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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제 3 장 성서의 밥과 밥상 공동체 - 3.2.

by 농민만세 2020. 7. 18.

 

 

[ 제 3 장 / 3.2. 제국의 밥상과 대안(代案) 밥상공동체운동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3.2. 제국의 밥상과 대안(代案) 밥상공동체운동

  이처럼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는 ‘밥과 밥상’이 봉사와 희생, 화해와 용서, 환대와 잔치의 모습으로 연속 등장한다. 자신을 밥으로 내어놓는 성만찬과 십자가 수난 그리고 이어진 부활 이후 제자들과의 조우(遭遇) 현장에도 매우 인상적이게도 아무 말이 없이 먼저 밥을 함께 먹는 밥상 공동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의 밥상은 그 당시 로마 제국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배경 상황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이 희망하는 ‘풍성한 사랑과 용서의 축제’였을까?

  이런 관점은 당시 갈릴리와 유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위험할 만큼 천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40여 년 동안 경험해야 했던 ‘일제 침략기’라는 굴종의 식민시대를 온몸으로 살면서 일본 본토에 유학 중 항일 운동에 가담, 마침내 옥사(獄死)했던 시인 윤동주의 시어(詩語)들이 적나라하게 정치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서정적으로만 읽는 오류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일체 침략기와 6.25 전쟁을 겪고 있던 당시의 한국인이라면 어린아이로부터 모든 업종에 종사하는 어른들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삶이 숨 막히도록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수와 그의 청중에 대해서도 이런 상식적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복음서 읽기는 실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저 일본 제국주의가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훨씬 더 강고(强固)하였고 잔혹하도록 치밀했다.

3.2.1. 제국 로마의 성공과 몰락

  호슬리(Horsley)는 책 『예수와 제국』에서 갈릴리 예수가 필연적으로 마주하였던 당시 ‘세계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 그 제국의 영향력을 깊이 파헤친다. 이러한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치밀한 지배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단코 예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고(强固)한 지배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제국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엽, 숙명의 맞수 카르타고를 격파시킴으로써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초부터 중엽까지 지중해 동쪽 지역으로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전례 없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벌였고,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의 지배권이 확대되어 로마로 유입되는 온갖 소비 물품과 식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모든 것이 제국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 로마시(市)를 비롯하여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들로 집중되는 ‘침략과 정복의 경제’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제국(Imperium)의 중심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지하는 로마 시민들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더욱 모든 소비물자가 수도 로마로 유입되도록 육상과 해상교통을 장악하는데 진력했다.185)

  “웅변가 키케로는 백성들에게,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당신들의 수입’, ‘평화의 장신구’ 그리고 ‘전쟁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로마 후기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다른 민족들이 군사 및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그 제국의 수도에 살던 사람들이 얻는 경제적 이익에 입각해서 정당화시켰다. 로마 장군들이 동쪽 지역을 계속 지배한 것은 로마 제국주의의 새로운 단계로서, 키케로와 그 밖의 지도층 선동가들이 노골적으로 로마시(市) 주민의 물질적 이익에 호소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선언한 것이었다. 로마의 지배층은 더이상 정치적 패권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제국의 구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번영’을 공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복의 열매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186)

  BCE 64-63년 마침내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함으로써 ‘세계의 마지막 구석들 중 하나’로 여겼던 유대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성전은 지성소까지 침입당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장군들은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결국 유대와 갈릴리를 포함한 제국 전체가 그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십여 년 동안의 소모적인 파괴와 죽임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마침내 악티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구세주(救世主)’로 제국 전체에서 인정받은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곧 ‘경외하는 지극히 영예로운 자’라는 이름을 택했고, 공화정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황제’로서 자신의 효과적인 통치를 확립했다. 이로써 제국의 지배를 지중해 세계 전체로 확장하고, 굴복시킨 민족들을 조직적으로 착취하며 아우구스투스가 최종적으로 전 세계를 ‘평정’함으로써 로마는 자신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어 ‘신세계 질서’를 확립했다.”187)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은 폭력적 힘을 앞세운 제국 로마의 정복과 지배 그리고 자신들의 번영과 확장만을 목표로 하는 정복적 패권주의라는 악마성이 어떻게 수많은 개인이나 공동체들의 가능성과 평화를 말살시켰는지, 그리고 그런 반인륜적 침략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여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일이다. 호슬리는 로마 곧 제국주의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정의한다. “제국은 오직 자신들의 평화와 번영만을 위해 움직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새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얻고 세상의 구세주 곧 ‘평화와 번영’을 확립하고 모든 인류의 소망과 염원을 성취한 ‘구세주’라고 불렸다.”188)

