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 장 한마음교회 자활(自活) 공동체 / 4.1. 한마음교회의 삼자(三自)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제 4 장 한마음교회 자활(自活) 공동체
지금까지 교회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촌교회가 ‘어떻게 지역사회의 사회적 요청에 응하는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는가?’하는 우리의 과제는, 우선 한마음교회가 먼저 ‘갈릴리 예수의 밥상 공동체’로 나아가는 일로부터 가능해진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서 적용하며 발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이정표로 정경호 교수의 ‘성서에서 맛보는 생명 밥상 평화세상론’을 제시하였다.
4.1. 한마음교회의 삼자(三自)
그런데 이와 더불어 특히 한마음교회와 같은 농촌교회에서는 반드시 더해져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농촌교회와 작은교회들의 자활 자립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이며, 또한 자신들의 역사적 소명에 대한 자각이다. 단언하건대 작은교회들이야말로 목회자의 올바른 신학과 성서 읽기가 전체 교회 공동체의 성격과 활동 방향에 더욱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개혁 갱신은 오히려 이런 작은교회들이 아래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바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작은교회라고 해서 ‘아직 덜 된’ ‘덜 큰’ 교회가 아니므로, 농촌교회와 도시 작은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역사적 소명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4.1.1. 농촌교회의 주체적 자립
논자가 2001년 9월 남면교회(이전 한마음교회)에 부임하였을 때는 농촌 지역 교회로서 지역사회와의 관계가 한창 최악으로 치닫던 때였다. 어려운 농촌교회로 이임한다고 직전의 교회에서는 적잖은 지원금으로 격려해 주었다. 그 전별금을 모두 쏟아부어 ‘상설 교회학교’라는 개념으로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하였으나 꼭 필요한 시설과 교육 기자재들을 구입하고 나니 금세 바닥이 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도시 교회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처음으로 발송해 보았다. “우리는 농촌교회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목회자 한 가정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교회는 빠듯하지만 엄연한 ‘자립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세워진 지역사회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선교하는 교회여야 진정한 자립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도우십시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모아 지역선교를 시작하였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중지해야만 합니다. 우리 농촌 마을을 선교할 기회를 귀 교회에게 드리겠으니 이 우리의 요청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한국일 교수는,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앙공동체라고 하면서 교회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으로 경험하고 증거하는 공동체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자신이 스스로 중심에 서려고 하는 현실주의적 유혹을 물리쳐야 하고, 그것을 위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빛 안에서 부단히 자신을 살피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교회의 이중성(고후 4,7)을 언제나 인식하고 새롭게 되는 원리이다.”266) 그리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선교이며 선교는 어떤 활동이나 프로그램 이전에 교회의 본질적 이해로부터 출발한다’고 진술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모든 활동이 교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하느님의 선교와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이해한다. (...) 이 세상 전체가 선교현장이며 교회는 먼 해외 지역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지역을 선교현장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선교적 교회로 존재하며 활동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267)
그렇다면 이를 위하여, 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질적 인적 사회적 자본이 거의 전무한 실정의 농촌교회에서 ‘지역사회를 스스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지역사회로부터 심각한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로서 먼저 지역사회의 칭송을 듣게 하고 나아가 지역사회의 필요들에 조금씩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그처럼 지역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교회에 남아있는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안팎으로 여전히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처럼 암담한 교회 현실을 개선하도록 촉구하는 목회자들을 온갖 구실을 만들어 억지로 이임시키는 일이 반복되면서 교인들은 원망과 좌절로 인한 패배주의(우리 교인들의 말대로 표현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 응답이 없는’)가 깊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일가친척으로 얽혀있는 지역사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당에 모여서도 자신은 물론 다른 교인들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며 서로 조소하는 교인들의 자존감을 개선하고, 각자의 마을 안에서 한 사람의 신자(信者)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떳떳하고 건강히 사는 모습으로 선교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일이었다.
한국일 교수는 평신도의 선교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면서,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모든 평신도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바르게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가 직면하는 가장 큰 유혹은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도피하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 과제는 목회자들의 교인 관리 목회에 집중된 교회의 내부 활동들을 넘어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선교적으로 진지하게 살도록 할 것인가에 있다고 한다.269) 그러면서 교인들의 삶과 활동들이 지역사회 속에서 선교적 역량을 나타내도록 격려하며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선교적이 되도록 인도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삶의 현장이 곧 선교현장이다. 가정, 이웃 관계, 직장이 곧 선교현장이며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세상이라는 선교의 장으로 부름 받은 평신도의 역할과 책임이다.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교회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누룩이라면 그것은 평신도들의 역할을 통해 실현된다. 평신도는 자신의 삶을 선교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육은 그들을 세상 속에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269)
논자는 이런 변화와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필수 요건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농촌주민들의 어떤 소외감과 패배주의 그리고 특히 타자 의존적인 타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주체적 민중(오클로스)’으로 먼저 세워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권진관 교수는 민중 신학자들이 그 주제어로 ‘프톡콬스’(πτωχος - 빈자/貧者)가 아니라 오클로스(οχλος)를 채택한 이유와 함께 그것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오클로스가 주체(主體)로 일어난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다고 한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는 일에 참여하는 주체가 되는데, 오클로스는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담지자, 곧 주체들을 가리키는 언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오클로스로서 민중은 역사에 참여하는 주체적 무리들을 뜻한다. (...) 이들 민중은 공통적으로 지배질서를 문제삼고 저항하는 역사 참여적인 존재들이다. 나는 민중신학이 프토코이(가난한 사람) 대신에 오클로스를 채택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후자에 내재해 있는 민중 주체성의 측면에 있다고 본다. 프토코이는 가난한 ‘상태’ 곧 정치적 역동성보다는 사회적 ‘계층성’이 부각된 개념이지만, 오클로스는 역사 참여적이며 역동적인 개념이다.”270)
그리고 논자는 한마음교회의 현실에 더욱 가까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본보기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개신교 역사에서는 그처럼 ‘스스로 주체로서 일어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일체 침략기인 1935년에 설립된 최태용 목사의 ‘기독교대한복음교회’271)가 거의 유일하게 서방의 영향력을 배체하며 스스로 세운 개신교 교단이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서방 기독교 특히 미국교회의 지나친 영향 아래 놓여왔고 그런 이유로 미국식 기독교를 극복하자는 논의조차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현실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한계 상황에서 외세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이 교회됨’을 찾아낸 본보기는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근대 중국교회의 삼자(三自)운동이었다.
