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장 / 3.4.2. 한마음살림협동조합, 사회적기업 - 일용할 생명의 밥상 / 3.4.3. 햇살 가득 체험농장 - 헌신과 구원의 밥상 / 3.4.4. 마을 활력소 - 해방과 정의의 밥상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3.4.2. 한마음살림협동조합, 사회적기업 - 일용할 생명의 밥상
지난 2016년 SBS에서는 “2016 가계금융복지조사”의 결과를 통해 ‘초고령화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노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층 분석하였다. 2016년 올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가계부채 부담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65세 이상 노인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빈곤층으로, 30-40대가 부채에 치이고 있다면 노인들은 빈곤에 아예 빠졌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층의 빈곤율이 46.9%로 이는 근로 연령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만 18세부터 64세의 빈곤율 11%의 4배 이상 웃돌고 있는 수치라고 한다. ‘빈곤율’은 소득을 1위부터 일렬로 세워서 중간 소득의 절반 이하를 버는 비율을 말한다. 노후대비가 잘 되어있다는 가구는 올 3월 기준 전체 가구의 8.8%에 불과했고, 생활비 부족을 호소하는 가구는 10가구 가운데 6가구 이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점이라고 하면서 그에 더불어 ‘저소득 자영업자들’의 실태도 아래와 같이 밝힌다.
“여기다가 노인들 사회 안전망은 사실 굉장히 허술하다. 한 달 수입 1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자영업자가 7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새 빈곤층으로 추락한 자영업자가 더 늘고 있는데 지난해 자영업자의 빈곤율이 12.9%이다. 이는 전체 자영업자 566만 명 가운데 73만 명에 해당하는데 이들의 빈곤율, 중위소득의 절반 이하, 연 소득 1,188만 원 정도 이하를 버는 가구가 빈곤층에 해당하는데. 이 73만 명의 자영업자가 한 달 평균 99만 원 정도를 벌고 있다. 반면 이 자영업자의 평균 부채는 1억 원에 육박해 타 업종 대비 부채가 가장 많았다. 정부의 입장은 이중 70%가 고소득층의 부채라고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대출의 30%, 저소득층과 자영업자 대출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244)
한마음교회는 지난 2015년 8월 마침내 ‘한마음살림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하였고 메주, 된장, 간장, 공동 농사(무농약 들기름, 참기름은 논자의 개인 농사), 옥수수 체험농장, 고추와 육쪽마늘 그리고 텃밭 곡물의 직거래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식용곤충인 식용귀뚜라미 ‘쌍별이’의 대량 사육장을 마련하고 있다. 2016년도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되어 1년간 교육과 현장 코칭에 임하였지만,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진전시키지 못하였고 보다 착실한 준비를 통한 재도전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음살림협동조합 법인을 협업과 협동이 꼭 필요한 귀농인들에게 양도하고 처음부터 다시 ‘사회적협동조합’의 설립을 추진하는 일이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보다 설립 인가가 까다롭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사회적협동조합이 교회의 가치 실현과 그 공공성 유지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열린 연단 - 문화의 안과 밖」이라는 토론회에서 포항공대 이진우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을 해야 하는 전거(典據)를 통찰하면서 토론 중반 이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21세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대성은 무엇인가? 공동체는 무엇이 있는가?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 건강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실천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인식의 틀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는 제3의 길 또는 제3의 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니힐리즘(nihilism)이 아닌 경우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고 토대를 구축하고 공동체의 근거를 세운다는 것은 상당히 필요하다는 생각이다.”245)
논자는 지난 2015년 9월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의 설립 인가증을 받은 직후, “교회와 협동조합” 또는 “교회에서 협동조합을 하려는 이유”에 대하여 개인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게시하였었다.
