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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밤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by 농민만세 2021. 9. 23.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 쉼보르스카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도대체 이사악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신부님께 교리 문답이라도 청해야겠다.
공을 차서 이웃집 유리창이라도 깨뜨렸나?
울타리를 넘다가 새 바지에 구멍이라도 냈나?
연필을 훔쳤나?
암탉을 놀라게 했나?
시험칠 때 친구에게 답을 슬쩍 가르쳐주었나?

어른들이여, 바보 같은 꿈이나 꾸며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들어라.
나 아침까지 뜬눈으로
이 밤을 지새우리니,
고요한 암흑이 내게 맞서
팽팽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브라함의 고뇌처럼
어두운 이 밤.

성서에 나오는 신의 눈동자가
먼 옛날 이사악을 주목했듯이
지금 이 순간 뜷어져라 나를 응시하고 있다.
과연 어디에 이 몸을 숨길 수 있을까?
신이 마음만 먹으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킨다는 건
이미 해묵은 옛날이야기.
이 공포의 극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는 것뿐.

머지않아 창가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방 안 곳곳에서 새처럼, 바람처럼 퍼드덕대리라.
하지만 현실 속에는
그처럼 커다란 날개짓을 하는 새도,
그처럼 기나긴 여운을 남기는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 법.

신은 정말 우연히 나를 선택한 것인 양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결국엔 비밀스러운 작당을 위해
아버지를 부엌으로 슬그머니 데려가
귓가에 대고 거대한 뿔 나팔을 불어대겠지.

내일 먼동이 틀 무렵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떠나리라. 나는 떠나리라.
내 증오는 더욱더 깊어만 가리니
이제 나는 인간의 선함도, 그들의 사랑도
믿지 않으리라.
나는 11월의 낙엽보다
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
결코 믿음을 주지 말 것.
믿음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함부로 사랑하지 말 것.
기계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그저 가슴 속에 품고 다닐 것.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오래전에 이미 그리되기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나를 뒤흔드는 건 심장이 아니라
말라틀어진 화석에 불과할 테니.

구름 위 발코니에서
신은 유유히 기다리고 있다.
가련한 번제물을 태우게 될 장작이
보기 좋게 골고루 잘 타고 있는지
편안하게 지켜보면서
나는 반드시 죽으리라.
나를 구원하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견디기 힘든 악몽이 나를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견디기 힘든 고독이 날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신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의 확실한 의미'에서
'애매모호한 비유'를 향해.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1923.7.2 ~ 2012.2.1
폴란드 시인
노벨문학상(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