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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배움

"감상적 서사는 위험하다", 매우 위험하다... Praxis도 없이 Theoria는 고사하고, '혓바닥과 귓구멍의 감상'만 있는 오늘의 개신교를 보라

by 농민만세 2021. 4. 30.

청년 열사 전태일

https://www.facebook.com/100001700520383/posts/4023203301079648/

글 주인 / 강소연

 

 

40. 감상적 서사는 위험하다

전태일의 육필 일기를 공개할 것이라는 소식에 켄 로치 감독의 1969년 작 가 연상된다. 케스의 허름한 시공간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처음 전태일 관련 책을 읽고 느꼈던 충격에도 불구하고 감상적 서사에 천착했던 스무살의 어설픔 때문이다. 전태일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게 된 영화 케스는 내게 섣부른 선의의 위험과 비현실적 낭만의 헛헛함을 일깨웠다.

영국 북부 공업지대의 남루한 환경에서 공부에 적성 없는 소년의 미래는 탄광촌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길을 부정하는 소년을 보며 신파적 전복을 기대했다. 우연히 발견한 매에게 ‘케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매를 길들이는 법을 공부하기 위해 책을 훔치는 소년. 케스 먹이를 사기 위해 형의 돈을 빼돌리는 모습에도 유년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어떤 성취를 이뤄내는 낭만적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켄 로치는 명확했다. 진부한 감상 대신 불행을 이끄는 현실과 탐욕을 일깨우는 충격적 방식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

남의 불행 앞에 우리는 쉽게 위로를 건넨다. 여기서의 쉬움은 가벼움이 아니라 지나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다. 무언가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싶고 작은 도움이라도 건네고 싶다는 선한 마음이야 더없이 착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착함도 욕망이다. 자칫 눈을 흐리게 만드는. 매사 섣부른 선악이나 진위의 구별은 감상을 넘어 불통의 관성이 될 수 있다. 문제를 호도할 수 있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의 무게를 가늠해야 하는 이유다. 옥타비오 파스가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던 옥타비오 파스는 인간의 언어와 소통에 관한 깊은 사유의 길, “고독의 미로”를 열어 놓았다. 말에 관한 여러 시 중에서도 은 인간의 말과 사유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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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Retórica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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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에서도 새가 등장하지만 에서 새의 노래로 상징되는 불통은 말이 곧 인식인 사람이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세상을 보는 단순한 선의, 중립적 태도, 객관적 포즈는 "새의 노래"가 아니라 "목청의 떨림"만 "이해"하게 하면서 진정한 소통을 방해한다.

거짓은 노동탄압처럼 말을 착취하고, 모호한 언술과 앞뒤 다른 말은 소통을 중상모략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나 어설픈 위로는 말을 교란시킨다. 착취와 중상모략은 금방 드러나지만 교란은 종종 풀기 힘든 실타래가 되어 버리곤 한다. 섣부른 감상을 넘어 투명하고 분명한 말살이를 하라는 의미다. (고맙게도ㅜ,ㅜa 깊이깊이 멍든 데를 퍽퍽 쑤셔주는구나! / 글펌자 주) 수사학의 핵심은 “흐르는” “맑은 물”, 즉 투명한 말살이로 드러나는 냉정한 현실인식이라는 얘기다.


오늘 공개된 전태일 육필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이보다 명쾌하고 투명한 말이 어디 있는가? 이 시대에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나를 아는 모든 나"가 되어 "기억"해야 한다.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그 마음과 상황을 헤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당장 하나씩 실천해야 한다 / 글펌자 주)

다들 청년을 얘기하지만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말을 소비하는 이 때, 전태일의 육필 원고는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흐르는 인식과 사유, 건네는 말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흐르는 맑은 물"이 되라 한다. 미처 소녀티를 벗지 못했던 내 청년 시절의 감상을 넘어,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일 뿐인 뻔한 담론을 넘어서라 한다.

 

(함께 올린 그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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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xis도 없이 
Theoria는 고사하고, 
'혓바닥과
귓구멍의 감상' 뿐인 
기독교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