이 얼마만큼 그 자신을 떠나 예수를 주님으로 따르도록 부르고 있느냐에 달렸다.’(E. Käsemann)”316)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한마음 ‘예수교회’여야 한다.

4.2.3. 성만찬 밥상 교회

  한마음교회는 이미 4년 전부터 매 주일 ‘말씀과 성찬례’가 함께 있는 온전한 개혁주의교회 본연의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2년 동안 사전 준비를 하면서 기존의 주일예배와 성찬식이 있는 예배를 번갈아 시도한 끝에 당회와 교인들의 선호도를 조사했다. 매 주일 성찬식이 있는 예배를 드리자는 의견이 특히 연로한 노인 교인들에게 압도적이었다. 논자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수십 년씩 교회에 다닌 노인 교인들이지만 일단 ‘예배’에 대한 의식 또는 관점이 거의 전무하여 주일예배는 그나마 교회당에 오지 않으면 ‘께름칙하니까’ ‘점심 한 끼 주니까’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것. 둘째 예배라는 건 목사가 저 혼자 또는 기도‘만’ 청산유수같이 하는 것들과 책을 읽고 노래하는 거라는 조금도 자발성이 없는 구경꾼의 태도. 셋째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 높은 문맹률로 인해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독교 언어'를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교회당에만 출입했던 것. 넷째는 이런 형편에 설교 위주의 기존 주일예배가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 등을 타개해 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우리 교단(P.C.K.) 총회에서는 이미 1977년부터 ‘예식서 편찬위원회’와 ‘예식서 개정위원회’가 설치되어 활동해 왔으며, 지난 2008년 『예배ㆍ예식서 (표준개정판)』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장로회 교회 예배 회복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논자는 한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정장복 교수의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세미나’에 수차례에 걸쳐 참석하면서 존 칼뱅과 특히 존 녹스에 의한 개혁주의교회인 장로회 교회 본연의 예배를 연구하게 되었고, 그 장점들을 살리면서 농촌교회의 여건과 형편을 고려하여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하여 한마음교회에 최적화시킨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예배ㆍ예식서』의 주일예배 8번 양식317)을 채택하여 함께 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우리 교인들은 적어도 주일예배에서만큼은 상당한 변화를 보여 왔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다. 첫째로 중요 순서들 앞뒤에 같은 찬송가를 불러 진행되는 내용을 쉽게 인지하게 하였고, 둘째는 역시 같은 내용의 짧은 기도문을 마련하여 반복함으로 기도 내용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으며, 셋째는 ‘서사적 설교’318)를 통해 성서의 내용이 지금 여기 자신들의 현실 이야기로 들리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네 번째는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하여 정형화된 예전(禮典) 또는 전례(典禮, liturgy)적인 형식에 특히 노인 교인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되도록 하였고,319) 이에 상당한 성과를 보고 있다.


  물론 논자가 한마음교회에서 ‘성만찬’을 중점적으로 두고 있는 이유가 이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만찬이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성육신)과 생애 그리고 수난과 부활, 성령강림에 회중 전체가 각자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공감하고 참여하게 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다. 박재순은 성만찬이 다름 아닌 ‘예수의 밥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밥이 된 예수는 밥의 정의를 이루려고 밥상 잔치를 벌이다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다. 밥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는 이들의 피와 살이 성만찬에서 예수의 피와 살과 함께 내 살과 피 속에 들어온다. (...) 사람들은 밥(희생자, 먹이)을 못나고 천하게 여기지만 밥은 생명이고 말씀이며 그리스도이다. (...) 예수가 자기를 희생하고 우리의 밥이 됨으로써 밥의 정의, 밥의 사귐, 밥상 잔치가 이루어진다. 밥이 된 예수 안에서 서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세워진다. 성만찬에서 예수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내가 하나 되고 이웃과 내가 하나 되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 된다.”320)

  오늘의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화육(化肉)’이 일어나는 의미로서의 성만찬은 그렇기에 매일 매시 연속되는 구원, 우리의 실존과 일상에서의 해방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임재가 재현되는 현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마음교회는 ‘성만찬 교회’로 자처하며 더욱 이 ‘예수의 밥상’을 구현해 가야 한다.