- “교회에서 웬 ‘협동조합’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2012년은 세계 협동조합의 해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반협동조합' 관련 법안이 발효되었다. 이후 이 협동조합이야말로 '교회'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회운동 중 하나라고 보았고, 지금까지 고군분투, 실로 어렵사리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법인 등기를 마치고 이제 사업자 등록을 앞두고 있다. 참으로 멀고 먼 길을 혼자서 걸어왔다. 물론 이제부터가 시작이기도 하다. ‘교회와 협동조합’에 대하여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전문적인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나는 한 사람의 농촌 마을목회자로서 그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기 훨씬 이전부터 어떤 동기로 교회의 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을 두고 실천하게 되었는가?
첫째로 그것은 나의 목회현장 곧 우리 한마음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채무감 때문이었다. 수십 년 동안 극단적일 만큼 지역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채 상식을 넘어서는 지탄과 욕설의 대상이 되고 있던 우리 교회의 현실 때문이다. 둘째로 그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역사회에 대한 신뢰도 회복하고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이루는 마을’을 만들 것인가?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서로 이해하고 위하고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복음적 삶을 훈련하고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살아있는 교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런 이유로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기독교가 자신의 가치를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며 실현해 가는 매우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운동을 그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을 함께 훈련하는 도구로 보는, 첫째로 그것의 현실적 대안(代案) 정신 때문이다. 비인간화의 벼랑 끝에 도달한 근현대 산업자본주의에 단순히 저항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려는 협동조합 운동은 매우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의 한 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둘째는 그것의 자발적인 협동과 공동체적 실천 때문이다. 사회악이 되는 종교의 함정 중 하나가 실천이 없는 믿음 또는 이론만 무성한 교리 그리고 공동체 정신이 없는 이기적인 집단주의이다. 그러므로 자신들 공통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힘을 모아 그것을 타개하는 실천해 나아가려는 자세야말로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자신이 땅을 파지 않고 다른 이 또는 하느님의 손을 빌려 그 속에 묻힌 보화를 얻으려는 기독교의 행태들이야말로 강도의 굴혈에서나 볼 수 있는 폐단 아닌가. 셋째는 그 구성원들의 주체적 참여 정신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부패하여 하나의 사회악이 되었던 시기를 살펴보면 신자들이 자발적 주체성을 잃었던 때였다. 맹종과 맹신이야말로 종교 자신을 스스로 더없이 추하게 만드는 요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무조건 어떤 초월자를 의지하게 만들려는 종교야말로 교인들을 종속화 객체화시켜 추종자들을 매우 이기적이고 확증 편향적 인간으로 왜곡시킴으로 비인간화의 굴레에 빠지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이들을 넘어설 수 있는 실천 훈련 교재이다.
이처럼 적어도 성서적인 교회라면 이래야 한다는 논의 오랜 목회적 관점으로부터, 그리고 목사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솔선하는 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는 오랜 자각으로부터, 지금 현재 처한 지역사회와 또 한마음교회의 매우 유별났던 지난 역사를 통해 더더욱 이를 실천해 내야만 한다는 과제를 안고서 그 해결 방안을 교우들과 함께 모색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현실적인 일은 협동조합의 온라인 통신판매자 등록과 신용카드결재 사업장으로 등록하는 일 등이 남았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이고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밑바닥에서 견뎌내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어쩌면 이러다가 실패로 돌아가고 빚더미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그러면서 논는 고대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히브리 민중이 매우 자발적인 군중으로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던 ‘시나이산,?금송아지 야훼 축제’를 생각한다. 우리의 협동조합 운동이 그들을 그처럼 고무시켰던 번쩍거리는 금송아지와 같은 것이 되지는 않을지, 방향도 길도 모르는 광야를 앞장서서 걸어가야 했던 모세가 겪었을 두려움이 엄습한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에 ‘갈릴리 예수의 영’이 듬뿍 내려 ‘생활 혁신 축제’로 교회 공동체가 또 한 번 일어났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더욱더 절실한 이유이다.