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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제 3 장 성서의 밥과 밥상 공동체 - 3.4. 3.4.1.

by 농민만세 2020. 7. 19.

 

[ 제 3 장 / 3.4. 정경호 교수의 '생명 밥상신학' / 3.4.1. 마을목회, 귀농인 목회 - 사랑과 환대의 밥상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3.4. 정경호 교수의 ‘생명밥상신학’

  앞에서도 기술하였거니와 이러한 JPIC 신학에 근거한 ‘밥상공동체 운동’은 한마음교회처럼 지역사회 선교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전무한 농촌교회에서 지금 바로 교회가 함께 나아갈 방향을 잡고 한 발자국씩 실천해 볼 수 있는 가장 성서적이면서 또한 가장 실질적인 방안이다. 나아가 하루하루가 절박한 농촌교회의 현장에 필요한 것은 어떤 신학적 이론만이 아니라 당장 이번 주일부터 교인들과 함께 읽으면서 공감하고 서로 마음과 손을 맞잡고 실천할 수 있는 지침서이다. 기존의 ‘잠자는 교회’에서 이제는 ‘사라져가는 교회’가 된 농촌교회를 일깨워 선교적 교회로 살아나 자신의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진 논자는, 2012년 2월쯤 정경호 교수가 한국기독공보에 ‘생명 밥상 칼럼’으로 연재하였던 내용에 고무되었던 차에 그 연재 칼럼들을 묶어 『성서를 통해 맛보는 생명의 밥상 평화의 세상 (서울:기독교서회, 2013)』으로 이미 그다음 해에 엮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적잖이 놀라고 안타까웠었다. 논자는 이 책을 우리 마을목회 활동가들이 자신의 교인들과 함께 읽으면서 실질적인 ‘생명 밥상공동체 운동’을 펼치는 공동체 교회 세우기의 필독 교재로 크게 환영하고 추천한다.

  정경호 교수의 ‘밥상 공동체론(論)’은 지금까지 기술해 온 일련의 밥상공동체론들과 달리 교회들의 현실에 매우 가까이 밀착된 현장성과 함께 그것을 성서 속 이야기들로부터 읽어내 체화시키는 ‘현장 목회 신학화’의 이정표이다. 정경호 교수의 밥상공동체론 곧 생명밥상신학은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화 세상을 만드는 생명밥상론’이다. 때로는 불의하고 위험한 로마 제국의 밥상을 그대로 따르고 흉내 내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혹독하고도 엄중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근본적으로 그런 세상 곧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펼쳐지고 있는 그 세상에 대한 목회적 안목을 현장의 목회자들이 잊지 않게 일깨워준다. 그의 생명밥상신학에는 ‘주변부’로 보내는 따뜻한 시선 곧 현장을 매우 잘 알고 깊이 헤아리는 신학자의 사려 깊은 시선이 있다. 이 책에는 소위 ‘밥상공동체론’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논문과 서술들 그리고 그런 책들과 비교하여 바로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 곧 현장에 대한 ‘손 내밂’이 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성서의 손 내밂’을 성서 본문들과 사건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최상의 모범 답안을 보여준다. 중심부로부터 언제나 소외되어 존재하는 농촌의 마을들과 도시의 좁은 골목들 속으로 녹아들기를 원하는 작은교회들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그리고 성서의 이야기들에 뿌리를 둔 안내서를 갈망하는 선교적 마을목회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선교적 목회현장 속에 지속적인 변주(變奏)를 해내는 마을목회와 밥상공동체운동을 위한 성서 읽기를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이 책에 녹아 있는 정경호 교수의 ‘성서적 생명밥상론’은 이처럼 마을목회 활동가들에게 성서 읽기에 대한 현장 감각과 영감을 자극하기에 그것은 가장 현장에 가까운 밥상공동체론이다. 성서에서 교인들과 함께 읽어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치밀한 이론이라 하더라도 정작 교회를 깨우치고 실천을 촉구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무슨 신학적 논증이라 해도 그것이 오늘의 교회와 괴리되어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 가치가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정경호 교수가 촉발하여 주는 성서 읽기의 방향과 영감을 따르면, 성서 전체를 풍성한 ‘생명 밥상공동체’의 이론서요 각자의 마을목회 운동의 지침서로 삼고 만들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만나는 정경호 교수의 ‘생명밥상신학’은 위에서도 기술하였거니와 무엇보다도 따뜻한 영성과 실질적인 목회적 관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 사회와 한국인이라는 목회적 현장에 대한 사려 깊은 공감과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이유로 정경호 교수의 ‘생명밥상 평화세상론’은 논자에게 있어서 부정의 신학에서 긍정의 신학에로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함께 ‘따뜻한 민중신학의 길 곧 목회현장에 차분히 적용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민중신학의 길을 발견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경호 교수의 ‘생명밥상신학’은 이 세상을 향하시는 하느님의 열심(사 9,7; 요 5,17)을 따라 우리의 세계를 바로 읽어내는 건강한 신학적 성서적 안목과 함께 응당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세상에 대한 공공의 의무들을 폭넓게 알도록 일깨워준다. 우리의 땅이 아닌 하늘에 있는 하늘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무엇일 뿐이다. 그런 하늘을 제아무리 이야기한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상이 귀 기울일 리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을 변화시키고 있는 하늘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기술이다.