4.1.2. 근대 중국교회의 자립운동
“중화민국 시기의 중국은 사회, 정치, 문화 각 방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다. 5·4운동, 반기독교운동,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의 일련의 소요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기독교 신자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1901년 중국에는 8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1918년에는 35만 명, 1949년에는 약 100만 명으로 성장하였다.”272)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273)으로 중국의 문호가 타의에 의해 개방된 뒤 기독교는 불평등조약에 따라 연해 도시와 내지로 들어왔다. 당시 설립된 교회들은 모두 각각의 외국 선교회들이 직접 관리했다. 그들은 ‘모회(母會)’로 자칭하였고 중국에 있는 교회는 ‘자회(子會)’라 하였다. 선교 인력들은 주로 외국인 선교사였고 경제적으로는 전적으로 외국 선교회에 의지하였다.274) 더구나 기독교는 교의가 비과학적이고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후원하며 중국의 교육을 장악하여 국민의 의식적 자각을 방해하고 행정권을 무시함으로써 제국주의 침탈의 주구(走狗)로 여겨지게 되었다.275) 중국 신자들은 서양 종교가 사사건건 외국 침략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중국인들과의 충돌이 날로 심해져 교안(敎案)276)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중국교회가 성숙하고 ‘서양 종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립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중국 기독교의 자립 의지는 대단히 강렬했다. 자립운동의 목적은 구조적, 경제적으로 외세 곧 서방 선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중국 신자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꾸리는 데 있었다. 19세기 말의 중국 기독교인들이 기울인 첫 번째 노력은 자체의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양(自養)’으로 시작하여 자립(自立)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277) 상하이의 위궈전(兪國楨) 목사가 1906년 설립한 ‘중국 예수교 자립회’는 다음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애국ㆍ애교로 교회의 자립을 통해 교안을 없애고, 백성과 교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함으로 교회의 명예를 보전하면서 나라의 체면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둘째, 교회의 자치를 제창하여 외국 선교회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과 함께 자립ㆍ자치를 위해 자립(自立)ㆍ자양(自養)ㆍ자전(自傳)을 도모하였다. 이는 최초로 제기된 기독교 ‘삼자(三自)’였다. 셋째, 서양 선교회들이 중국 기독교를 여러 교파로 분할 관할함에 대해, 자립회는 교파를 나누지 않고 취지를 찬성하는 모든 신도를 받아들이되, 전국 교회가 완전히 자립하면 ‘자립’이라는 글자를 없애고 ’중국예수교회‘ 이름으로 통일하여 서로 편견을 갖지 않으며 서로 돕고 각자의 책임을 다하게 하자고 하였다.278)
그러던 중 1925년 5월 상하이에서 ‘5.30 참사’279)가 발생하자 중국인들의 가슴에 민족주의와 애국심의 불이 지펴졌다. 제국주의의 유린과 학살을 견디지 못한 중국인들에게 혁명의 열정이 타올랐다. ‘중국 예수교 자립회’는 6월 13일 자 ‘신보(申報)’에 ‘예수교 자립회 총회의 통보’를 발표하였다. “20여 년 전 이미 서양 침략의 폐해를 간파하였고 이러한 간계를 물리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이번 영국과 일본의 야만적 행동에 대해 몹시 분노하여 공리로 지지할 것을 결정하며, 목숨이 남아있는 한 이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립을 제창하고 소규모로나마 자립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중국교회가 반드시 자립해야 하는 근본 이유를 지적함으로써 기독교를 이용하려는 제국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전국적으로 고조된 혁명 분위기 속에 기독교인들은 연이어 분명한 기치를 담은 선언문, ‘혁신운동 선언’들을 발표하였다. 지아위밍(賈玉銘, 1880-1964)은 다음과 같이 중국교회 자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우리나라 교회가 자립하지 못하면 완전히 분발하지 못하고, 서양 종교의 이미지를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다면 복음을 전파하고 발전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립은 시급한 것이다.”282)
4.1.3. 중국 삼자운동과 네비우스 선교원칙
한편, '삼자(三自) 선교원칙'은 미국 해외선교부 총무인 루퍼스 앤더슨(Lufus Anderson)과 영국교회 선교회의 총무 헨리 벤(Henry Venn), 그리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중국 청(淸)나라 말기에 중국 산동성에서 활동한 존 L.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1829~1893, 중국 명:倪維思) 등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83) 특히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네비우스는 1861에 등주(登州)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이듬해 산동(山東)에서 여학교를 개설했고, 1871년 연태(煙台) 일대에서는 시범농장을 만들어 미국의 사과와 배, 포도, 매실나무를 심고, 재배기술을 가르쳤으며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품종을 교배하여 신품종의 사과를 출하한 선교사로 유명하다.284) 이러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보아 당시 심각한 가뭄으로 더욱 피폐된 지역사회를 구호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네비우스는 누구보다도 중국 민중의 암울한 현실에 공감하고 참여하며 해결 방안을 찾아 실천한 사람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대단히 큰 이정표가 되어주는 진정한 기독교 선교사였다.