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의 영’으로 인해 자발적인 ‘예수님 공동체 축제’를 벌이게 되기를 갈망한다. 우리 교우들이 과연 그렇게 주체적으로 깨인 민중이 될 그 날을, 그렇게 이 교회 공동체를 함께 가꾸어갈 그 날을 열망한다. 그런 교회 공동체는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금송아지 축제 공동체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협동조합은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힘이 결집 되어 자신들의 새 세계를 자발적 축제로 일구어낼 수 있는 하나의 결정적인 교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자신들의 일용할 밥상을 민중이 함께 스스로 만들어내고 함께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경호 교수는 성서의 일용할 생명의 밥상을 성서에서 발굴해 낸다. (출 16,)을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먹을거리가 넉넉지 않게 되자 이집트에 있을 때를 생각한다. 그러나 고기와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이집트의 밥상’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밥상이었다. 둘째, 전쟁 포로 또는 노예들의 혹독한 노동과 고역이 뒤따른 죽임의 밥상이었다. 셋째는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반생명적인 밥상이었다. 이집트 제국은 전쟁을 통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노예의 수를 늘려서 성읍을 짓고 도성을 건설하였다. 이 속에서 굶주려 죽겠다고 절규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신 하느님이 내려준 ‘만나의 밥상’은 온갖 생명을 위협하는 제국의 밥상을 거부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하늘의 밥상이었다. 하느님이 차려주신 만나의 밥상은 모두가 평등한 밥상으로 모두를 해방하는 밥상이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밥상은 모두에게 알맞은 밥상이며 약자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보호하는 밥상이다.246)
그리고 정경호 교수는 오클로스와 함께 하였던 예수의 ‘오병이어 밥상’을 이야기한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이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불의한 죽음의 밥상에 바로 이어서 예수의 오병이어(五餠二漁)의 밥상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방에서 달려와 모인 무리(오클로스)를 보고,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자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우리가 무엇으로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가?’라며 난색을 표한다. 이때 예수는 다시 묻는다. ‘너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느냐?’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묻는 물음이라고 하면서 이에 정경호 교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복음을 믿고,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 운동 곧 ‘생명ㆍ정의ㆍ평화’의 밥상 공동체 운동이다. (...) 밥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곳이 아니라 밥 속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해방의 뜻을 나누고 동시에 밥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생명ㆍ정의ㆍ평화를 실현해나가는 곳이다. 밥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밥상의 먹이가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또한 밥상의 먹이가 되자는 신앙 운동이기에 이는 교회의 자기혁신 운동이다. 또한 밥상 공동체인 교회는 밥상의 밥을 먹음으로써 하늘의 축복을 먹으며 이웃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밥의 불의’와 싸워나가는 정의 운동이요 해방운동이며, 평화운동이요 통일운동이며, 나아가 세계를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통치 운동 곧 하느님의 생명ㆍ정의ㆍ평화 운동이다.”247)
이런 뜻에서 또한 한마음교회의 협동조합 운동은 밥이 모자랄수록 오히려 함께 나누어 먹음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생명ㆍ정의ㆍ평화의 실질적인 밥상공동체 운동이 되어야 한다. 함께 일용할 양식을 천히 여긴다면서 뒤로는 정작 게걸스럽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는 교리나 이론을 우리는 거절한다.
3.4.3. 햇살 가득 체험농장 - 헌신과 구원의 밥상
논자는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12년부터 공동농사를 시작했고 2015년부터는 직접 한 사람의 농업 종사자로 등록하여 1천 300여 평을 임대, 밭농사를 짓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하에서 1차 농산물의 생산으로 생활할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언론에서 고소득 농민이나 귀농인들을 소개하는 내용에서 ‘연 소득 얼마를 올린다’는 것은 모두 총 매출을 소득으로 둔갑시킨 과장 보도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억대의 연 매출을 올렸다 하더라도 적잖은 영농 비용이나 채무 규모 더구나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임금은 계산하지 않은 허수이다.
