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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소년보호재판 전문가의 안타까움

by 농자천하/ 2018. 2. 22.

 

 

? 예기치 않는 길을 나서며

 

●《심호흡 크게 하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소년보호재판을 맡게 되어 8년간 오로지 이른바 ‘비행청소년들’만 바라보며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소년재판전문가에 대한 배려라고는 없는' 인사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13일 화요일 법원 정기 인사가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소년재판을 계속하려고 부산가정법원에 잔류하거나 울산가정법원 등 소년보호재판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신청하였으나 이러한 희망과는 달리 신청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부산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로 인해 올해부터 소년재판을 떠나게 되었고, 언제 다시 소년재판으로 복귀할지는 기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사발령을 접하고 나니 온몸의 기운이 빠지면서 가슴은 아파오고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이 밀려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지난 일주일간은 낮에는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밤에는 잠 한 숨 못 잔 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8년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아이들을 이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삶의 기쁨이 한순간에 통째로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 슬픔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가슴 한 쪽이 뻥 뚫려 있다는 말이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음을 온 몸으로 실감하였습니다.

 

발걸음을 떼기가 너무도 힘에 겹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심호흡 크게 하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퇴직 시까지 소년보호재판만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함을 용서바랍니다》

 

2010년 2월 소년보호재판을 맡았을 당시 소년보호재판은 대한민국 재판 절차에서 가장 후진적인 영역이었습니다.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과는 달리 지방의 소년보호재판은 사정이 더욱 열악하였습니다. 창원지방법원의 경우 인력부족으로 소년보호재판이 3주에 한 번 열리게 되어 있었는데, 한 번의 기일에 100여 명의 아이들을 재판하는 이른바 ‘컵라면 재판’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이라면 아이들은 법정에서 아무런 경각심도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 밖에서도 제대로 된 감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비행과 재비행으로 인한 책임은 모두 그들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지켜볼 수가 없어 지난 8년간 소년보호재판 제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동분서주해 왔습니다.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습니다만 아직까지 많은 부분이 개선되어야 하는 형편입니다.

 

특히, 청소년회복지원시설(청소년회복센터)과 6호처분기관에 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예산 지원 문제는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러한 재판 환경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투명인간처럼 취급되던 아이들’, ‘우리사회에서 가장 천박하게 취급되며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 아이들’, 이른바 ‘비행청소년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인식 개선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들의 입장에 서서 목소리를 내주어야 하는데, 비행소년들은 범죄자일 뿐이라는 혐오감 어린 시선이 일반적인데다 그들에게는 선거권이 없다는 이유로 누구도 그들을 대변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소년보호재판의 후진성을 그대로 방치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라도 이 아이들의 대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저는 법관 퇴직시까지 소년보호재판만 하겠다고 국민들 앞에서 공적으로 약속을 하였고, 2017년 국정감사 때도 노회찬 의원의 질문에 다시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런 약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년보호재판이 법조인 경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제가 소년보호재판을 계속 하더라도 특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2017년 11월 현직 법관 최초로 ‘영산법률문화상’을 수상할 때, 이사장님을 비롯한 이사진들께서 걱정 어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상을 수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소년보호재판 때문인데 상을 받음으로 인해 저의 전문 영역이 소년보호재판으로 축소되어 앞으로 저의 법조 경력에 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흔쾌히 대답했었습니다. 상을 수상함으로써 저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알릴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소년보호재판만 계속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승진도 영예도 필요 없다고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을 이제 지킬 수가 없게 되어 국민 여러분들께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디 제가 의도적으로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점만 알아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돌이켜 보니 8년째 내리 소년보호재판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의 손길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 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소년보호재판을 떠나더라도 저는 여전히 이 아이들의 편입니다》

 

저의 인사발령 소식을 들은 아이들 중에는 의외의 반응을 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천10호 판사로서 자신들에게 엄중한 처분을 내리는 제가 소년보호재판을 떠난다고 하면 크게 환영해야 할 노릇인데, 상황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비행청소년들은 쓰레기 취급당하다 뭐 또 범죄자로 교도소 가면 되겠네.”

“선생님 이거 데모해야 하는 거 아니예요?”

“우리 편은 없다니까요? 왜 그런 거래요? 헬조선 진짜!!”

 

오랫동안 위기청소년들을 돌보아 오신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분노했습니다. 아이들은 잘 압니다. 천 부장판사님이 모든 힘을 다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정성을 쏟았는지. 부산에 계신 천 판사님이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며 희망을 갖게 했는지. 대한민국 위기청소년들에게 천종호 판사님은 수퍼 아이돌그룹 보다 더 유명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어른입니다. 대한민국 복지에서 가장 열악한 청소년 복지에 ‘청소년 회복지원시설’이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놓은 앞서가는 사회사업가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준 희망과 용기. 그 희망과 용기가 또 누군가에 전해지고 퍼져나가고 있음을 꼭 기억해 주십시요!!”

 

이러한 반응에 저의 서글픈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아이들과의 소통의 끈을 끊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소외되고 무시되는 아이들의 편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부디 이 아이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끊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소년보호재판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소년법의 목적은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의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문제아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소년법이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사실을 확정하고 형을 정하여 선고하는 것만으로는 소년법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넘어 건전한 사회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 소년법의 목적입니다. 소년법에서 소년보호처분 이후의 집행감독권을 교정당국이 아니라 판사에게 주고 있는 것도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소년보호재판은 소년법에 기초를 둔 재판이므로 그 목적도 소년법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소년법의 목적에 충실하려면 소년보호재판에서 아이들을 재판의 객체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후견사업을 실시할 때도 사업 자체나 사업을 실시하는 사람들에 중점이 두어져서는 안 되고 그 중심에는 늘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소년보호재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비행사실보다는 소년이라는 인간 자체입니다. ‘인간’과 ‘청소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소년보호재판을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재판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년보호재판을 함에 있어서는 소년의 ‘품행’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보호소년들 중에는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때문에 적정한 보살핌을 베푸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봐서는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소년보호재판은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로고스’ 외에 ‘파토스’와 ‘에토스’를 가지고 재판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아비와 어미의 심정이란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때까지 엄정함과 자상스러움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엄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처분을 내리고, 때로는 자상스러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앞으로 소년보호재판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부디 이러한 마음으로 재판에 임해주실 것을 8년간 소년들과 동고동락해온 자로서 감히 부탁드립니다.

 

●《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만 하는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원하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만할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오래전 폐쇄되었다고 생각했던 길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자유롭고 싶으나 지난 8년간 소년재판만 해 온 탓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진퇴양난의 늪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괴로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저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가는 가족들, 병든 모친과 장모님, 가난한 형제들을 생각하니 도무지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위기를 잘 이겨낼 지혜와 인내와 용기를 제게 주시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2월 21일

천종호 판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