비우스는 이와 같은 자신의 중국 선교 활동을 바탕으로 1855년에 논문집 「선교 사역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을 발표한다.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H.N.앨런, H.G.언더우드 등 10여 명의 갓 신학교를 졸업한 20~30대의 청년들을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했는데 해외 선교 경험도 구체적인 훈련도 받은 적이 없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이에 미 선교부에서는 네비우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한다. 네비우스는 서울에 2주간 머물면서 회합과 강연을 통해 선교정책도 제대로 없던 한국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선교 원칙들을 제시한다. 그는 선교 사역의 궁극 목적을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에 두고,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 등 세 가지를 사역의 기본 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는 특히 토착 지역교회의 자립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에 장로회 선교사들은 각기 ‘네비우스의 선교원칙’을 한국 상황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이 방법론들이 1891년 「북 장로회 선교회 규칙」으로 정리되었고, 1893년에는 한국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10개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확정하였다. 이것이 ‘네비우스 10대 선교정책’이다. 이는 네비우스 자신의 선교 사역 원칙인 ‘3자(三自)’ 이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 외에, 선교 대상을 근로자와 부녀자 중심, 청소년을 중심으로 잡고, 성서를 번역하고, 보급한다는 것 등이 포함된 것이다.285)
하지만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삼자(三自) 선교원칙’을 제시하며 실천하는 일에 실제로 앞장섰던 네비우스 선교사 본래의 정신을 본받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와 달리 미국 등 19세기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함께 추진했던 토착 지역교회 육성 방안으로 채택됨으로써, ‘선교적 시혜자(施惠者)’로서 식민지를 개척하던 팽창주의 서방 강대국 선교회의 ‘선교원칙’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이것이 유별나게 한국교회에 잘 접목되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한국교회는 그 결과로 물질적인 풍요를 얻어 자멸하게 되었고 제국주의적 미제(美製) 기독교라는 망령이 오히려 자리를 잡게 만든 엄청난 부작용도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물론 네비우스 선교원칙이 가지고 있는 매우 선명한 ‘자립원칙들’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자립하는 교회’로 선교 방향이 잡혔고, 그것을 통해서 서방 선교회에 재정을 의존하지 않게 되는 등 긍정적인 내용까지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곧 이 땅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상륙하여 활동하던 시기의 중국교회처럼 ‘기독교를 전파한 서방 외세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면 오히려 한반도의 운명을 두고 서방 국가들과 경쟁하던 일제(日帝)를 돕는 것이 되는 독특한 정치적 상황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한국교회가 서방교회 특히 미국교회로부터의 온전한 자립 곧 정신적 자립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을 통해 아시아권을 통치하려는 미국의 팽창주의와 맞물려 한국교회는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된 자신들의 언어와 목소리로 해야 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봉인된 채, 나아가 오늘날에는 아예 ‘숭미(崇美) 기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일제와 서방을 하나의 외세로 상대하면 되었던 중국 기독교는 상기한 바와 같은 자립교회 운동을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마침내 ‘삼자애국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산 혁명 하에서도 중국교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교회로 살아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 ‘삼자애국운동’에 입각한 중국교회 신학의 자주성(自主性) 곧 오요종 목사의 신학을 갈릴리신학대학원 홍성현 원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중국교회의 신학은 이른바 삼자애국운동의 기치 아래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56년 제2차 삼자애국운동 위원회에서 오요종(吳耀宗)이 제시한 ‘3가지 증거와 10가지 과업’ 속에 새로운 중국교회의 신학적 방향이 암시되었다. ①교회의 자주성 실현 ②사회주의 건설에의 참여 ③세계평화를 지키는 일 등을 통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중국교회를 이룩하겠다는 다짐이다. (...) 오랫동안 중국교회는 (...) 외세에 의존했기에 중국 인민의 벗이 되지 못했다. (...) 서구의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중국의 사회주의 속에서의 교회를 이룩할 때 중국적 교회가 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교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자주화(自主化)’는 이러한 기초적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287)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중국 사회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자체로 이해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 제국ㆍ반 봉건ㆍ반 관료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애국적 사회주의 운동에 발맞추어 중국 기독교는 삼자애국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대 중국교회의 자립운동을 모태로 태동된 ‘삼자(三自)운동’은 1954년 ‘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정식 출범(의장:오요종/吳耀宗)하면서 1949년 중국 해방 이후 중국교회에는 정부와 함께 추진한 ‘기독교 삼자애국운동’이 되었다. 그러자 이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생겨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 분리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주시하는 것은 ‘삼자운동의 역사’가 아니라 이러한 삼자(三自)신학 또는 삼자(三自)교회가 시작된 배경에 중국교회가 자신들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각성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에 의하여 또 하나의 정치적인 외세(外勢)로서 작용하고 있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서방 기독교를 비판하며 극복해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있던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항일 운동과 함께 대단히 고무적일 만큼 주체적 교회로 나아가는 모습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 역사를 모두 잊고 자기 정체성마저 모호한, 하나의 ‘유사 신흥 종교’로 전락하고 만 것이 아닐 수 없다.