「농어민신문」의 한 기사 내용을 인용하면, “농산물 판매값은 떨어지는데 농업경영비는 지속 상승한다. 실질 농업소득 2005년 1천 372만 원에서 2014년 945만 원으로 하락, 도시와 농촌의 격차 1995년 95.7%에서 2014년 61.5%로 격감하고 있다”248)고 한다. 이런 통계들은 넘쳐난다. 그래서 여러 대안 중 급속한 고령화로 농민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농촌 경제 회복의 일환으로 소위 ‘6차 산업’을 도입했는데, 이는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과 가공, 도시 소비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농가소득 문제를 극복해 보자는 정책이다. 사실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지만, 농업소득만으로는 기본 생활비도 얻을 수 없는 오늘의 농촌 현실에서 그나마 농민들이 자구(自求)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249)
그래서 논자는 함께 하는 귀농인들에게 지속하여 자활을 모색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구성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고, 논자가 영농하고 있는 ‘햇살가득체험농장’을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의 사업으로 개발하여 면 소재지의 기관들과 초중학교 학습 진도와 연계한 면 소재지 종합체험 학습장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2016년 ‘사회적기업인 육성사업’에 선정되었을 때 주 사업 계획으로 우리가 제안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현재 설치 중인 식용귀뚜라미 사육장이 완성되면 「기독교 미래 농업 연구소」로 확대하여 신규 귀농인들 특히 청년 귀농인들을 교육하고 자립을 서로 도우면서 연구하는 정의ㆍ평화ㆍ생명의 농촌현장 교육기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은 특히 헌신하고 응답하는 교인들이 함께해 줘야만 하는 일들이다. 그런 물적 인적 자원 부족의 한계로 마지막 실행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여러 번의 기회 앞에서 좌절한 경험이 있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쌍별귀뚜라미 사육장 설치를 서둘러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조금씩이나마 소득이 발생 되어야 한다. 정경호 교수는 ‘한두 사람의 헌신의 밥상’을 통하여 ‘구원의 밥상’이 차려진 성서 속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이 ‘헌신과 구원의 밥상’은 한마음교회가 더욱 주시하고 함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내용이다.
솔로몬 이후 남 유다와 분열된 북 이스라엘은 약 2백 년 동안 무려 8회의 쿠데타로 왕조가 바뀌었다. 그중 오므리-아합-아하시야-요람으로 이어진 기간에 대해 성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사실 오므리는 수도 사마리아를 건축하고 천도(遷都)하였으며 그의 후계자 아합은 시리아의 공격을 격퇴하여 잃었던 땅을 되찾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무역 및 통상을 활발하게 발전시켰다.250) 아합은 용감하고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좋게 기록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또한 엘리야 설화 속에 나오는바 야훼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힌 최악의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왕국 차원의 야훼 종교 탄압을 조종한 베니게 출신의 왕비 이세벨은 아세라와 바알 예배를 보급시켰는데 이로 인해서 야훼 신앙에 대한 위협은 심각했다. 왕실의 그러한 종교 정책에 항거하던 야훼의 집단 예언자들은 발견되는 대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왕실의 이교적 종교 정책은 ‘한 사람’ 엘리야의 신랄한 공격과 저항으로 인하여 타격을 입는다.251)
정경호 교수는 이 ‘한 사람’ 엘리야의 헌신과 그가 마주했던 ‘한 사람의 밥상’을 이야기한다. 수년 내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예고한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요단강 가까이 그릿 시냇가로 숨어 종적을 감추었다. 3년 반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최대의 가뭄으로 그릿 냇물마저 말라버리자 엘리야는 사르밧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그는 남편을 사별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가난한 어머니를 만난다.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밀가루로 빵 하나를 구워 마지막 식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죽기를 기다리려는 이 절박한 어머니에게 엘리야는 자신을 위해 밥상을 차려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엘리야는 이 가뭄이라는 혹독한 사태의 너머를 보는 사람이었고 역사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그 여인이 차려준 ‘섬김의 밥상’은 곧 하느님이 차려주는 ‘구원의 밥상’이 되었다.252)
