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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이런 성명서, 참으로 심란하고 아픈 시대다

by 농자천하/ 2018. 1. 31.

이런 성명서, 참으로 심란하고 아픈 시대다

 

아래의 글은 모교 게시판에 올라온

 

장신대 신대원 113기 후배들의 성명서,

 

부끄럽고 가난한 선배들이 이 성명서로

 

너도 나도 소리 없이 울고 있다.

 


 

 

- 쉽게 씌어진 성명서 -

 

: 멍성교회 세습을 반대하며

 

 

 

“.......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

 

 

 

『거꾸로 읽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명일동의 시끄러운 잡음 때문에 시국이 어수선한데, 한 기독청년의 옛 시마저 거꾸로 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제 치하의 잔혹한 시대 속에서 ‘부모의 돈’으로 유학하며,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슬픈 천명’을 ‘부끄럽다’ 고백하면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철저히 자신과 시대의 어둠에 저항했던 윤동주의 시에서...

 

 

삶이 없는 설교가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삶의 핑계에 홀로 침전하면서,

 

동무라 칭했던 작지만 올바른 예언의 목소리들은 하나, 둘 ‘굳이’ 잃어버리고,

 

불법 청빙안을 끼고 동조하는 노회원들의 동의 받으러 가는 한 교회의 역설,

 

암내와 구린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담임 목사직을 받는

 

한 목사의 모순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아비의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교인과 건물을 받아’,

 

‘목회는 하기 어렵다는 데 세습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가득, 부끄러운 마음으로’ ‘명일동에 일었던 세습의 바람을 괴로워한다.’, 또한 멍성교회의 치졸한 부자세습과 동남노회의 불법적인 세습 승인을 철저히 규탄한다. 그리고 통합측 총회의 지극히 올바른 치리와 모든 노회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적극적인 세습 반대 참여를 강력히 촉구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1~3절, 개역개정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장 18절, 개역개정판)

 

 

세습방지법은 ‘인간이 신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던 애굽의 질서’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되심’을 고백하는 신·구약의 진리를 담아 제정된 법이다. 이 법도는 ‘인간들의 총회가 정한 법도’여서가 아니라 오직 ‘공의로운 성경의 진리’를 담고 있는 법도이기에, 지극히 선하고 올바른 도리이며, 하나님의 총회의 거룩한 결의인 것이다.

 

 

따라서 멍성교회와 동남노회가 총회의 세습방지법을 무시하며, 불법적인 청빙안을 가결하고 세습을 강행한 것은 단순히 총회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태에 그치지 않는다. 이 불법적인 작태는 세습방지법이 담고 있는 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는 성경의 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불신앙과 불의의 극치’인 것이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가리켜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 칭했던 아론의 후계를 자처하며, 자신의 탐욕을 ‘큰 십자가’라 칭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화하였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위해 공정한 절차를 무시하며 정의와 공의를 짓밟았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경건한 처소 한 복판에서 인간 지도자를 세우고는 이 땅에서 너희를 인도할 ‘하나’님이라 칭하니, 어찌 이 추악한 행위를 규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사야 14장 12절)

 

 

새벽기도로 아침을 깨우며 새벽의 밝은 별처럼, 명성(明星)과 같던 한 교회가 땅에 떨어졌다. 바벨론의 교만을 따라 패망의 선봉에 섰으며, 세습의 범죄로 열국을 엎은 자가 되어 모든 언론의 비판과 세간의 조롱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스스로 불법과 불의의 처소가 되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

 

 

애통하다. 애통하고 또 애통할 따름이다. 우리의 애통은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려니와, 교회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슬픔은 도대체 누가 위로한단 말인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 교회가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시는도다.” 오직 유일한 위로는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일 뿐...

 

 

멍성교회는 죽음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세습을 철회하십시오.

 

 

멍성교회는 어서 세습을 철회하십시오.

 

동남노회는 김하나 목사 청빙가결안을 폐기하고 노회를 새롭게 하십시오.

 

대한예수장로회 통합측 총회는 멍성교회와 동남노회를 철저히 치리하십시오.

 

 

2017년 11월 30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13기

 

   

 

 

쉽게 씌어진 詩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줄 알면서도한 줄 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學費 封套를 받아 大學 노트를 끼고늙은 敎授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까?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握手.  (1942년 6월 3일 동경에서/2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