4.1.4. 근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이만열 교수는 19세기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한말(韓末) 기독교도들의 입신(入信) 동기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사회적인 압제를 면하려는 일반인들의 입신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통한 구국제민(救國濟民)의 방향 모색하는 지사(志士)들의 입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사회윤리의 전개는 한국의 민주화와 독립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외세와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충군(忠君) 애국심을 고취하고 자주 의식을 고양한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나 당시 기독교에 들어온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한국 민족의 자주성’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1896~1900년대의 기독교도 내지 기독교 이해자들은 국가의 자주성을 시위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사와 신교육을 통하여 국가의 독립의식을 고양하였고 협성회ㆍ독립협회 등에 참여함으로써 언론ㆍ정치를 통한 주체의식 확립에 노력하였다. 기독교는 한글을 민족문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 기독교에 의한 ‘한글’의 재발견(과) (...) 그들의 자주 의식은 당시의 외세인 일본ㆍ러시아ㆍ중국(청)의 간섭에서 벗어난다는, (...) 일부 독립협회 계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서는 국가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강조한 역사의식이 정치적 각성과 더불어 심화 되고 있었다. 또 후일에 이상재, 남궁억, 이승훈 같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문화적인 면에서 자주성을 강조하여 신앙생활의 ‘비 한국화’를 막으려고 했던 것은 일제하의 민족전통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주목되는 점이었다.”289)
하지만 민족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던 1900~1905년대는 한국교회의 지도자 특히 선교사들이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조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신자의 양적인 증가 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 발전사에 있어서 침체기였는데, 이것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문을 닫은 데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290) 그러다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1905~1910년대에는 그러한 국가적인 위난에 발맞춰 기독교계도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과 항일의식의 발전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두 가지 큰 수확이었다. 그리하여 대부흥운동으로 신앙적인 깊이와 대중 속으로의 침투의 폭을 넓히면서 한국교회는 조직화 되어갔고, 종래의 피선교지라는 지위를 벗어나 자립에의 길로 발전해 갔다. 교회의 조직화와 자립화는 국권을 상실해갔던 그 시기에 있어서 기독교도들의 항일의식을 조직화하고 이를 민족운동에로 이끄는 발판 제공을 용이하게 하였던 것이다.291)
그리고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서구(西歐)형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파(敎派)형 미국적인 기독교와는 달리 국가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있어서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과 결속 면이 강조되고 따라서 공동체의 신학과 교회론적인 신앙의 의식이 훨씬 강했다.”292) 그러나 한국에는 처음부터 미국의 ‘교파 중심의 교회와 신앙’이 정착됨으로 인해 몇 가지 문제가 이미 제기되고 있었다. 하나는 교파교회라는 특수한 조직과 제도가 신앙보다 중요시될 위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등 서방교회의 배경에서 생성된 교회들의 이식으로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신앙 형성이 위축되는 문제였다.293) 이러한 미국의 교파 중심 교회가 주류를 이룬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점을 한철하 교수는 일찍이 ‘신학적 자립’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의 모든 자립 곧 행정적 자립, 경제적 자립, 전도의 자립 등 보다 더 근원적인 자립은 ‘신학적 자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에 대하여 자립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신학 활동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자립적 신학 활동이야말로 모든 자립의 기초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립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교회의 각 교파에는 다 각기 전통적 교파 신학을 (서구 또는 미국교회로부터) 가져왔다는 사실이다.”294)
그리고 한철하 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생활 양태가 교회 안팎에서 상이하게 다른 기현상도 역시 우리에게 신학적 자립이 없는 이유라고 한다.
“한국교회의 생활이 교회 안의 생활이나 일반 사회생활이 다른 원리에 따라서 진행되어 와서 교회 안에서 신앙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로 싸움과 반목을 일삼고, 교회 밖을 향하여는 신앙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것은 모두 우리의 신앙이 자각적(自覺的)으로 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기적 통일을 위해서 우리 교회의 신학적 자립이 시급하다.”295)
그리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립의 과업은 전통적 각 교파 신학의 더 철저한 이해와 교육이나 토착과 신학의 수립이나 현대신학 운동 등 어느 곳에 독점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우리의 과업은 ‘신학의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296) 그러므로 이처럼 ‘신학적 자립’ 곧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신학 이야기하기’가 가장 중요한 근본 요소라는 데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4.1.5. 자주적 교회의 가능성
그러면 구체적으로 교회의 자립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실천할 것인가? 일찍이 마경일 감독은 1965년 기독교 사상에 올린 글 ‘교회자립의 근본과제’에서 누군가 자립하려고 하면 그는 자기 혼자 설 수 있는 든든한 여건들을 갖추어야 할 것은 물론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닌 정신력 곧 독립 정신, 자주성이라고 교회자립 관련 문제에 대해 더 근원적인 부분을 말한다.
“한 사회나 또는 국가에 있어서도 그 자립의 (...) 기본적인 조건은 그 정신적 구조 여하인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찍이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민족 개조론’을 제창한 연유가 거기 있다. 정치적으로 독립된 정부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의 밑받침이 되어줄 인간 그 자체의 정신력이 약하고 단결심이 없거나 독립정신이 희박하다면 그들이 세워놓은 정치적인 독립 정부란 모래 위에 세워놓은 건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립이란 형태의 문제이기에 앞서 생활 철학의 문제요 생의 기초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자립 문제라는 것도 그 문제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가 엿볼 수 있게 된다.”297)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자립이란 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정신적인 기반 곧 신학적 사상적 주체성(主體性)의 확립을 뜻하는”298)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농어촌교회의 진정한 자립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의 자립에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나라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어촌교회들은 일시 일시 보내주는 보조금이나 혹은 구호물자 등을 의뢰하려고 하지 말고, 보다 영구적인 계획 하에서 의욕적인 생산 수단을 가지고 교회의 경제적 자립을 꾀할 필요가 있다. (...) 교회가 개발사업이나 개간 운동의 선두에 설 만한 정신적 자세를 가져서 농촌의 경제, 문화, 사상 면에 지도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에 우리의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로서의 뚜렷한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웃과 그 지역사회를 위해 생활의 전면에서 봉사하는 교회만이 자립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299)
