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노동하는 목사? - 01”
만 3년 만에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대형 버스를 임시직으로 운전하다가 코로나19로 대형 화물운송 회사에 지원했다. 면접하는 분이 자꾸 물었다. “연세도 있으신데 하실 수 있겠어요?”
수십 톤의 화물을 전국에 나르는 일이었는데, 한 번의 사고도 나지 않도록 얼마나 노심초사했던지, 금 년 들어 심장 부정맥이 다시 극심해졌다. 25톤 트럭으로 운반하는 일은 지게차로 올려놓은 짐이 넘어지거나 쏠리지 않게 운전해야 했다. 꼭대기까지 수없이 오르내리며 결박을 해야 하고, 또 지게차에 걸어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운전 중에 잠깐씩 나도 모르게 졸도할 수 있을 정도로 부정맥이 나빠졌다고 했다.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던 회사 임원들과 동료들에게 미안했지만, 또다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요령이 없어서 무릎과 정강이는 연속되는 타박상에 성할 날이 없었다. ‘아차’ 하면 허리를 다치거나 손가락 또는 손목 부상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 한 달은 일에 적응하느라 퇴근하고 집에 와서, 또 새벽 출근할 때 근육통으로 이를 악물고 층계를 기어서 오르내려야 했다.
교회당 건물을 사서 이렇게 이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본래 무슨 목회적인 이유나 선교의 비전이 없이 일단 교회당을 마련하는 일은 오히려 해서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겼었다. 너무나 낡았던 먼저 교회당 자리에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그냥 따뜻하고 널찍하게 지어서, ‘지역사회 노인 공동홈’을 마련하는 것이 본래 의 기도 제목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강 건너 남의 일일 뿐이었다.
지금 교회당은 겉으로만 좋아 보일 뿐, 실용적인 구조가 너무 아니어서 안타깝다. 그래서 수년 전에 입주한 때부터 지금까지 이 건물을 어떻게 선교를 위해 활용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도 주변에서는 이 어려운 농촌교회에서 생각보다 큰 채무를 지지는 않은 거라고 한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노인 공동홈’을 기도하고 있었기에 필요한 비용을 저축하느라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목회자 자녀들 학자금으로 당연히 지출해야 하는 건 바랄 수도 없었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로나마 염려해주는 이도 없었다.
당시 대도시 교회들의 지원금도 전액 지역선교비로 사용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목회하느라 오래전에 교직을 그만두었던 아내가 임시 교사로 취업해서 간신히 기본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교육비는 그대로 빚이 되어 이자만 늘어갔다. 그렇게 교회 통장에 모아둔 헌금이 5천만 원이었고, 교회당 이전 비용으로 잘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빚을, 지난 3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노동해서 떳떳하게 모두 갚았다. 그리고 이렇게 약해진 심장을 안고 다시 빈손으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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