  살아있는 제국주의의 뿌리인 로마는 거대한 사회 계층적 ‘지배 피라미드’를 만들어 치밀하게 작동시켰다. 그 피라미드의 최상층인 황제들과 귀족 권력층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공공질서’를 확보하려 대중들에게 적절한 양식과 대중적인 오락 곧 풍자가 주베날(Juvenal)이 말한 ‘빵과 서커스’를 제공했다.189)이 ‘빵과 서커스’란,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 얻은 ‘주변부’ 지역으로부터 식량과 각종 사치품을 갈취하여 ‘중심부’ 로마 시민에게 공급하는 일이었고, 그와 함께 원형 경기장이나 극장에서는 검투사들의 경기와 초대형 실사판 연극을 공연하여 모든 도시를 연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일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불의하고 위험한 밥상’이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드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군사적인 공포와 충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제국적 질서 곧 피라미드의 사회계층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최고 층위(層位)인 황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배계급이 각각의 층위를 이루고 바로 아래 층위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제국의 지배구조와 결탁한 헤롯 가(家)와 암암리에 공조하던 예루살렘의 종교지배계급들에 의해 짓눌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갈릴리 농민 = 갈릴리 민중 = 갈릴리 소작농)들의 삶의 고통을 설상가상으로 가중시켰다. 이는 갈릴리 농민들이 전통적으로 바쳐왔던 성전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와 각종 헌물들 그리고 대지주인 그들의 농토에 대한 소작료 외에 저 로마 황제에까지 이르는 지배자들을 위한 조공과 세금이 덧씌워진 것이었고, 마침내 갈릴리 사람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은 물론 생존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190)

  다음은 사상가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의 말들이다. “모든 민족에게 자신들의 법과 관습을 강요하겠다는 것은 정복자의 어리석음의 소산이다.” “모든 것을 찬탈한 뒤에 보여주는 관대함은 칭송받을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의례나 관습이 조롱당하는 것만큼 사람들의 감정이 상하는 때는 없다. 그들을 힘으로 억압하는 것은 그들을 인정한다는 것의 증거가 되지만, 그들의 관습을 조롱한다는 것은 경멸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싸우면 정복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기는 무척 어렵다.” “민중의 호의가 항구적으로 지속되리라는 법은 없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체제 아래 살든 별 차이가 없다.” “평화를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판매한 사람은 그 후 다시 사도록 강요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셈이기 때문이다.”191) 그는 자신의 논문 『Considérations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des Romains et de leur décadence (위대한 로마인들과 그들의 몰락의 원인들에 대한 고찰)』192)에서 ‘보쉬에, 「세계사 담론」, 제7장 제3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로마가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추진하던 그 과업을 너무나 빨리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로마 멸망의 원인을 설명한다.

  “로마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 채권자들이 채무자들을 혹독하게 다룬 탓에 걸핏하면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곤 했고, 넘쳐나던 검투사들과 노예들은 폭력을 조장했으며,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벌였다. 술책에 의해서든 정당한 명분에 의해서든, 잇따른 대내외 전쟁에 거덜이 나다시피 한 로마는 외지에서 수많은 시민을 새로이 받아들였는데, 결국 이 귀화인들과 진짜 로마 시민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 사치, 방탕, 나태함으로 인하여 빈곤 계층은 끝없이 증가했다. 파산한 사람들은 해결책은 폭동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나마 남은 것조차 폭동으로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다.”193)

  민중의 삶을 철저히 자신들의 권력과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 제국의 몰락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제국의 불의한 밥상은 하늘이 내려와 땅에 품기는 예수의 ‘먹고 마시는 밥상’과 그 본질에서부터 다른 “먹고 마시고 토해내는 병든 밥상”194)이었다. 그것은 더없이 불의하고 추악한, 가장 대표적으로 양극화된 제국의 밥상이었다. 중심부 로마가 이처럼 무한 증식에 취해 있을 때 오히려 제국의 변방 주변부 유대 갈릴리에서는 그야말로 ‘온 세계’를 구하려는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3.2.2. 반(反)제국주의 대안(代案) 운동