  “예수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밥을 나누어 주면서 이 밥이 내 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정신이나 관념, 우리의 믿음 속에서만 부활한 게 아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예수의 몸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우리의 살과 피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밥을 통해 예수의 몸과 우리의 몸이 연결된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넘어 민중의 삶 속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부활했다. 예수가 육체로 부활했다는 말은 민중의 물질적ㆍ육체적 삶 속으로 부활했다는 말이다. 예수의 성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로써 예수와 한 몸 한 뜻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몸, 예수의 분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한 몸 한 공동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일치의 표징이다. 모든 분열과 단절을 딛고 하나로 되는 것을 상징한다.”321)

또한 한마음교회를 비롯한 농촌교회들이 ‘성만찬 밥상 교회’여야 하는 더욱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아예 마을 자체에 사람이 없는 농촌 지역에 대부분 독거(獨居)하고 있는 농촌 노인들의 경우, 매일 홀로 차려 먹어야 하는 고독한 밥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교회 공동체의 모임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만찬 밥상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하늘을 예배하고, 그리고 공동의 점심 식사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예수 따름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4.2.4. 예수 공동체 교회

  한스 큉은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말하는 종교란 (...) 우리가 개인으로서나 공동체로서나 우주의 배후에 현존하는 영적 실재와의 친교에 이르고 우리의 의지를 이와 조화시켜 자기 중심성을 극복함을 뜻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이건만 우리는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는 것과 거리가 먼 실정이다.”322)

  한스 큉은 행동으로 예수의 일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예수와 사실상 추종ㆍ친교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예수의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추종(追從)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위인들의 제자나 지지자들과 구별된다고 한다.323)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곧 예수 자신이 궁극 목적으로 주어져 있지만, 예를 들어 플라톤 신봉자나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자기 스승에 대하여 그런 주장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훌륭한 사상과 저서들을 남겼지만, 사람들은 그들과의 인격적 유대가 없어도 연구할 수 있고 자신들의 기대를 추종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과 지식이 원칙적으로 그들의 인격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 큉은 예수에 관련된 일들은 그렇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신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과 분리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는 물론 스승이지만 동시에 단연코 스승 이상이다; 예수 자신이 예수의 일을 구체화하는 산 척도다. (...)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시는 것은 막연한 경배나 신비로운 결합 또는 글자 그대로의 모방이 아니라 각자의 실천적ㆍ인격적 추종(뒤따름)이다. (...) 이는 똑같은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됨을, 예수와 영속적 관계를 맺고 자기 삶을 예수에 따라 가꾸어 감을, 다시 말해서 예수와 예수의 길에 동참하여 예수의 길이 가리키는 대로 자신의 걸음을 그런 삶의 길을 걸으라는 참 부름으로, 미쁘게 받아들여 자기 삶의 자세로 삼는 일 하나밖에는 아무 전제조건도 없는 진정한 은총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다.”324)

  우리는 이렇게 한마음교회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교회의 모습’을 찾아내기 시작한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남면, 한마음, 성만찬, 예수 공동체, 교회’는 또 다른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다. “생명 밥상으로 평화 세상을 이루어가는 남면 지역사회의 마을 활력소.”

  이제 이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전히 한마음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아직 막연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해 해내야 하는 일들이라는 것이다.325)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나, 스스로 자신은 누구인가?’이다. 물론 이는 앞으로 한마음교회의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도반(道伴)으로 더욱 성장하면서 또 함께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하는 삶을 통해 계속해서 나누며 발전시켜야 하는 이야기여야 하기에, 다음의 짧은 5장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논자와 한마음교회가 해온 자기 진술 곧 ‘우리는 예수교다!’라는 우리의 자기 선언을 기술해 두려고 한다.



========= 각주

311) 한마음교회 홈페이지는 다음 블로그로 대체하여 사용 중이다. 아래 주소는 ‘우리 선언문’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Z9Wd&articleno=366&categoryId=13&regdt=20160918023538 ( 2017.10.22. 접근)

312) 지난 날 시무 장로였던 이나 개척교인이라고 자처하던 은퇴 전도사 또는 권사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 30년을 넘게 살다가, 10여 년 전 생전 처음으로 교회라는 데를 다니게 된 어떤 교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시집 와서 30년 넘도록 남면에 살았는데 이 좁은 면소재지 안에 교회당이 여기 있는 걸 처음 알았다.”

313) 태안군 태안읍 풍천리 풍천교회를 담임하면서 상당히 모범적으로 교회의 체질을 갱신하면서 또한 마을을 변화시키고 있는 박태권 목사이다.

314) Erich Fromm, 『To Have or To Be』, 차경아 역, 『소유냐 존재냐』 (서울:까치글방, 1996), 171-172.

315) 김흥호, 『제소리』 (서울:도서출판 풍만, 1986), 41.

316) Hans Küng, 정한교 역, 『왜 그리스도인인가 - 그리스도인 실촌의 축소판』 (왜관:분도출판사, 1982), 81.

317) 총회예식서개정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예배ㆍ예식서 표준 개정판』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08),71-82.

318) 또는 ‘이야기체 설교’, ‘설화체 설교’ 등으로도 불린다.

319) 제임스 화이트,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성례전』 (서울: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06), 63-71 참고.

320) 박재순, 『한국 생명신학의 모색』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0), 404-405.

321) 박재순,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서울:도서출판 천지, 1990), 21-22.

322) Hans Küng, 앞의 책, 45.

323)  앞의 책, 316-320 참고.

324) 앞의 책, 319-320.

325) (요 3,16) (딛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