그런데 일제 침략의 위기 속에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음에도 1945년 해방에 이어 찾아온 6.25 한국전쟁이라는 외세 강대국들의 이전투구의 소용돌이에 다시 휘말려 스스로 자신을 세우고 가꾸어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위 문단들에서 인용한 1965년경에 이미 발표된 우려의 글들에 나오는 대로, 원조(援助)를 받아 연명하는 속국(屬國) 교회를 벗어내지 못하여 ‘숭미(崇美) 기독교’라는 수치스러운 오명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오늘에 이르렀고, ‘반 주체ㆍ반 자주ㆍ반 자립의 의존적 신앙’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아가 강대 제국주의를 숭배하고 추앙하는 신앙 양태까지 자리 잡아서 성공절대주의, 승자독식주의 등 반(反)기독교적인 온갖 비리와 오류들을 양산해 왔다. 기독교라는 양의 탈을 쓰고 세계를 제패해 온 미국의 성공을 숭배하며 본받고자 하는 욕망을 불살라온 한국교회의 모습은 마치 아버지 대 헤롯의 성공을 따라잡고자 기를 쓴 참주(僭主)300) 헤롯 안티파스의 비루한 욕망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소위 ‘종교개혁 절대화’ 내지 ‘교조화’로 엄밀히 말하자면 16세기 ‘유럽지역의 교회 갱신운동’의 현장성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한계들을 객관적으로 읽어내지 않은 어리석음도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라도 역시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들을 얻어내야 하는 역사 속의 사건일 뿐이지 그것을 절대화시켜 숭배할 대상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소중한 개혁 갱신의 역사적 자산을 저버리고 어떤 신흥종교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주적(自主的)인 성숙한 교회만이 자신의 지역사회를 도우며 변화시키는 ‘하느님 선교’에 오롯이 동참할 수 있다. 자신들이 전해 받은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또 그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교회만이 수백 수천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삶의 맥을 이어 살아온 자신의 이웃에게 제대로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토착화 신학’을 말하기 전에 한국교회는 먼저 ‘자주적 교회’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중국교회가 삼자애국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주화’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주창한 ‘중국교회의 삼자(三自)’ 곧 “자양(自養)ㆍ자치(自治)ㆍ자전(自傳)”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갈릴리신학대학원 홍성현 원장은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의 ‘제6장 중국교회의 신학’에서 삼자운동의 경제적 자립(자양)은 곧 자치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먼저 자양과 자치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교회의 경제적 자립은 1940년대 이후부터 중국개신교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 중 하나였다. 당시의 중국 경제사정은 형편없어서 교회 기관들과 교회가 교육, 의료, 사회사업을 통해서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이렇게 하자면 외국의 자금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한 혜택은 교회에 등록한 이들의 일부만 도움을 받게 되어 교회나 교회 기관은 중국 인민들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또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교회가 외국의 것으로 인식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대체로 개신교는 나라의 어려움을 빌미로 외국 선교사에 붙어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중국 지성인들에게 주었으며 결국 교회는 외세의 매개물이 되고 교인들은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들이 되어간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01)
이런 역사적 사실은 근세에 들어 미국과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패권주의 경쟁을 위해 로마 제국의 그것과 같이 정복 전쟁을 일삼고 있을 때, 그들의 기독교가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주구(走狗) 노릇을 하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이 우리가 근대 중국의 역사와 함께 중국개신교를 되도록 상세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미국교회로부터 독립하거나 독립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한국교회는 외세 의존적 교회가 일으켜온 부작용들, 곧 자신의 대중 또는 민중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심화시킨 괴리(乖離), 잘못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 지나치게 타계 초월적 신앙 강조로 교인들을 우민화(愚民化)시켜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 교파 및 개 교회들의 파렴치한 경쟁들 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성현 원장은 이와 함께 서방의 선교회들이 중국에 심어준 또 하나의 병폐는 역시 ‘교파주의’로 본국 교회나 선교회가 자기 교파의 세력만을 확장하기 위해서 중국 안에서까지 서로 간의 경쟁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 복음의 확산이 아니라 자기 교파의 가시적 수적 확장이었기에, 이들로부터 봉급을 받고 교육, 의료 사회사업 등의 자금을 공급받는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국가나 인민들에게 봉사하기 이전에 자신들에게 봉급을 주는 선교회에 충성해야 했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외원(外援)에 의존한 중국교회는 점점 더 외세적인 것이 되어갔고 중국 인민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는 것이다.
1950년 기독교 잡지 ‘티엔 펭’(천풍)의 한 사설이 이에 대한 위기를 말하면서 ‘이제 중국교회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자립의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 사설에서는 신학 자체도 중국적인 것이 되지 못한 이유가 외국의 선교자금에 의존했기 때문임을 지적하면서 자립에의 길은 곧 중국적 신학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역설하였다. 마침 이런 글이 실린 지 1년 이내에 모든 외국 선교자금이 모두 끊겼는데 그것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국군대가 한반도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로써 오히려 중국교회는 1904년부터 자립한 예수 독립교회를 본받아 교회 본연의 성격인 영적 성장에 전념하게 되어 도시에서는 주로 가정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이미 피폐된 농촌교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302)
이에 1956년 삼자위원회는 실행위원회 결의로 교회 상호 간의 협력과 원조를 당부하는 구체적 단계를 제시하였고, 교파에 우선하지 않고 농촌의 가난한 교회들을 도와주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국교회의 이런 자양(自養)과 자치(自治) 노력은 이미 중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중국 인민과 교인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제대로 발전될 때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진다고 믿고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특히 목회자들이 이 거국적인 생산적 노동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중국교회는 더욱 자양 자치하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노동 참여운동’에 교역자들도 참여해야 할지 아니면 참여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지만, 1958년 이후 모든 기독교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공장이나 일터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해야 한다고 믿고 구체적인 사역에 종사하였다. 이런 경험은 자족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회주의 혁명 정권 아래의 중국 안에서 자립, 자양, 자치하는 기독교인들을 계속 만들어갔다. 그리하여 자양, 자치하는 교회는 중국 인민 전체, 민족 전체의 경제적인 삶과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회만의 자립이나 부의 축적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평등한 분배 안에서의 경제정의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 사회주의적 평등 원칙에 입각한 경제적 관심을 통해서 자양, 자치의 중국교회는 중국 전 인민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진 것이다.”303)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큰 성과를 냈다고 하는 네비우스 선교원칙에서 자양과 자치가 다만 피 선교지 교회의 물질적 자립이라는 의미에서 추진된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처럼 중국교회 안에서의 그것은 그야말로 교회가 스스로 서서 자신들을 스스로 돌보고 기르는 진정한 자양, 자치 운동이었다. 그리고 자전(自傳) 또한 네비우스 선교원칙을 따른 한국 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사 자신들이 전해 준 ‘남의 것’을 ‘자진해서 전한다’는 것으로 왜곡시킨 반면에, 중국교회의 자전은 전해진 기독교 복음을 자신들의 언어로 읽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자신들이 전하는 ‘자전’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다.