  제국주의’(imperialism, 帝國主義)는 「두산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제국주의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imperator(황제), imperium(제국)인데, 본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로마 제국 재현(再現)의 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일반화된 것은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하였던 영국의 신문 《데일리 뉴스》가 1870년 6월 8일 자 보도에서 프랑스 제2 제정을 제국주의라고 지칭한 후부터이며, 그것은 전제 정치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었다.”195) 송현석 박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제국주의의 핵심은 다른 집단에 의한 민족이나 인종의 통제이다. 그것은 영토적 의미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와 다르다. 제국주의는 식민주의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이룬 제3 세계는 식민주의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제국주의의 침탈 가운데 있을 가능성이 이론적으로도 가능하다. 그들은 영토 주권만 회복한 것이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침탈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을 간단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세계를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196)

  이처럼 제국주의는 특정 국가가 다른 나라나 지역을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이나 그것을 목적하는 의도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비단 영토적 지배에 한정하지 않고 지배적인 영향력, 패권주의적인 영역 지배나 또 그것을 확대하는 시도들을 가리킨다. 제국주의는 그릇된 민족주의와 정치적 야욕 그리고 사회적 불안 등을 대외적 팽창주의 정책과 시도로 덮으려는 의도와 함께 독점적이고 무한한 경제적 지배로 나타난다. 이러한 성격의 제국주의적 지향은 이미 독점적 근대 자본주의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온 서방 기독교 해외선교회들의 활동으로 이식되어 한국 기독교의 무한 자기증식 욕구와 맞물려 오늘에 이르렀고, 그와 같은 ‘제국주의적 기독교’는 역사 속의 제국들과 함께 몰락의 길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은 대 헤롯과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들의 거대 도시를 건설하여 중심부로 삼고 권좌에 앉아 주변부 지역사회를 철저히 흡혈(吸血)함으로써 자신에게로 모든 부와 권력을 집중시킨 이른바 ‘도시 정책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 헤롯은 지중해 서안에 수도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를 세워 자신을 위한 계층체제가 강화되도록 도시와 함께 사회구조를 설계하였다. 그의 야욕과 허세는 도시의 외관에 대한 집착으로 부각 되었고 도시와 항구 어디에서나 보이도록 우뚝 솟은 신전과 극장, 원형 경기장, 왕궁 등의 배치와 건축물의 구조들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대 헤롯을 빼닮은 아들 안티파스는 집요한 야심으로 아버지의 욕망을 이어 실천하였다. 그는 갈릴리 중부의 고대 도시 세포리스(Sepphoris)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여 자신의 수도로 삼은 뒤 불과 20년 안에 다시 대 헤롯의 항구도시 가이사랴 마리티마의 축소판으로 티베리아스(Tiberias)를 갈릴리 호변에 건설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황제로부터 내려온 지배적 사회계층 피라미드의 상위 층위임을 과시하기 위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헌사한 이름이었다.197)

  이런 점에서 자신이 있는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들을 줄도 모르고 자신의 몸집만 무한 증식하려는 욕망의 신학에 사로잡힌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형주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적 폐단들을 헤쳐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자신만을 중심부로 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패권주의(覇權主義)적 승자독식주의, 둘째 외형과 외관에 치중하는 허세와 허영의 무한 증식, 셋째 지역사회와 교인들을 자기 번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반 사회성, 넷째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해 그리스도를 가부장적 황제로 등극시켜 대대적 충성심을 조장하는 ‘적(敵, Anti) 그리스도’적 속성 등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기독교 풍토에 대해서 송현석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국주의의 복음과 선교학이 너무나 오랜 기간 전통적인 것으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기독교의 태동기에 예수와 바울의 공동체는 로마의 제국주의를 이용은 하였으나 그 내용에서만큼은 분명히 대립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98)

  오늘의 한국교회와 함께 한마음교회가 주시하여야 하는 지점이 바로 그곳 곧 갈릴리 예수와 바울의 반(反)제국주의 운동 또는 대안(代案) 왕국 운동이다.


