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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눔

한국 개신교 뼈 때리는 어느 의사의 글,, 나는 벌써 내다 버렸지만, 참고하라고 올려 둔다

by 농민만세 2020. 8. 24.

https://www.facebook.com/100002765695774/posts/2802941446474684/

/ 이주혁 의사

-- 목사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

지금 한국에는 새로운 근본주의 개신교 성향이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방역 지침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정부의 음모론에 관련한 가짜 뉴스를 자기들끼리 공유하고 SNS 등을 통해 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종교 탄압'이라 규정하고 반정부 행동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와 같은 행태를 과연 '근본주의'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한국의 개신교가 너무나 압축된 고도 성장을 하는 와중에 한국적 자본주의와 함께 팽창하면서 굉장히 단순한 흑백 논리를 앞세우는 극우적 이념의 본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합리성을 거부하고 반정부 활동을 다짐하는 이런 모습은 그러나 사실은 예컨대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무력투쟁 단체들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을 정도로 온건하긴 하다.

한국 기독교는 유교, 불교와는 달리 그 역사가 너무나 짧다. 그 짧은 역사 동안에 대단히 다이나믹하게 성장해 왔던 것이 사실이며 사회에 끼치는 영향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도 크다.

헌데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가만히 반추해 보면, 한국 자본주의의 급격한 성장의 역사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우대하고 친미 반공 노선을 폈을 때 한국 개신교는 정확히 그 스탠스를 똑같이 따라 갔고 서북청년단을 핵심으로 해, 극우 반공주의의 본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개신교 교인의 수는 전인구의 2%에 미달하였었다.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팽창한 것은 박정희 -전두환 군부 정치 시대였다. 70~8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한국의 교회 역시도 엄청난 교세의 확장을 달성했다.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이때의 교회는 '극우 반공주의'보다는, '성장제일주의'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팽창주의, 성장주의가 곧 개신교 제1의 교리가 된 것이다. 큰 예배당, 수많은 신도들의 회집 예배, 막대하게 걷히는 헌금. 그리고 그 돈과 인력의 힘으로 더더욱 팽창하는 교회.

물론 반대쪽을 보면 딴판인 현상이 나타난다.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 농어촌의 작은 교회들, 많은 봉헌을 받지 못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자본주의가 낙인 찍는 '실패자'가 되어 갔다.

자본주의의 시각으로 보는 '위너'와 '루저'가, 개신교 교회에서도 똑같은 프레임으로 재생산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목회자들은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위너'가 된 이들은 한국의 재벌들이 경영권과 소유권을 모두 자손에게 상속했듯이, 교회 역시 자식에게 상속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한국식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대로 미러 이미지처럼 형상화한 것이었다.

문제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터진다. 이때의 충격은 한국인들에게 굉장한 강도로 각인되었고, 그것은 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팽창하지 않으면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소비를 부추겨 생산을 하고 더 더 높은 소비 심리를 부채질 해 더 높은 생산을 해야만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교회도 그러했던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교회들이 더 생겨 있었고, 그 많은 교회들이 다 성장과 대형화를 꿈꾸었다. 더 많은 돈이, 주의 이름으로 더 많은 봉헌이 필요했다. 돈, 돈, 돈이 필요했다. 멀쩡한 예배당을 철거하고 더 크게 짓고 땅을 매입하고 막대한 부채를 끌어 들여 더 더 큰 건물을 짓고 더 화려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집회를 만들려 했다.

그렇게 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경제 위기가 터져 버린 것이다.

90년대 중후반을 지나가면서 모든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무엇이냐면, 더이상 '새신자 전도'가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천만 성도라는 말을 교계 리더들이 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여러 군데의 교회에 복수 등록된 교인들이 이미 상당히 많았었다. 계속 터져 나오는 교회 목사들의 부패와 횡령, 비리, 성폭행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교회를 옮겨다니는 방랑자가 된 것이었다. 이를 민중신학자 김진호 선생은 '수평이동'이라 불렀다.