그리고 신약성서의 ‘섬김의 밥상’과 ‘구원의 밥상’을 이렇게 소개한다. 누가복음서 10장에서 예수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마무리한 뒤 어떤 마을로 이동하여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초청된다. 손님을 맞은 마르다는 ‘환대의 밥상’을 급히 준비하였고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아무 일도 돕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ㆍ종교적 배경을 보면 마리아의 이런 태도는 매우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딸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딸에게 방종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으며 ‘율법을 여인들에게 주는 것보다 차라리 불 속에 집어넣는 게 낫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공공장소에서 예배드리는 일에도 참여할 수 없었던 여성의 신분으로 마리아는 예수의 일행 사이에 앉아 그 가르침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254)
“이런 정황을 참고하여 마르다의 말을 다시 읽어 보면 사실 이는 ‘분주한 자신의 일을 돕게 하라’는 것이라기보다 ‘마리아를 부엌으로 내보내서 마땅히 여자가 할 일을 하게 하라’는 것으로 오히려 동생 마리아를 염려하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이처럼 당시 사회의 관습과 문화 장벽을 뛰어넘는 마리아를 두고 예수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아직 미혼의 젊은 마르다도 부모가 없는 집안의 여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마리아와 마르다의 밥상은 그릇된 당시 사회의 관습을 넘어서는 용감한 여성들이 예수를 맞이한 밥상이었다. 갑자기 맞은 적지 않은 수의 손님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는 마르다는 가부장적인 전통 속에서 사람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의 품으로 섬기고 봉사한 제자였고,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용감하게 최우선으로 선택한 제자였다.“255)
한마음교회와 같은 농촌교회의 현실적인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도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헌신하는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교회 또는 도시의 작은교회 목회자와 가족은 매 주일 시급하게 닥치는 일들에 일단 대처해야만 한다. 교회 전체를 살림하는 교회당 관리집사의 가족처럼 일종의 ‘무한 서비스업 종사자’ 또는 수십 명의 중증장애아동을 돌보며 함께 사는 ‘장애아동복지시설의 보모(保姆)’나 노인요양센터에서 노인 환자들을 돌보는 ‘요양보호사’ 만큼이나 온갖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과로에 동반되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함께 도우려 나서는 교인은 거의 없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에 부응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야 하는 일에 끝끝내 타율적이고 ‘거의 무한 목회 서비스’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 목회 또는 개척은 필패하고 만다. 한마음교회는 작은 농촌교회로서 우리에게도 심각한 이런 문제점들을 깊이 인식하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신앙하며 예수 곁에 모이고 따르며 봉사하는 민중으로 어서 거듭나야 한다. 언제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한 목회자 가정 하나를 무산 희생시키는 일은 어서 단절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설득과 촉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17년 동안 절실히 알게 된 논자는 그런 목회적인 과제들을 위해서라도 협동조합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3.4.4. 마을 활력소 - 해방과 정의의 밥상
마침내 한마음교회는 ‘교회’라는 말보다 ‘마을 활력소’로 불리기를 희망한다. 여기에서 ‘마을 활력소’란 한국일 교수의 <플랫폼(마당)으로서의 교회>를 추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9월 28일, 제102회 총회가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마을) 속으로”라는 주제로써 ‘마을목회’를 선언한 후 부천 노회에서 ‘마을목회 세미나’를 부천 새롬교회(이원돈 목사)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일 교수는 “지역 마을목회를 위한 선교적 교회” 제하의 주제 강의에서 ‘플랫폼(마당)으로서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지역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지역의 다양한 분야와 그에 따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하고 지역을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플랫폼은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 플랫폼은 (...) 첫째 연결기능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만나는 거점으로서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게 하며, 둘째 상호 성장하는 기능이다. 콘텐츠 공급이 수요의 증가에 따라 콘텐츠의 질이 좋아진다. 셋째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넷째 플랫폼의 기능은 지역 교회로 하여금 지역사회와 다양한 방식에서 관계와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256)
그리고 한국일 교수는 그와 같이 플랫폼의 역할을 하는 지역교회는 교회를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다양한 분야의 주민들이 서로 만나고 협력하면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에 자발적으로 섬김과 봉사의 일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교육ㆍ농업ㆍ마을 주민과의 화해ㆍ소외 노인 등 지역사회와 함께하며 필요성에 응하는 마을의 플랫폼 교회로서의 활동들은 매우 다양하다고 말한다.