3.2.3. 예수의 대안 공동체 운동

  호슬리는 유대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하여 가장 선명하게 저항한 사람들은 갈릴리와 유대의 농민들이었다고 말한다. “히브리 성서를 통해서 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문화전통은 근본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 혹은 회복(나라를 되찾음)에는 외국인 지배자들 또는 내국인 지배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혹은 격퇴를 필요로 한다는 패턴이다.”199) 그리하여 “외국의 지배자들에 대해 저항하는 전통은 상당 부분 이스라엘 농민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200) 이와 같은 유대와 갈릴리 농민들의 뿌리 깊은 외세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은 로마의 거대 군단이 갈릴리 호수 동쪽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보아도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강고한 로마의 지배 피라미드 사회구조 곧 로마 황제가 예루살렘과 유대와 갈릴리 지역을 헤롯 가문을 대리자로 하여 지배하였고, 헤롯 가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제사장들을 세워 성전국가를 유지했던 사실은, 특히 피라미드의 최하층인 갈릴리 농촌 민중들에게는 이중 삼중으로 고혈을 뽑아가는 지배자들 위에 또 다른 지배자들이 겹겹이 쌓여 올라타 있는 형국이었다.

  더구나 갈릴리 농민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로마의 반복되는 폭압적 진압들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으며, 나사렛과 막달라 그리고 가버나움 등의 지역에서는 농민들의 저항에 대한 대규모 본보기 집단학살도 수년마다 한 번씩 자행되었다. 더구나 처음으로 갈릴리 지역에 자신의 대도시를 세우고 거주하여 무한 야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세금을 무자비하게 징수하여 건설한 로마식 도시들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의 지배와 폭력을 상기시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위치했던 갈릴리 민중 곧 농민의 시위와 저항이 지속하여 폭발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201)

  로마 제국이라는 당시의 ‘온 세계’에 대하여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했던 갈릴리 대다수 농촌 민중은 그만큼 대량 학살 등으로 인한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 있었고 이 한 가운데에 예수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는 치유, 악령축출, 굶주림의 해결, 계약적 가르침 등의 선교 활동을 통해 사실상 로마의 제국적 질서에 정면으로 반(反)하는 하느님의 나라/통치와 그 질서를 전파하는 운동을 지속했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의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는 지상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하느님이 이미 심판하셨다는 선언으로 그리고 갈릴리 민중들을 향하여는 ‘계약적 공동체의 갱신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예수의 '마을 공동체 갱신 운동'은 하느님 나라에로의 해방을 약속하고 로마와 예루살렘의 제국주의가 병들게 만든 것을 치유하고 악령을 축출함으로써, 하느님이 그 백성을 갱신시키는 것을 선포하며 실행에 옮긴 것이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철저한 중심부 집중적 질서였던 제국의 질서에 대한 무효를 선언하면서 주변부인 마을 공동체들에 초점을 맞추어 억압이 없는 사회 정의와 협동의 사회질서를 대안적 질서(alternative order)로 선포한 것이었다.202)

  한마음교회는 이러한 맥락을 따라 우리의 지역사회 곧 마을을 선교하는 일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여기므로 특히 “예수는 마을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 선교에서 억압 곧 강제가 없는 사회 정의와 협동의 사회질서를 대안적 질서(alternative order)로 선포한 것”이라는 호슬리의 통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호슬리는 사회 변혁을 위한 예수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 지배자들과 헤롯 왕가와 대제사장 계층의 대리 지배자들이 하느님의 유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는 제국의 영향을 치유하고 그들의 공동체 생활을 재건하도록 백성들을 일깨우는 작업에 몰두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활 형태를 이루었던 마을 공동체들에서 평등주의적이며 서로 간에 지원하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재확립하는 사회적 혁명 프로그램을 밀고 나갔다.”203)