  정경호 교수는 이 책에서 성서에 나타난 다양한 ‘밥상들’을 논하면서 실로 평화와 생명의 밥상이 비록 농촌의 작은교회인 한마음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통하여 그 주변의 마을들에 차려지고 나누어짐으로써 마침내 아시아의 농촌들과 온 세계에 알려지고 전해지기를 기대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대단히 보잘것없어 보이는 극동이라는 열강의 ‘주변부(Marginality)’인 한반도에서 일어난 소박하고 정이 넘치던 초기 한국교회의 밥상공동체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모든 악습과 구습을 타파해나가는 교회였다. 특히 양반과 종,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소년 등의 차별을 뛰어넘어 함께 밥을 먹었던 평등의 공동체 곧 밥상 공동체였다. ‘음식이 복음이다’는 말도 있듯이 음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오묘한 사랑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참뜻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음식 복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음으로써 엄마를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음식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229)

  논자에게는 한마음교회에서 그동안 꿈꾸고 갈망하면서 도전하고 실천하며 찾아온 몇 가지의 지역사회 선교에 대한 미완의 과제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마을 주민과 귀농인들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목양(牧養)의 일이며, 둘째는 한마음살림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창업이고, 셋째는 체험학습농장을 통한 양생(養生)학교 프로그램, 그리고 넷째는 마침내 ‘지역사회 또는 마을 활력소’로 교회를 바꾸어내는 일 등이다. 적지 않은 실패들을 연속으로 경험하면서 꾸준히 실천해 가고 있는 이러한 비전들에 대하여 논자는 정경호 교수의 ‘생명밥상신학’ 곧 ‘생명밥상 평화세상론’의 정신과 성서적 근거를 따라 실천하고 변주해 나가려는 시작들을 여기에 정리해 둔다.

3.4.1. 마을목회, 귀농인 목회 - 사랑과 환대의 밥상

  한마음교회는 현재 환대의 밥상을 마련하여 초대하여야 하는 두 부류의 나그네 ‘사람들’을 본다. 하나는 남면 지역에서 이미 수십 년 동안 농민으로 살아온 마을 주민들이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90세가 넘어도 ‘바로 죽지 못하고’ 결국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처지가 되어 마침내 읍내의 노인요양병원에 들어가는 일로 주민들은 그것을 ‘노인병원 고려장’이라고 한다. 온종일 함께 대화할 상대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자택 고려장’은 그에 비해 복 받은 거라고 한다. 논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적어도 전국의 면 소재지에 있는 교회들이 사회 봉사적 차원에서 소규모 노인요양센터를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수년 전 노인 요양보호사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 남면 지역에도 예닐곱 곳의 요양보호사 파견센터가 생겼었지만, 사실상의 수익을 낼 수 없게 되자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교회와 같은 종교 기관은 수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최소한의 손익분기점만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소규모 사회 복지시설을 운영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목회자와 교인들의 신앙 의식과 실천 의지의 문제다.