또한, 논자가 한마음교회와 함께 중국교회의 삼자에서 자전(自傳)을 보다 주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학적인 문제로 기독교의 증거 곧 설교, 선교, 전도 등의 성격이나 목적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개신교의 고민은 기독교의 복음이 새로운 중국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중국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성은 이제까지의 선교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그들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이 속한 국가들의 정치적 패권주의에 복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성현 원장은 진짜 중국 인민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증거, 곧 ‘자전’은 따라서 삼자 애국 운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적 전도’ ‘중국 인민들을 위한 전도여야 한다’는 자각이었고, 이 자전의 출발점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운동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증거나 공감대를 찾는 것에 대한 결단에 있었다. 마땅히 복음은 기독교인 3백만 명의 것만 되어서는 안 되고 전체 중국 인민 10억 명의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1949년 혁명 이후, 중국교회의 복음의 빛은 사라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더 넓게 비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전’이라는 주제의 핵심은 ‘누가 설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교하는가?’에 있었다.304)
홍성현 원장은 이처럼 ‘선교사들이 패권주의 서구의 입장에서 정리해 준 것을 답습한 것을 완전히 수정하는 것이 중국교회의 자전이었다’고 한다. 중국교회의 자전은 이상의 빗나간 복음 전파에 대해 수정을 가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정치적 상황에 너무 깊이 빠져서 종교의 영적 차원을 전혀 무시하고 오직 종교의 세속화를 부르짖었던 극좌(極左)로 나가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전은 어느 극단 곧 개혁주의도 아니고 복음의 정치화도 아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혁명운동을 통해서 뒤범벅이 될 그런 위험이 있는 것이었기에 자전은 이를 방지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합성을 갖는 어떤 것이 되도록 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교회의 자전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적 정치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와 완전히 떨어진 순수 복음운동도 아닌 어떤 것을 이룩해 보려는 노력이었다.305)
그리하여 자전 이전의 신앙에서는 다른 인민들이 사회건설을 위해서 주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도 교회 출석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지만, 자전에서는 일터에 머물러 일하면서 신앙을 증거하는 것을 올바른 신앙으로 여기게 되었다. 믿지 않는 다른 동료와 구별되지 않은 채 더 나은 사회건설을 위해 땀을 흘리며 일할 때 더 큰 기독교 증거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중국의 자전 운동은 공장에서는 모범 노동자가 되고, 학교에서는 모범 학생이, 농장에서는 모범 농부가 되는 것이 곧 참된 기독교의 증거로 실천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인하여 중국적 기독교가 성장해 갈 수 있었으니,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주구, 제국주의자들의 도구가 아니고 중국인의 이익과 중국사회 건설을 위한 모범적인 사람들로 인정을 받게 되어 마침내 중국 기독교인들은 중국 인민과 동일시되면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306)
바로 이것이 논자가 강조하고 한마음교회가 주시하며 기억해야 하는 ‘자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몇 개의 성구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마 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행 2:42-47)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 5:13)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여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눅 4: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4.1.6. 한마음교회의 삼자(三自)
이러한 자전(自傳) 운동이 우리 한국 기독교 내에서 일어난다면 가장 반대하고 나설 자들은 당연히 교인들의 고혈(膏血)로 호가호위하는 목회자들과 또는 그들을 옹호하며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장로들일 것이고, 무슨 정치적 이념의 문제로 구차한 자기방어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이념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그 어떤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자들 곁에 우리는 결단코 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전부를 초월하는 갈릴리의 그리스도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전적으로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빠져 있는 늪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의 더 근본적인 갱신을 이와 같은 중국교회 삼자운동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한마음교회에서 논자가 추구해 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목표는 5년 내에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독립하는 일이다. 작은 농촌교회의 자립은 목사의 생계비 자립이면 당장 가능하다. 나도 한 사람의 장로요 집사인 목사로 살아가겠다. 그리하여 누구도 누구에게 의존하는 일이 없어지고 경제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 가는 교회가,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려낸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도 살려내는 진정한 예수 공동체가 되는 교회라고 본다. 힘든 노동과 가난 속에서 이만큼 목사를 먹여 살렸으니 앞으로 사회적협동조합을 성공시켜 어르신 교인들에게 용돈 드리는 교회, 헌금 없는 교회, 더 어려운 교회의 자립을 돕는 교회가 되자. 그렇게 우리는 갈릴리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실천으로 갈망하자”
3년 전, 논자가 교회 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선언한 내용이다. 이것은 논자가 교회의 ‘자활 자립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벼랑 끝에 서겠다는 것이다. 농촌교회의 갱신은 곧 진정한 의미의 자활 자립이며 그것을 위하여 논자가 건강한 한 사람의 생활인 노동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도 바울의 길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그동안 없었던 교회의 자활 자립 의지가 갑자기 생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표적은 ‘심지도 않은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솔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기독교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타자 의존적 신앙 양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대로 ‘목사가 저렇게까지 해 주니 무슨 노력을 더욱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원돈 목사는 30여 년의 민중교회 목회를 통해 경험한 민중에 대하여서 이렇게 말한다. “민중은 하느님에 의해 이기적 자기중심성과 게으름, 체념, 좌절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민중의 자기 해방을 위해 민중도 자기 부정, 자기 비움, 회개를 해야 한다.”307) 당연하지만 여전히 즉자적(卽自的)인 민중은 어떤 일도 자신을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사실상 이와 거의 다르지 않은 기성 교인들의 모습은, 예수처럼 자신의 민중을 일깨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하느님 나라의 주체적 민중(오클로스)으로 살게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이 지배하는 하부구조로 삼고 종속적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대다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악행에 기인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원돈 목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민중교회에서 현실적으로 겪어보는 민중의 모습은 긍정성보다 부정성이 더 많다. 민중의 긍정성은 이 민중의 현실적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민중이 아니다. 살아있는 민중은 생산적이고 역사의 주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분열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체념과 좌절의 숙명론적 쳇바퀴에 갇혀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308)
이는 농촌민중 목회자인 논자의 입장에서도 크게 동의하는 분석이다. 한마음교회가 위치한 이곳 태안반도 지역 주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현장 목회자로서 주관적으로 경험한 몇 가지 분석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좁은 농경지와 거주지의 영향으로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조직하려는 의지가 없다. 둘째, 도시로 이주하지 못하고 농촌에 남겨졌다는 체념이 강하다. 셋째, 1984년 천수만 방조제 공사로 세계적 천혜의 자원인 갯벌을 하루아침에 상실한 일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결정권조차 도시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좌절을 심화시켰다. 넷째, 주로 도시민들인 외부 방문자들이나 이주민들 특히 지도층이라 여겨지는 이들(목회자 포함)에 대한 배타심이 강하다. 다섯째, 대표적인 빈곤 지역이었기에 땀 흘려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을 자신들로부터 배제하려는 경계심이 높다. 이는 지난 17년 동안 이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이곳 원주민들의 삶과 언어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결과로 얻은 내용 중 일부이다.309)
아울러 우리 지역사회에서 한마음교회는 물론 이웃의 감리회 교회와 성결회 교회에서 오랫동안 교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적 양태, 특히 부정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이는 한국의 일반적인 교인들 또는 농어촌지역 교인들의 공통점일 수 있다.