  그리고 호슬리는 그와 같은 예수의 활동이 다름 아닌 ‘마을의 모임(회당, 쉬나고게)들을 찾아 마을로 들어간’ 선교적 마을목회 활동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예수가 반복적으로 그들의 ‘회당’(會堂, Synagogue)에 들어갈 때 그는 종교적 건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 지역의 마을 모임에 들어간 것이다. 마가의 이야기와 그 청중들에게 단지 전제되어 있었지만, 후대의 랍비문학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런 마을 모임들이 한 주에 한두 번 모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의도적으로 이들 마을의 모임이 열리는 날 그 마을에 찾아가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고 기도하는 모임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가르치고 치유하며 악령을 축출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마을 사람들의 자치를 위한 모임에 참가해서 단지 개인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다루었던 것이다.”204)

  그리고 예수의 선교 활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갈릴리의 마을 공동체들의 갱신 곧 ‘계약 공동체’인 기존의 마을 공동체들을 갱신하는 일이었다.205) 그것은 구약성서 모세의 계약 공동체에 관련된 법 조항들 곧 주변부의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와 호의’ 그리고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 '공정한 정의의 실천’들이었다. 예수는 그것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서 이미 심판된 지배자들과의 문제보다는 '공동체 당사자들 서로 간의 차별과 단죄’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 정의’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실천들은 당시에 성전에 출입할 수 없는 자로 낙인이 찍혀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악성 피부병이나 뇌전증(腦電症, epilepsy) 또는 지체 장애인들 그리고 창기(娼妓)로 대변되는 거리에 버려진 여성들과 철저히 따돌려진 하급 세리 등과 같은 ‘생계형 죄인’인 ‘불가촉민들’에 대한 환대와 치유를 통한 공동체 일원으로의 복권이었다. 이는 가난이 또 다른 사회 악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사회구조의 타파를 위해 이미 모세의 계약에 규정되었지만, 사문화되어 잊혀 있던 안식년(安息年)과 희년(禧年) 정신을 실생활 속에 다시 구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에 대하여 호슬리는 Q 복음서의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의 기도 곧 ‘주의 기도’에서 구체적인 경제적 문제들에 관한 대안의 제시와 실천을 볼 수 있다고 한다.206)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리에게 빚을 진 자들을 탕감하는 것처럼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소서’라는 간구이다. 이 부분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번역한 우리말 ‘주의 기도’는 또 하나 대단히 아쉬운 대표적인 오역 중 하나이다.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의 주 기도에 나오는 ‘죄(罪)’는 ‘하마르티아(‘αμαρτια)’가 아니라 ‘오페일레에마(οφειλημα)’ 곧 ‘채무(債務)’이며, ‘죄의 용서’와 ‘채무의 탕감’은 모두 ‘아피에에미’(αφιημι)라는 말로 표현한다. 참고로 1882년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선교사와 서상륜 등이 최초로 번역한 성서(일명, 로스역 성서) (마 6,12)에서는 ‘우리의 빗을 샤하시며’로,207) 반면 (눅 11,4)에서는 ‘우리 죄를 샤하여 주시문’으로208) 번역하였고, 일본에서 성서를 번역한 이수정(1842~1886)의 ‘주기도문’에서는 ‘우리 모든 짐을 벗겨 쥬시되’로 번역하였었다.209)

  주의 기도에서의 이러한 ‘채무 탕감’에 대한 간구는, 유대 사회를 지탱하는 마을 공동체가 와해 되지 않도록 모든 빚은 안식년인 7년마다 탕감하고, 빚으로 인한 노예도 해방하도록 조처한 모세 계약의 중요한 장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계약 공동체 갱신 운동’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유월절의 만찬을 갱신한 것과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파격 등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이처럼 예수의 설교들은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또는 도덕적 교훈의 설파가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억압적 지배체제 아래에서 이미 착취와 수탈로 무너진 유대와 갈릴리의 언약 공동체(절대다수가 농촌 마을)를 회복하고 재건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었다.


