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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71

by 농자천하/ 2021. 1. 30.


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그런저런 이유로 본격적인 농부로서 농사를 시작하였다. 많은 고심 끝에 830평의 밭에는 고사리 종근을 심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맡긴 텃밭 250평에는 감자를 심었고 300평에는 옥수수 모종을 길러 심었다. 이 텃밭 두 곳에는 감자와 옥수수를 수확한 다음 들깨 농사를 짓기로 작부 계획을 세웠다.

감자 싹이 나지 않은 자리에는 연세가 80이나 되신 권사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감자와 수확 시기가 비슷한 강낭콩을 심었다. 밭 가장자리에는 오이, 수박, 참외, 당근, 가지, 여주 등을 심었고 말뚝을 박아 넝쿨이 오르도록 줄을 매 주었다. 그런데 먼저 이야기한 대로 하필이면 전에 없던 가뭄이 극심했다. 그해 2월부터 시작된 봄 가뭄은 6월 말 장마조차 마른장마로 지나가 버리고서야 끝이 났다. 심지어 바로 인접한 안면도나 태안읍에는 비가 내려도 이곳 남면에는 몇 방울 떨어지고 말았었다.

지하수 관정도 없는 밭이었다. 농업용수도 고려하지 않고 농사를 시작했으니 얼마나 무지했던지, 값비싼 수업료를 내야 무엇이든 제대로 배우게 마련이다. 심어 놓은 고사리는 밤새 젖은 이슬로 싹이 한 뼘씩 나왔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속수무책으로 전부 말라 죽었다. 차라리 잡초가 무성히 덮어주면 뙤약볕을 좀 가려주려나 싶었지만, 이전에 제초제를 들이부어 생강 농사를 지은 밭이라 풀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렇게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는 동시에, 2월에는 태안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실시하는 ‘농업인대학’에 입학했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던지. 마침 그해 농업인대학은 귀농귀촌인들 대상이었기에 40여 명의 귀농인이 모였다. 그런데 한 주에 하루씩 출석해야 하는 수업이었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회 일도 거의 혼자서 다 하는 마당에 1천3백여 평의 밭농사도 혼자 벌인 것이었고, 또 한 주에 하루는 갈릴리 박사원 세미나에 참석하러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다.

더구나 그해 5월부터는 우리 교단의 총회 차원에서 ‘마을 만들기 운동’을 고취하고자, 몇몇 분들과 함께 ‘예장 마을만들기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오래전 어느 방송의 코미디 프로가 생각난다. 시골 노인으로 분장한 이들이 나와서 무슨 일을 하자고만 하면, 주인공이 이런 말을 반복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내용이었다. “그럼~ 소는 누가 키우고?!”

점점 나만이 해야 하는 일은 산더미처럼 불어났지만 하루는 24시간 뿐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 벌인 온갖 일을 크든 작든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시키지 못한 이유들을 생각해 본다. 아무리 앞장서서 전력을 다해도 함께 도우며 걷는 동료나 교인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본래 무슨 일이든 솔선하고 궂은일을 먼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이제 돌이켜 보면, 그런 일종의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것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농사일은 좋기만 했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