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새 교회당을 유지재단에 귀속시킬 때, ‘증여’가 아닌 ‘명의신탁’을 하였더라면 남은 채무를 부지런히 해결한 뒤, 마을회관으로 증여하여 이 건물이 지역사회의 공익을 위해 활용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부분을 임대하여 사용한다면 차라리 보람 있는 일이었을 것인데 이래저래 아쉬운 일이다.
새 교회당 공사를 마무리하고 이사를 마친 다음 온 힘이 소진되어 다시 찾아온 심장 부정맥으로 근 1년 반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답답하고 한편 죄스럽기까지 했던지. 나는 지금도 무슨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 가장 두렵다. 전형적인 ‘일 중독’이라 하겠지만 내가 한 사람의 목사로 사는 이상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지금껏 달려왔다.
어느덧 2014년 겨울이 가까이 다가왔다. 더는 그렇게 무력한 상태로 또 한 해를 맞을 수 없었다. 늘 그랬다. 건강이 몹시 나빠질 때 차라리 힘겨운 일을 벌이고 거기 몰입하는 게 나았었다. 푸르른 생명이 넘실거리던 들판이 어느덧 쓸쓸한 풍경으로 바뀌고 첫 눈발이 보일 때쯤 나는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났다. “다시 농사를 짓자!” “기왕에 우리 교우님들과 지역 주민들의 일터로 나아갈 바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진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자!” “이제 도시에서 내려온 한 사람의 귀농인처럼!”
그리고 그야말로 공동화 현상이 급속 진행되어 점점 적막해져만 가는 우리 면소재지에 무엇이든 활력이 되는 일을 도모해 보려던 그동안의 도전들을 돌아보며 방향을 과감히 수정했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마을에 무엇이든 도움이 되려고 했었다. 지역아동센터, 청소년문화교실, 어르신 한글 교실, 의료봉사, 해수욕장 환경미화 봉사, 농촌 일손돕기, 독거 어르신 농가 청소 및 도배, 독거 어르신 밑반찬 돕기 등이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교회만큼 조직화 되지 못한 지역사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찾아서 봉사해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농촌교회로서 도시 교회들이 지원하는 외부자원을 활용할 수 없게 되면서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방적인 봉사활동들은 교회의 호감도 제고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지만, 지역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화하여 발전하게 하는 일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 교회당으로 이사한 뒤에, 이미 나의 건강이나 의욕이 완전히 소진 상태로 진행해야 했던 대대적인 의료-미용 봉사활동을 끝으로 그런 방식의 지역사회 봉사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 마을에 있는 몽산포-달산포 해수욕장에는 해마다 30여만 명이 다녀갔지만, 정작 우리 마을은 극심한 교통체증과 소음공해로 여름마다 몸살을 앓을 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우리 면 소재지를 자연스럽게 들러가게 하여 어떤 식으로든 마을에 활력이 생기도록 나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농부 이상의 길이 필요했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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