이제 교회들은 '사역'(사업이라고 불러야 할지. 장사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하지만)을 팽창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무한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때는 한국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 영향에 들어갔을 때이다. 교회 역시 신자유주의의 열풍에 휘말린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팽창이 아닌, 제자 훈련 프로그램, '경배와 찬양' 프로그램 등의 '캐릭터'를 창조하며 저마다 '교인 유치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0년도에 들어, 새신자에게 고급 냄비 세트를 경품으로 선물해준다는 전단지를 뿌린 교회가 등장하였다. (이 교회의 목사는 배임, 횡령 혐의로 뉴스에도 단골로 나옴)

심지어 어떤 교회는 교회에 출석하면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홍보했다. 이 교회는 남성용과 여성용 전도 전단지를 따로 만들었는데, 남성용에는 여성 신자들의 사진과 신상이, 여성용에는 남성 신자들의 사진과 신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도왕에게 자동차를 경품으로 내놓은 교회, 성경 다독왕에게 해외여행 상품권을 내놓은 교회도 있었다.

한국사회의 개신교는 불과 50년정도의 기간동안 압축성장을 해 온 한국의 천민주의적 자본주의의 팽창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판박이처럼 새겨서 바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생존해 왔던 것이다. 급속한 팽창과 배금주의 속에서 마치 그와 똑같이 돈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신천지' 현상은 코로나 19로 인해 일반 대중에게 대단히 왜곡되어 각인되어 버렸다. 한 가지 질문을 모두에게 던져야 하겠다. "사회에 대한 해악 면에서, 이만희의 신천지가 더 해로운가, 아니면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가 더 해로운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온 국민이 '부자'가 되기 위해 영혼까지 쥐어짜며 '자기 계발서'만 읽으면서 또 스펙 속에 질식하며, 또 자식까지 그와 같이 교육시키며 아둥바둥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승리자'가 된 교회는 강남3구에 위치한 대형교회들이었다.

이들이 소위 교인 유치 시장에서, 수평이동하는 신자들을 끌어들일 가장 품위 있는 볼거리와 프로그램들을 히트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저'가 된 교회들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만희의 신천지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위너'가 되지 못한, 혹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젊은층들을 유치하는 데 공전의 성공을 거둔 시장의 강자였다.

개신교 리더들은 신천지를 '이단'이라며 맹공하고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어떻게든 일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흐리는 물타기에 불과했다.

신천지는 교리상 이단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개신교의 여느 교회들, 교단들이 모두 다 하고 있는 '교인 유치 사업'을 그들 역시 자신들의 방법으로 했을 뿐이다. 과연 한국의 개신교 리더들이, 신천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며 비난하는 영상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들의 교회에서 신자들을 빼앗아 간 '옆집 장사꾼' 망하라고 손뼉을 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바로 신천지와 똑같은 패턴으로, 지금은 일반 개신교 교회들에서 확진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 몇 달동안 잘 통제되는 것으로 보였던 코로나 19가 8월 중순 들어 급격히 치솟은 이유는 개신교의 "이단이 아닌" 교회들이 그간 열심히 회집 예배를 하였기 때문이다.

'위너'인 교회들은 방역 지침에 잘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두기도 모범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축적된 상당한 자본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화상 예배 역시 그간 늘 해 왔기 때문에 노하우가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루저' 교회들이었다. 이들은 방역 지침에 따를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 목사들은 "그날 벌어 그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지금껏 돌아본 역사에서 얘기했듯이, 팽창 우선주의적 신념과 극우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교회의 캐릭터화'에 성공하여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위너'인 교회들은 지금, 낡은 팽창주의와 극우 반공주의에 파묻혀 있지 않아도 된다. 돈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 없는 교회들, 하루 하루 먹고 살기 어려운 교인들이 모인 교회들은 이제 낡고 낡은 극우 반공주의로 회귀해 버린다. 모든 것은 빨갱이 정권, 좌파 정권때문이라고 비난하면 정부의 지침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더이상 '루저'라는 자기 인식과 평가에 의해 비참해지지 않을 명분을 찾은 것이 아닐까.

요한복음 8장 31~3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자본주의 사회 한국의 언어로는 이렇게 번역돼 버렸다.

"너희가 교회 팽창에 성공하면 헌금이 들어오고 돈을 벌 것이니, 그 돈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목사님들. 신도들을 끌고 지금 대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