첫째, 지나치게 타자 의존적인 동시에 매우 가부장적인 신앙 양태를 보이는 이율배반이 있다. 둘째, 스스로를 객관화해야 하는 일에 저항적이다. 셋째, 의외로 높은 문맹률로 인하여 문자를 통한 학습 경험이 미미하다. 넷째,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상당히 완고하다. 다섯째, 자신들의 기존 사고와 생활을 바꾸어야 하는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얻는 일을 두려워한다. 여섯째, 무속적 엑스타시에는 쉽게 의존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어떤 종교적 감정의 경험은 두려워한다. 일곱째, 타자와의 협동과 돌봄을 자신의 일차적 가족이나 혈족 이상으로 확대하려 하지 않는다. 여덟째, 선의를 나누려는 사람을 오히려 경계하고 함께 나누어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홉째, 눈앞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희생과 봉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열 번째, 논리적인 추론을 어려워하며 보다 주체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귀납적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연역적으로 먼저 전제하여야 하는 상위 개념에는 또 저항적이다. 열한 번째, 도덕적 인식이나 윤리적 의식이 의외로 박약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여기는 원주민들이 선뜩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는 태안반도(半島)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환경적 문화적으로 외부 지역과 단절되어 오랜 세월을 지내온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한 세대만 거슬러 오르면 친자(親子)와 서자(庶子)들 간에 얽힌 긴장과 알력이 여전히 남아 마을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논자의 부임 초에만 해도 축첩(蓄妾)과 외도가 공공연했고 또한 이웃과의 불륜으로 큰 갈등이 유발되거나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논자는 수년 전, 주관적이지만 이런 분석들을 정리하면서 적잖이 막막했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을 찾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일이 원주민들의 언어를 찾아내고 습득하기라고 보았으며, 그것을 위해 첫째는 이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일상에 참여하기, 둘째는 이들 생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농업 노동의 현장을 그대로 경험하기, 셋째는 목회자의 언어 예를 들면 지나친 존대어나 현학적 언어를 버리고 이들의 일상어로 설교하기, 넷째는 기독교 외부 세계에서 더 오래 살아온 이들의 종교적 또는 윤리적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적 관점을 객관화시켜보기, 다섯째는 이런 일을 위해 무엇보다도 이분들의 ‘눈물’과 ‘한(恨)’이 무엇인지 공부하기 등을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고 실천해 왔다. 역시 이에 대한 가장 지름길은 힘에 부칠 만큼 넓은 밭을 직접 임대하여 농업 노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부정적인 양태들의 핵심적인 모습이 ‘주체적이고 대자적(對自的)인 삶’을 대단히 낯설고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겨우 생계를 이를 만큼 혹독한 경제적 가난 곧 생존에 대한 극심한 불안으로부터 온 것으로 분석하였다. 인근 지역에 있는 장애인 아동 복지시설의 단체 봉사를 시도해 보았으나 오히려 적잖은 저항으로 포기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우선 마가복음의 갈릴리 오클로스의 삶을 우리의 이야기로 현실화시키면서 그 속에서 한 사람의 갈릴리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갈릴리 예수 이야기를 지속하여 듣고 공감하게 하기를 우선 최선의 방책으로 선택해야 했다.
그리하여 본 논문에서 진술하고 있는 현재 한마음교회의 희망은 이것이다: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자발적으로 예수를 에워싸고 따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 땅에 있는 하늘을 맛보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초월해 내는 동시에, 그렇지 못한 이웃을 돌아볼 수 있도록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환대가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마을로 확산시킴으로써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이루시는 하느님의 뜻’을 경험하며 살기.”
그리고 이런 희망을 나누는 과정을 통하여 한마음교회 자신의 삼자(三自)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자주(自主), 자활(自活) 그리고 자전(自傳)이다. 심정적으로만 공감하고 동의한 뒤 잊고 마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를 줄곧 그리고 최대한 우리 주민들의 언어로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갈릴리 가난뱅이 농사꾼이면서 한 번도 기가 꺾이지 않은 예수님처럼 우리가 주인이다.” “누구한테 손을 내밀어? 우리 힘으로 일어서고 우리가 먹여 살리자.”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말뽄새’로 우리가 이야기하자.” 여기에서 매우 큰 영감과 격려를 주는 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해방신학의 영성』의 부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310)
========= 각주
265)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이론과 실체』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7), 32.
266) 앞의 책, 36.
267) (행 2,47) “하느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표준새번역)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268) 한국일, 앞의 책, 93.
269) 앞의 책, 149-150.
270) 권진관, 『민중신학 에세이』 (서울:도서출판 동연, 2012), 16-17.