  “예수는 그의 행동들과 가르침 모두를 통해, 로마의 제국적 질서에 대해 저항하였고, 그 제국적 질서가 식민지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저항하였다. 예수는 제국적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는 예언자적인 선언들과 시위를 통해,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과 예루살렘의 그 대리자들인 헤롯 왕가와 대제사장들이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했다. 갈릴리와 기타 마을에서 펼친 예수의 선교는 제국의 폭력이 가져온 파괴적 결과들을 치유하고 제국적 질서의 영향으로 해체되는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 정신과 협동 정신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선교는 로마의 제국적 질서와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210)

  예수는 로마의 군사적인 폭력과 경제적 착취로 인한 파괴적 영향들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문화적 전통과 공동체의 활기를 되살리는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마비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비난하는 데 몰두했던 결박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이처럼 그 백성들을 위한 하느님의 행동을 드러내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절망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는 희망이라고는 거의 전무했던 상황 속에 희망의 씨앗이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이와 같은 선교 활동은 그가 계약적 공동체를 새롭게 갱신하기 위해,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들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협동하도록 촉구하고, 그들의 협동과 상호 지원을 다시 활성화시킨 일이었다.211) 예수가 주창하고 실천한 계약 공동체 갱신운동은 계약갱신의 맥락에서 감정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사랑’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구체적인 경제적 ‘정의의 실천’, 예를 들면 부채를 탕감하고 한정된 자원을 서로 관대하게 나누어 쓰는 것을 가리켰다.212)

  “예수가 계약 전통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및 정치적 가치들과 행동에 새롭게 헌신하도록 요청한 것은 바로 로마의 제국적 질서에 맞서서 상대적으로 무력함을 느꼈던 상황에서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정의ㆍ협동ㆍ연대성의 가치들과 원리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매우 본질적인 것이라고 깨달은 것은 바로 이처럼 가난과 무력함의 상황에서였다. 곧 제국의 질서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제국의 질서가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을 장악하고 재건하도록 요청했던 것이다.”213)

3.2.4. 바울의 대안 공동체 운동

  이상과 같았던 갈릴리 예수의 ‘농촌 계약 마을 공동체 갱신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바울 자신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 또는 고린도 전후서와 같은 그의 편지로 보면 상당히 성공하지 못한214) - 변주(變奏)해 낸 바울의 ‘대안적 제국 갱신 운동’을 살펴 오늘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현장에 필요한 교훈들을 찾아내 보자. 우선 호슬리는 십자가 처형이 주로 피정복 민족들 가운데 노예들과 반란자들에게 사용된 처형방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로마인들은 예수를 일종의 반란자로 이해했음에 틀림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바울 등)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자기 자신들의 죽음과 강력하게 동일시했다는 사실은 그 추종자들이 또한 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저항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동일시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로마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이 뻔뻔스러운 반란자를 고통스럽게 처형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의 추종자들과 기타 갈릴리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모욕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를 처형한 방식(십자가)은 곧 그가 제국적 질서에 대한 저항자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15)

  마침내 로마가 예수를 처형했지만 이후 일어난 여러 예수 운동들의 활동을 놓고 보면 그것은 결코 로마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Q 복음서 공동체, 마가복음서 공동체 등의 활동과 베드로 공동체나 특히 요한 공동체의 ‘묵시록’에서 ‘역사는 제국 로마를 통해서가 아니라 계약 공동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확신했던 사실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서 공동체 운동들에 영향을 끼친 것이 궁극적인 대안 질서를 선포하는 바울의 선교였다고 하면서 호슬리는 결과적으로 지역 공동체에 기초한 대안적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국제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을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바울과 그 밖의 선교사들이 로마 제국의 대도시들에 만들었던 공동체에 가담한 많은 사람은 로마 제국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붕괴 되었거나 뿌리 뽑혔던 사람들과 그런 노예의 후손들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어서, 로마 제국이 만든 제국적 질서의 산물인 그들은 이제 대안적 사회적 질서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 곧 ‘새로운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초창기 기독교 운동의 모임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216)

  “로마 제국의 세계에서는 ‘복음’이 카이사르가 이 세계에 평화와 안전을 확립했다는 승전보(勝戰譜) 곧 기쁜 소식(Good News)이었다. 카이사르는 전체 세계에 ‘구원’을 가져다 준 ‘구세주(救世主)’였다. 그러므로 제국의 백성들은 그들의 ‘주님’인 황제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와 같은 도시들의 ‘민회(民會’217), εκκλησια)에서 주님이며 구세주인 카이사르를 경축하고 찬양해야만 했다. 바울은 이처럼 핵심적인 제국의 언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예수를 이 세상의 대안적인 혹은 진정한 황제로 만들고 예수를 반(反)제국적인 국제적 대안 사회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218)