“70년대 초까지 지역의 교회는 지역의 주민들과 격리되지 않은 동네 교회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주민들도 목회자와 성도들이 한 지역의 주민으로서 친밀한 관계를 가졌었다. 청년들은 지역에 있는 탁구장에 모여 운동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풍금도 배울 수 있었다. 적어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으로 주거형태가 아파트로 바뀌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좁은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지역 교회는 지역성을 상실하고 지역사회나 주민들과도 관계가 단절되고 오직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의 대상으로서 간주하면서 지역교회는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지역 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전환하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것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의 지역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257)
한마음교회는 마침내 이와 같은 지역사회의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일종의 '지역사회의 사회적 기관' 중 하나로 뿌리내려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로 얽힌 채 한평생을 살고 있는 보통의 농촌 지역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해방을 통해 정의의 밥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정경호 교수는 ‘해방의 축제와 정의의 밥상’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유월절의 밥상은 급하게 만들어 먹었던 누룩 없는 빵, 이집트 노예 생활의 쓰디쓴 고통을 떠올리는 쓴 나물과 1년 된 흠 없는 수양, 노예 시절 벽돌을 찍어낼 때 사용한 반죽을 상징하는 견과류와 향료와 포도주를 섞어 만든 반죽 하로셋, 홍해라는 바다를 건널 때를 회상하는 소금물, 그리고 네 개의 잔에 부은 포도주를 온 가족이 함께 마심으로써 음식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축제의 밥상이다.”258) “이스라엘 공동체는 유월절 음식을 통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평생 기억함은 물론 고난과 고통, 억압과 수난의 경계를 모두 함께 무너뜨리고 해방과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향하게 하는 축제의 밥상, 해방의 잔칫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259)
장신대 장영일 교수는 현대의 정통 유대교 유월절 의식 순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260) 먼저 외국인과 나그네, 빈민들을 초대한다 - 키두쉬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며 잔치를 봉헌한다 - 찬송과 첫째 포도주 잔을 마신다 - 손을 씻는다 - 푸른 채소를 먹는다 - 무교병을 반으로 잘라 한 쪽을 아이들을 위해 집안에 숨긴다 - 남은 반쪽으로 무교병의 의미(고난과 가난의 해방)를 설명한다 - 유월절 의미에 대한 네 가지의 질문(①오늘은, 왜 무교병을 먹는가? ②왜 쓴 나물을 먹는가? ③왜 효소를 꼭 두 번 찍어 먹는가? ④왜 식탁 주변에 기댄 자세로 먹어야 하는가?)과 대답을 한다 - 유월절 의미를 설명할 때 온 가족은 각각 포도주를 손으로 찍어 상에 떨어드리며 희생양의 피를 기억한다 - 유월절 양, 무교병, 쓴 나물의 의미를 설명한다 - 찬송과 함께 둘째 잔을 마신다 - 손을 씻는다 - 천을 벗기고 무교병을 반으로 꺾는다 - 감사기도와 함께 소금을 뿌린다 - 다 함께 무교병을 먹는다 - 쓴 나물을 먹는다 -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다 - 쓴 나물을 무교병 조각에 끼워 먹는다(힐렐의 샌드위치) - 유월절 정찬을 배설하고 감사기도와 함께 식사를 한다 - 감추어 둔 무교병 조각을 아이들이 찾는다 - 식후에 셋째 잔을 마신다 - 엘리야의 잔에 포도주를 부어 손에 든다 - 주모가 바깥문을 열고 등불을 켜 엘리야의 도래를 기대한다 - ‘할렐’을 함께 부른다 - 넷째 잔을 들고 축사한 뒤 마시며 마무리한다. 이는 축제로 함께 하였던 ‘해방의 첫 번째 밥상’을 후손들에게 잊지 않도록 가르침으로써 공동체의 와해를 막고 건실하게 발전해 나가려는 노력 중 하나이다.