  우선 하나는 ‘주간보호센터’로 교회 시설에 마련한 센터에 모여 노인들에게 유익한 건강 교실, 심리치료 등을 진행하는 사회적 기관으로 일정 규모의 시설이 갖추어지면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각종 의료 보조기구와 치료사 및 간호사들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야간보호센터인데 노인요양병원보다 직급이 낮은 종일 노인보호시설이다. 하지만 경영상 농어촌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시설이 요구됨으로 ‘노인 공동홈’이라는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30여 평의 주택에 10명 이내의 노인들이 모여 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제도로 이 역시 시작을 하면 지자체로부터 각종 지원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12년 겨울, 한마음교회는 교회당을 이전하여 리모델링을 할 때,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1층을 예배당 겸 노인 공동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하지만 ‘노인들이 모여 살다가는 오히려 서로 다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계획을 미루고 말았다. 결국은 사람이 먼저 성숙하여 서로를 ‘환대하는 밥상’을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기회였다.

  논자는 부천 새롬교회(/이원돈 목사)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회적 심방’ 사역을 농촌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기 위해 ‘사회적 심방팀’을 조직해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원돈 목사는 「에큐메니안」의 ‘이원돈 칼럼, “생명망 목회의 영성: 사회적 기도와 심방”'에서 ‘사회적 생명망(網)’을 짜는 사역을 지역 교회들이 해야 하는데, 그것은 ‘미래 목회에서 교회 회중은 단순히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잃은 양을 돌보는 목양은 안수받은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상호 참여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목양이란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관계를 성숙시켜가는 일이고, 이 돌봄의 관계망을 통해 서로 돌보고 보듬으며 공동체 내의 온도를 높여 나가는 일이며, 결국 영적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가 현재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평신도를 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는 개인적 영성을 넘어 사회적 공적 영성에 입각하여, 하느님의 사회적이고 공적인 미션을 수행하는 공공의 영성을 실천할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원돈 목사는 이러한 공적인 미션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영성 생활의 중요한 출발점은 바로 사회적 기도와 사회적 심방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230)

  “사회적 기도와 사회적 심방은 단순히 기도하고 방문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와 심방이라는 영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삶과 교회의 삶, 마을의 삶이 성서적, 영적 통찰력으로 새롭게 읽혀지며 나누어지며, 가정과 교회, 지역 전체가 영적 생명 망으로 짜여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해야 한다. (...) 우리가 심방하는 가족이나 이웃 중에는 1)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분이 있다. 그러한 분들에게는 우리는 물질적, 복지적 생태계를 만들어 드리고 도움을 드릴 필요가 있다. 2) 도움을 받으실 사회적 관계망이 부족하신 분들에게는 그러한 상담과 기관, 도우미들을 연결하여 돌봄의 관계망을 찾아 드리려 한다. 3) 신앙적 위로와 격려 그리고 기도와 같은 영적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계시면 교회로 모시고 오는 전도를 할 수 있다.”231)

   한마음교회가 환대해야 하는 또 한 부류의 나그네는 귀농 귀촌인들 또는 농촌을 찾아오는 도시 이주민들이다. 수년 전에만 해도 우리 지역에는 해외 이주민 곧 혼인 이주 외국 여성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지금은 그나마 혼인이 늦어진 미혼의 농촌 남성들이 없어진 터라 외국 이주민이 더는 생기지 않고 있다. 귀농 귀촌인 곧 도시 이주민들에 대한 따뜻한 환대의 밥상을 마련하고 초청하여 사회 공동체적인 안전을 함께 누릴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그들을 환대하게 하는 교회로 더욱 변화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다시 한번 언급해 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한마음교회의 교인들이 주체적이고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낸 ‘예수의 오클로스’로 변화되는 일이 우선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은퇴자의 30%가 5년 안에 빈곤층으로 추락할 것을 예상한다”고 발표하였다. 현재 1차(1955~1963년 / 704만 명), 2차(1964~1970년 / 670만 명), 3차(1971~1975년 / 474만 명)에 걸친 ‘베이비 붐 세대’ 약 1천8백 5십만여 명의 연차적인 은퇴가 예정되어 있다. 특히 이 중에서 1차로 은퇴를 앞둔 세대가 현재 전체 인구의 14.6%를 차지하는 거대 인구 집단인데, 이들의 은퇴가 현재 코앞에 다가와 있다. 이들을 정책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1) 이들의 은퇴로 노동력 감소, 재정 건전성 악화 등 경제 사회적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며, 2) 자녀 교육에 소진한 이들의 풍족하지 못한 자산은 노후대비 부족으로 고령 빈곤층으로 전락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3)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이들의 시장 영향력이 증가될 것이라는 점 등이다.232)