  이렇게 기존의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의 갱신’을 촉구하면서 혁신시켰던 갈릴리 예수의 선교 활동에 이어 이교(異敎)적 문화 속에 있는 제국의 한 가운데에서 바울이 펼쳐야 했던 ‘대안 지역 공동체 운동’은 사실상 중심부인 제국의 지배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매우 불온하고 반(反)제국적이어서 위험한 반체제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통치자도 인정하지 않기에 사실은 곧 민중이 함께 스스로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사실상 이 땅의 모든 지배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anarchism)적인 성격을 띠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 마을 공동체 갱신 운동 함께 바울의 대안 제국 운동은, 논자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지역사회가 더욱 공정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화롭게 살만한 사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꾸는 지역사회운동가, 또는 자신의 교회가 세상 곧 지역사회를 선교하시는 하느님께 부응하는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진력하여 시도하는 ‘선교적 목회활동가’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결정적인 이정표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한마음교회의 마을목회운동 곧 지역사회 선교적 목회 활동은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J.P.I.C. 코이노니아’와도 잇닿아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 각주

185) Richard A. Horsley, 김준우 역, 『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고양:한국기독교연구소), 38-42. 참고.

186) 앞의 책, 43.

187) 앞의 책, 44.

188) 앞의 책, 51.

189) 앞의 책, 52-53 참고.

190) 앞의 책, 66 참고.

191) Montesquieu, 앞의 책, 16-17.

192) 아래, 링크 : 구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원본을 e북으로 내려받을 수 있다.
https://books.google.fr/books?id=WAsRAAAAIAAJ&printsec=frontcover&dq=Considerations+sur+les+causes+de+la+grandeur+des+romains+et+leur+decadence&hl=ko#v=onepage&q&f=false (2017.10.21. 접근)

193) Charles De Montesquieu, 앞의 책, 137.

194) 정경호, “제국의 불의한 밥상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 정의 평화’의 밥상으로”, 『신학과 목회 36』 (경산:영남신학대학교, 2011), 87.

195) [네이버 지식백과] “제국주의의 개념과 전개”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88508&cid=40942&categoryId=31656 (2017.10.21. 접근)

196) 송현석, “Reconciliation of Korean People and Missio Dei”, 박사학위 논문, (갈릴리신학대학원, 2014), 49-50.

197) J. D. Crossan & J. L, Reed, 김기철 역, 『예수의 역사 - 고고학과 주석학의 통합』 (서울: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89-156 참고.

198) 송현석, 앞의 논문, 115.

199) Richard A. Horsley, 김준우 역, 『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고양:한국기독교연구소), 138.

200) 앞의 책, 142.

201) 앞의 책, 144-146 참고.

202) 앞의 책, 36 참고.

203) 앞의 책, 177-178.

204) 앞의 책, 186-187.

205) 앞의 책, 190-207 참고.

206) 앞의 책, 207 참고.

207) 『예수셩교젼셔』 (경셩:문광셔원, 광셔 13년, 예수강셰 1887), 복쇄판 참고.

208) 앞의 책, 참고

209) 는 2016년 4월 22일자 뉴스에서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1885년 5월 미국성서공회가 발행한 ‘더 바이블 소사이어티 레코드(The Bible Society Record)’에 실린 이수정의 주기도문을 공개하고, 이 주기도문이 한국인이 번역한 최초의 주기도문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하였다.
http://blog.naver.com/ctspress1004/220690471490 (2017.10.21. 접근)

210) Horsley, 앞의 책, 207-208.

211) 앞의 책, 208-209 참고.

212) 앞의 책, 210 참고.

213) 앞의 책, 210.

214)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설립하고 떠난 이후 온갖 이교적 종교 현상들이 혼합되어 고린도 전후서 외에 두 편의 편지를 더 보냈을 만큼, 이미 오늘의 현대 교회들의 숱한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215) Horsley, 앞의 책, 215.

216) 앞의 책, 215-218 참고.

 

217) '민회(民會, εκκλησια)‘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에서 개최된 시민 총회, 또는 시민 의회이다.

218) Horsley, 앞의 책, 21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