또한 정경호 교수는 그와 같은 해방의 밥상과 함께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해 주는 다니엘의 ‘정의의 밥상’도 이야기한다. 고대 이집트 제국에 대한 히브리 사람들의 저항과 해방인 출애굽 축제와 해방의 밥상 공동체 정신은 이후 강대국들의 틈에서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길고 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거쳐 구약-신약 중간시대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구-신약 중간기(中間期)’(intertestamental period)는 포로의 귀환과 성전의 재건 이후 헤롯 성전의 파괴(E.C. 70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고대 근동 지역이 페르시아제국(BC 400~BC 331)과 헬라제국(BC 331~BC 63) 그리고 로마제국(BC 63~70) 등 강대 제국들의 흥망과 경쟁으로 고대 근동지역의 역사가 요동친 기간이다. 그리고 70인역(LXX) 성서 번역, 헬레니즘과의 대결, 안티오쿠스 4세(Antiochos Ⅳ Epiphanes: B.C. 175~164)의 집권과 박해, 마카비 저항과 하스몬 왕조, 토라(Torah) 중심의 유대교와 바리새 사두개 에쎄네 젤롯 파와 특히 묵시(默示)문학의 인자(人子) 사상이 등장한 시기이다.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강력한 그리스화(化) 정책은 유대 민중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안티오쿠스는 한발 더 나아가 유대교를 소탕하기 시작했다(B.E.C 168).261)
그 잔혹했던 유대교 파괴는 매우 유명하다. 희생제사와 할례, 안식일, 절기 등을 일절 금지하고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했으며 토라를 찢고 불살랐고 돼지고기 섭취와 우상 제단 제사를 강요하였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뜰 제우스 제단을 건립했고 나아가 자신의 신상을 세워 마침내 마카비 저항을 촉발시켰다. 이 당시의 이야기가 외경 마카비 1, 2서와 다니엘서에 담겨 있으며, 특히 (단 11,31)의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바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신상을 가리킨다.262) 이 극렬했던 시기에 1차 포로로 바빌로니아에 잡혀가서 바벨로니아와 메데 왕조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 때의 전설적인 인물 다니엘이 소환되어 기록으로 남겨진다. 정경호 교수는 이 다니엘이 제국의 왕이 차려 준 산해진미의 밥상 곧 ‘불의한 제국의 밥상’에 타협하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정의롭고 거룩한 밥상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263)
해방과 정의의 밥상은 한마음교회가 우리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실천으로서 반드시 실현해 내야 하는 일이다. 우리 지역사회는 지난 5~6년 전까지 주민들 간에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였고, 상호 불륜으로 인한 가정 파탄, 고부 갈등 등으로 농약 자살하는 노인들이 해마다 한 두 차례씩 나올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의 공동체성’이 거의 무너진 지역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각했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현저히 변화되었는데 면 소재지 공동화 현상으로 급격히 인구가 줄어든 이유도 있지만 6년 전에 새로 마을 이장을 맡아 연임하고 있는 한병희 이장의 리더십과 역할이 상당히 기여한 이유이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기존의 부패한 리더 십의 세대교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마침내 우리 마을 주민에 대한 상습적인 소송 남발로 매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던 이들 대부분이 마을 일에서 퇴진하게 되었고, 그동안 우리 면 소재지에서 일종의 ‘퇴폐 위락업소’로 성업하던 무려 4개의 ‘다방’이 모두 폐업하였다. 금송아지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특히 교회는 더욱 다니엘의 정의롭고 거룩한 밥상을 따라 실천해야 한다.