  그런데 지난 2017년 11월 17일 오후 2시, 태안 군민체육관에서는 각계각층의 태안군민 210여 명이 한데 모여 ‘태안군의 미래 발전 방향’을 주제로 하는 「태안군민 원탁토론회」가 있었다.233) 이 자리에서는 사전에 조사한 내용에 대한 분석결과234)가 먼저 발표되었는데, 태안군 거주에 대한 삶의 질 조사 문항에서 건강하고 평온한 삶을 보장하는 자연환경을 이유로 긍정적 답변이 가장 많은 27.72%였고, 다음으로는 도시형 인프라 부족으로 부정적 답변이 17.82%, 그리고 세 번째로 많은 답변이 변화가 느린 행정 서비스가 12.87%였다. 그런데 이 답변 중에는 ‘이주민-원주민 간 갈등 조정 미흡’이라는 내용이 있었으며 이는 귀농 귀촌인의 급증으로 인하여 농어촌지역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그대로 반영된 답변이었다. 대다수의 귀농 귀촌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는 귀농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원주민들과의 갈등이며 마찰이다. 

  지난 2015년 10월 8일 논자의 제안으로 추진하여 한마음교회당에서의 첫 모임으로 결성된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는 2017년 11월 현재까지 회비를 납부하며 활동하는 47명의 회원이 있다. 연중 정기 모임은 격월로 친교 모임과 봄가을 연 2회의 산행, 그 외에 각자의 재능 기부를 통해 서로 돕고, 협업의 필요를 절감함에 따라 수시로 모여 토론과 봉사, 품앗이 등을 시행하고 있다. 이들은 ‘귀농 귀촌인’이라는 공통분모로 서로의 친밀도가 급격히 높아져 자신들이 귀농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나누고 있는데, 가장 많은 공통의 경험이 바로 ‘원주민들의 배타성으로 인한 갈등’ 곧 ‘원주민들에 의해 상당한 재산상 또는 정신적인 피해를 보게 된 일들’이었다. 2015년 태안군 농업기술센터 귀농인 농업대학에서 “태안군 및 태안군 농업의 현황과 이해”라는 강의를 맡은 박영호 연구원은 ‘태안군민의 가장 큰 특징이 타 지역민에 대한 배타성과 텃세’라고 하였다.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 모임을 통하여 알게 된 기독교인 귀농 귀촌인들은 전체 귀농인 중 2/3 정도인데 특히 남성 귀농인인 경우 이들 대다수가 기성 기독교의 문화나 행태 등에 실망하여 냉담하거나 적대시하면서 ‘교회를 졸업한 가나안 교인들’이다. 이들을 다시 그들이 사는 마을 인근의 교회로 논자가 상담과 함께 안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과 1~2년 후에는 그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경우를 본다. 이유는 기성 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 때문이었고 특히 수십 년 거주한 곳을 떠나 전혀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온갖 문제에 부딪히는 귀농인들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이해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타지역 특히 도시민에 대한 이러한 배타성은 농촌에 남아있는 주민들의 일종의 패배주의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인다. 함께 거주하는 주민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고 공동화된 마을에 남겨진 주민들은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행렬에 오르지 못하고 남겨졌다는 일종의 사회적 패배감이 적잖기 때문이다.

