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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눔

정의 평화 생명살림은 그냥 오지 않는다

by 농자천하/ 2020. 10. 21.

https://www.facebook.com/100000108690563/posts/3891061727574079/

/ 박충구 교수


좀비 교회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분단의 철조망을 거두어내고 지뢰밭을 제거해야 한다. 휴전선 남과 북, 그리고 우리 마음에서도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유무형의 장벽 제거 없이 평화가 다가올 리 없다. 75년 동안이나 우리가 속수무책 지켜보고 경험한 일이다.

정의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아닌 온갖 불의를 제거하는 노역 없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 불의가 만연한데 평화를 원한다면서 우리가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세상은 정의 대신 불의로 가득할 것이다. 이 나라 검찰을 바라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반생명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도, 우리 삶에서도,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도 반생명의 악과 싸우지 않는다면 죽음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을 겪으면서 마스크를 쓰고 세심하게 방역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은 구체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니 낭만적이고 안일한 평화, 손쉬운 정의, 지키지 않은 생명이란 사실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낭만적 환상을 가지고 “나는 다툼을 원하지 않아”라며 온갖 갈등과 다툼을 회피하는 이들이야말로 비겁한 이들이다. 평화와 정의를 요구하면서도 일상에서 불의와 싸우지 않는 이는 누군가가 희생적으로 지켜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에 무임승차하는 얌체와 같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매순간 현실적인 악과 다투며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악은 어느 곳에나 기생한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특히 돈과 권력과 쾌락이 있는 곳에 더욱더 득실 거린다. 그러므로 악의 진면목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이들이 평화를 노래하고 정의를 가르치려 할 경우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이끌다가 이내 간교한 악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흉해 보이는 세력이 언론과 검찰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대통령도 뛰어내리게 했다”는 전직 검찰 고위 인사들이 여기저기서 부끄러움도 없이 큰소리치고 있다. 이런 한심한 자들을 고발하는 언론 기사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예수도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구나”라고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비둘기의 순진함과 뱀 같은 지혜를 가질 것을 권고하신 이유다.

우리는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평화, 정의,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과 연대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용기와 격려를 나누자. 그리고 무엇보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면서 살자. 너희가 예할 것은 “예”라 하고, 아니라 할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살라고 하시지 않았나?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할 능력이 없다면 예수의 제자는커녕, 민주시민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의 하나, 우리 주변에서 평화를 깨고, 불의에 편승하며, 반생명적인 억압과 차별을 일삼는 이들이 목사요 장로라면, 그들의 교회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하여 죽은 것이다. 예수 없는 교회는 생명력이 떠난 주검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살아있듯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강시나, 좀비들의 교회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참된 평화, 정의가 사라져 생명력없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검찰이 좀비 검찰로 전락하면 지켜보기 너무 흉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교회에서 악이 득실거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검찰보다 더 흉한 좀비 집단이 아닐까.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이미 죽었다”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사데 교회의 좀비들을 모범으로 살지 말자. 평화와 정의,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