부천 새롬교회 이원돈 목사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작지만 영향력 있고 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개 교회 목회를 넘어서는 마을 생명망을 짜는 생명 목회’를 제안한다. 작지만 건강한 교회란, 지역 생명망을 짜는 교회로서 성장제일주의 대형교회를 닮은 작은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교회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작은교회라고 하면서, 지역사회의 복지 생태계, 학습생태계, 문화 생태계를 형성하며 마을 만들기,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생명 사회적 경제를 추구하는 공공신학을 자신의 신학으로 삼는 교회라고 한다. 미래교회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 마을 중심, 성장 중심이 아니라 봉사 중심으로 ‘작지만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교회와 목사는 교인과 교회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마을 단위의 교회와 목사, 지역사회에 선한 관계와 영향력을 가진 교회와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264)
논자는 이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혹시 모를 ‘용어의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해 둔다. ‘작지만 영향력이 있는’이라는 말과 ‘힘 있는 교회’라는 말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를 파탄 낸 주범인 ‘승자 제일의 기독교 패권주의’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자신이 지역사회 곧 마을을 정복 점령하겠다는 식의 소위 ‘성시화 운동’이 아니다. 무슨 소리도 또 드러나는 현상도 없는 소금처럼 마을과 지역사회에 녹아들어 ‘그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맛이 나게’ 하는 영향력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마음교회는 해방과 정의의 밥상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약자를 돌아보며 억울한 이가 없게 하는 정의 곧 공평하고 공정한 재판, 성서의 ‘체다카’(צדק - 공의/公儀, 공평/公評)과 ‘미쉬파트’(משׁפט - 정의/正義, 공정/公正)에 복무하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갈릴리 예수를 따라 주체적으로 해방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협동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 각주
244) SBS TV, “노인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50%가 빈곤층”, <박진호의 시사전망>, 2016.14.24.
http://v.media.daum.net/v/20161224105503507?f=m#none (2017.10.18., 접근)
245) 위 토론회 동영상은 한마음교회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ckaskan1/445 (2017.10.24. 접근)
246) 정경호, 앞의 책, 44-60 참고.
247) 앞의 책, 142-143.
248) 「농어민 신문」, 2015년 11월 3일 자 기사, “농사만 지어선 최저생계 조차 불가…농정 패러다임을 바꾸자”.
http://m.agrine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161 (2017.10.24. 접근)
249) 이에 대하여 국가적인 대안 정책으로는 농민 자격제도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하는 등의 독일식 대안이 매우 훌륭해 보이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실행되기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한 진술은 생략한다.
250) G. W. Anderson, 김찬국 역,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3), 113.
251) 앞의 책, 114 참고.
252) 정경호, 앞의 책, 88-101 참고.
253) (요 11,)은 이 마을이 ‘베다니’였고 죽은 지 나흘 만에 부활을 경험한 나사로가 이 자매의 형제로 나온다.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도 역시 마리아보다 마르다가 더 적극적으로 예수를 영접한다.
254) 정경호, 앞의 책, 166 참고.
255) 앞의 책, 170.
256) 「예장뉴스」 2017년 9월 28일 기사, “부천노회 약대동 마을목회세미나와 마을 탐방”.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3 (2017.10.24. 접근)
257) 앞의 기사.
258) 정경호, 앞의 책, 61.
259) 앞의 책, 64-65.
260) 장영일, “유월절과 이스라엘의 정체성 의식” (장신대 총동문회 동문회보 제 44호/2004년 7월호)
261) D. S. Russell, 임대수 역, 『신구약 중간시대』 (서울:컨콜디아사, 1982) 참고.
262) 앞의 책, 29.
263) 정경호, 앞의 책 102-114 참고.
264) 이원돈, “지역 연합 정신(Local Ecumenism)에 기초한 생명망(Web of Life) 목회”, 박사학위논문 (갈릴리신학대학원, 2014), 77-9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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