271)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기독교조선복음교회)는 본래 무교회주의자였던 최태용 목사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국의 자생 개신교 교단이다. 이 교단의 3대 표어는 ①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야 하며 ②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하고 ③교회는 조선사람 자신의 교회이어야 한다 등이다. (참고: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홈페이지, http://www.pkec.org/)
272) 궈웨이롄, 이혜원 역, “중국신학의 어제와 오늘”, 『기독교 사상, 2012년 2월호』 참고.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special&wr_id=682&main_visual_page=gisang (2017.11.12. 접근)
273) [네이버 지식백과] 항목:“아편전쟁” [?片??, Opium War] 『중국시사문화사전』 (도서출판 인포차이나, 2008). 참고 : 1840~1842 기간 중 아편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이 중국에 대해 도발한 전쟁으로 전쟁의 결과 중국이 패하며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었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는 결과를 가져옴. 영국 측은 제1차 아편전쟁(?片??)을 중영전쟁(中英?爭 : First Anglo-Chinese War)으로 칭하고 있다. 더불어 상선(商船) Arrow호에서의 충돌을 빌미로 1856~1860 기간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톈진(天津)과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을 공격한 제 2차 아편전쟁으로 톈진조약(天津條約)과 베이징조약(北京條約) 등을 체결하며 열강의 침략이 심화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8166&cid=42979&categoryId=42979 (2017.11.12. 접근)
274) 차오성제(曹聖潔), “자립운동과 토착화”, 뤄관쭝(羅冠宗) 외, 류동선 윤신영 편역, 『前事不忘 後事之師』 (서울:도서출판 목민), 89 참고.
275) 민두기 외, “국민혁명운동과 반기독교운동”,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서울:지식산업사, 1990), 147 참고.
276) 교회의 갈등 사태를 가리키는 중국식 표현.
277) 차오성제(曹聖潔), 앞의 논문, 89 참고.
278) 앞의 논문, 92-93 참고.
279) [위키 백과 검색] ‘5·30 사건(五?事件)’은 1925년 5월 30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일어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1925년 2월 중화민국에 소재한 일본계 방적 공장에서 한 일본인 감독이 중국인 여공(女工)을 학대한 것을 발단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인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고 5월 30일 상하이에서 반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향해 영국 관리는 인도인 경관에게 발포를 명령해 13명이 사망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5%C2%B730_%EC%82%AC%EA%B1%B4 2017.11.12. 접근)
280) 차오성제(曹聖潔), 앞의 논문, 95 참고.
281) 지아위밍은 중국 1세대 중국인 신학 교사 가운데 한 명으로, 1929년에 미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신학박사, 1954년 설립된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서 제2대 부위원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 궈웨이롄, 이혜원 역, “중국신학의 어제와 오늘”, 『기독교 사상, 2012년 2월호』 참고.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special&wr_id=682&main_visual_page=gisang (2017.11.12. 접근)
282) 차오성제(曹聖潔), 앞의 책, 100.
283) 최형근, “초기 한국교회 삼자원리와 선교적 적용”, 『신학과 선교』, 489 참고.
284) 「중국 역대 인물 초상화」, “예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4227&cid=51397&categoryId=51397 (2017.10.24. 접근)
285) [네이버 지식백과] “네비우스 선교정책 [Nevius Mission Plan]”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71486&cid=40942&categoryId=31575 (2017.10.24. 접근), (참고 : 이와 같은 일반적인 내용들에 대하여 한국에 적용된 10대 선교정책은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이라기보다는 그와 선교방법론을 깊이 토론하였던 ‘존 로스’(John Ross, 그는 1879년 한국 역사책을 출판할 만큼 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의 선교방법론이라는 주장도 있다. - 배안호, “삼자원리와 존 로스의 선교방법”, 『신학지남 69』 (서울:신학지남사, 2002) 참고.)
286) 우야오쭝 [吳耀宗(오요종)] : 현대 중국의 그리스도교 지도자. 중국그리스도교의 외국지배로부터의 탈각을 목표로 삼자운동을 벌였다. (두산백과 중국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494&cid=40942&categoryId=33399 (2017.11.24. 접근)
287) 홍성현,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2), 77.
288) 임희모, “한국교회의 신학과 중국교회의 삼자신학”,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13673087 (2017.10.24. 접근)
289)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이만열 외,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도서출판 보성, 1986), 72-73.
290) 앞의 논문, 앞의 책, 73 참고.3
291) 앞의 논문, 앞의 책, 73 참고.
29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135.
293) 앞의 책, 162 참고.
294) 한철하,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립”, 『기독교 사상 9(6)』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5), 10.
295) 앞의 논문, 12.
296) 앞의 논문, 17 참고.
297) 마경일, “교회자립의 근본과제”, 『기독교 사상 9(6)』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5), 27.
298) 앞의 논문, 32.
299) 앞의 논문, 33.
300) 예수는 헤롯 안티파스를 당시 민중에 널리 알려진 별명 ‘여우’라고 공개적으로 지칭해 버린다. (눅 13,32)
301) 홍성현,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2), 77-78 참고.
302) 앞의 책 78-80 참고,
303) 앞의 책, 80-81.
304) 앞의 책, 81-83 참고.
305) 앞의 책, 83-84 참고.
306) 앞의 책, 85 참고.
307) 민중신학연구소 엮음, 『민중은 메시아인가』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5), 50.
308) 앞의 책, 51.
309) 태안반도라는 좁은 면적에 농업용수를 얻을 수 있는 계곡물이나 냇물이 없는 특이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불과 30여 년 전 지하수 관정이 보급되기 이전까지는 전적으로 기후에 의존하여야 하는 천수답(天水畓, rain fed paddy field) 농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나마 극심한 경제적 빈곤 상태에서 탈출하게 된 것은 지하수 관정의 보급으로 농협 수매작물인 마늘과 고추 등을 생산하게 되고 또한 인근의 몽산포 해수욕장이 피서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다만 여기에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대학살(1천 2백여 명의 민간인이 국가권력인 경찰에 의해 의도적으로 학살됨)로 인한 트라우마와 거의 단절된 지리적 문화적 상황을 분석 첨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310) Gustavo Guti?rrez, 이성배 역, 『해방신학의 영성』 (왜관:분도출판사, 1987), 표지. 이 책은 1986년 김문호 역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도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로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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