  논자와 한마음교회는 물론 이 부분을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환대의 밥상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밥상이며 그것은 패배자요 소외된 자요, 시대에 뒤처진 자라는 자기 소외로부터 해방되어 지역사회와 교회의 주체적인 민중으로 거듭나 가는 과정에서 내놓을 수 있는 밥상이기 때문이다. 지난 17년 동안 논자와 한마음교회는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유입되는 교인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다니고 있던 교회들로부터 많은 실망과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또 대부분은 교회의 자발적인 일원으로 활동한 적이 거의 없거나 아니면 필요 이상의 타율적 요구로 어떤 심리적 강박(complex)에 대한 방어기제가 지나쳐서 한마음교회에 연착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마음교회는 자신의 지역사회만이 아니라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를 찾아오는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를 넘어 교회가 응답해야 하는 선교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선교적 요청으로 한마음교회는 정경호 교수의 ‘사랑과 환대의 밥상’을 주시해야 한다. 정경호 교수는 우선 창세기의 ‘에덴의 밥상’이야말로 하느님의 우주적인 사랑 곧 하느님이 일하는 노동자요 농부 하느님으로서 친히 차려주신 밥상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종말론적이면서 또한 실존론적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는 원형으로서의 밥상이라고 말한다. 에덴의 밥상은 ‘지역 농산물’235)로 차려진 밥상이요, 하느님의 우주적 사랑을 맛볼 수 있는 밥상이며,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기쁘고 좋은 생명ㆍ정의ㆍ평화의 밥상이다. 서방에서는 자연을 선물로 주시고 관리하시는 ‘정원사 하느님’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친히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 생명ㆍ정의ㆍ평화의 물을 대시며 농사를 지어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농부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이 만드신 첫 마을과 첫 사람들이 숨을 쉬며 살았던 에덴동산은 생명ㆍ정의ㆍ평화가 풍성한 마을이었지만, 오늘처럼 생명을 먹을거리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생명 죽임의 먹을거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닌 존귀한 하느님의 형상이 부서지고 있는 때도 없다고 하면서 정경호 교수는 오늘 우리의 생명을 잃은 밥상에 비견하여 하느님의 ‘생명의 밥상’이 절실하다고 말한다.236)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선물로 주신 귀한 생명 살림의 먹을거리에 대해서 오늘날처럼 불신한 적도 없다.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먹을거리, 온갖 농약으로 점철된 탐욕의 먹을거리, 성장호르몬과 항생제로 뒤범벅이 된 온갖 고기류는 하느님의 선물인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 오늘도 가난하고 병들고 신음하며 절규하고 있는 이들 속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모두 그들이 풍성한 생명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똑같이 기뻐하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밥상을 나누고 먹는 세상, 생명ㆍ정의ㆍ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야만 한다.”237)

  “이러한 하느님의 생명ㆍ정의ㆍ평화의 동산을 회복하는 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처럼 친히 자신의 밥상에 올리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부가 되어, 밭을 갈아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가꾸면서 작은 식물 하나에게서 생명ㆍ정의ㆍ평화의 영성을 배워나가는 데서 시작한다”238)

  나아가 정경호 교수는 이처럼 하느님이 친히 노동을 통해 차려내는 사랑의 밥상에서 비로소 ‘환대의 밥상’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부름을 따라 광야를 떠도는 하비루가 되어야 했던 아브라함의 밥상을 통해서 강조한다. 그것이 갈대아 우르의 정착민으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광야로 불러내 하비루(히브리)가 되도록 한 하느님의 의지(意志)였다고 한다.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신 10,18-19) 그러므로 ‘환대의 밥상’이란 지극히 작은 자들은 물론,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보낸 선물로 여기고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대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고대 유목민의 ‘환대의 문화’는 생존의 필수 요건이었는데, 특히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나그네나 홀로된 여성, 부모 없이 살아가는 고아들을 대접하는 규례를 계약법에 넣어 엄격한 규범으로 지키게 하여 생소하고 낯선 나그네들을 따뜻한 밥상으로 환대하였다. 그들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였으며 심지어 손님의 가축도 돌보아 주었다.239)

  “고대 이스라엘이나 중동의 문화에서 볼 때, ‘음식은 환대의 표현’이며 ‘환대는 음식과 신앙이 만나는 접촉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환대를 의로운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신약성서 학자인 존 코닉(John Koenig)은 그의 책 『환대의 신학』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교회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나간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환대의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적 환대는 매우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 중 하나가 틀림없다.”240)

  아브라함은 무조건 나그네들을 환대한 것이 아니라 낯선 이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고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대접한 것이었다. 성서는 그 나그네 중 한 사람을 하느님의 현현(顯現)으로 묘사하는데 아브라함은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였고 주인으로서 손님들이 먹는 동안 그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마련한 환대의 밥상의 절정은 손님들을 위해 사용한 연한 송아지 고기와 함께, 고운 밀가루 세 스아 곧 가루 서 말로 만든 빵이었다. ‘가루 세 스아(סאה)’를 요즘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21ℓ(=21kg)241)로 무려 1백인 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이 사실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 단지 세 명의 손님만을 위해 차린 밥상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식솔(食率) 공동체 전체가 함께 벌인 밥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경호 교수는 ‘환대의 밥상’이 필요한 오늘 우리 사회의 그늘진 이웃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 안에 존재하는 600만 명 이상의 비정규직, 100만 명 이상의 청년 실업자, 조손 가정 및 홀 부모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 가난한 홈 리스와 독거노인, 가난한 농촌지역, 북한 이탈주민과 북녘의 절대 빈곤의 형제자매들,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 등도 우리가 환대해야 할 낯선 나그네들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환대의 삶을 살도록 긴급하고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데, 전쟁과 난민, 생명 파멸과 빈곤,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 등이 그것이다.”242)

  정경호 교수는 나아가 다음과 같이 “환대의 신학 삶”을 역설한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을 접대하여 환대의 밥상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하게 밥을 먹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며 그들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 우리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나눔과 섬김의 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을 초청하여 따뜻한 사랑의 환대의 밥상을 나눈다는 것은 하느님을 나누는 것이요 그리고 그들의 신음과 고통과 절규를 치유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느님을 맛볼 수 있는 복음의 길을 만드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243)



========= 각주

229) 정경호, 『성서를 통해 맛보는 생명의 밥상 평화의 세상』 (서울:기독교서회, 2013), 6-7. (참고):정경호 교수는 이 책에서, 농부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맛보는 에덴의 밥상, 아브라함의 환대의 밥상, 광야에서의 만나의 밥상, 출애굽의 축제의 밥상, 룻의 풍성한 밥상, 사르밧 여인의 섬김의 밥상, 다니엘의 거룩한 밥상 등 구약성서의 생명 평화의 밥상들과 세례자 요한의 절체의 밥상, 오병이어의 생명의 밥상, 주 기도의 일용할 밥상, 마리아와 마르다의 헌신의 밥상, 삭개오의 회개의 밥상, 사도행전 초기교회의 비빔의 밥상, 성만찬 예수의 구원의 밥상 등 신약성서의 생명 평화의 밥상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성서와 함께 세상을 바로 읽고 실천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230) 「에큐메니안」, “생명망 목회의 영성: 사회적 기도와 심방”, 2015년 6월 25일 자 기사.
http://www.ecumenian.com/news/replyView.html?idxno=12188 (2017.10.24. 접근)

231) 앞의 기사.

232) 「조선비즈」, “58년 개띠에게 어느날 닥친 위기”, (2012.12.13. 기사 발췌)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4/2011102400356.html (2017.10.18. 접근)

233) 관련된 상세한 소식은 아래의 태안군 대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taean.go.kr/prog/wontak/kor/sub02_04_05/write.do (2017.11.18. 접근)

234) 태안군민 원탁 토론회 자료집(미 간행 : 다운로드) 참고. 2017.10.30.~11.7.(9일간) 토론회 참가 예정 군민에게 사전조사, 총 300명 중 202명 응답(67.3%), 1)조사내용 : 태안군의 생활환경, 지역산업, 환경, 공동체 등 4개 분야의 아쉬운 점을 진단하고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 2)조사방법 : 전화조사원 및 서면을 통한 개방형 설문조사 3)분석방법 : 개별 의견의 키워드 추출을 통한 상향식 구조화 4)조시기관:코이라스픽스,
http://www.koreaspeaks.or.kr/

235) ‘지역 농산물’(local food)이란, 일반적으로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은 지역농산물로, 흔히 반경 50km 이내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칭한다.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확보하자는 '로컬푸드 운동(local food movement)'은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이는 농장에서부터 식탁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줄여 비교적 좁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농식품 수급 체계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통해 먹을거리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환경적 부담을 경감시키며,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사회적 거리를 줄여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이다. 이는 우리의 몸에 최적화 된 지역의 땅과 물과 공기 속에 있는 유용 미생물을 이용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정부에서도 지난 2016년에 ‘지역농산물 이용촉진 등 농산물 직거래 활성화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을 제정하여 시행 중이다. 인간은 ‘최고의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에덴 곧 ‘로컬 밥상’을 상실하면서 결국 자신이 나온 땅과 불화하게 되었고, 참 사람의 모습과 생명을 잃게 되었다.

236) 정경호, 앞의 책, 13-28 참고.

237) 앞의 책, 27.

238) 앞의 책, 28.

239) 앞의 책, 29-43 참고.

240) 앞의 책, 30.

241) 도서출판 제자원, 『그랜드 종합주석 1』 (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91), 94.

242) 정경호, 『성서를 통해 맛보는 생명의 밥상 평화의 세상』 (서울:기독교서회, 2013), 29-43 요약.

243) 정경호, “환대의 밥상, 환대의 신학삶”, 『신학과 목회 34』 (경산:영남신학대학교, 2010), 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