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 2nd, 왜 "예수 르네상스" (1부)
/ 2015.2.11 (별권2호), 기독교 개혁;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 홍정수(갈릴리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한아름교회 목사)
1. 나는 지난 50년 동안, 한 가지 질문으로 신학을 해 왔다. 그래서 이 밖의 질문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2. 미국 유학이 그 문제를 풀어주진 못하였다.
3. 해방(민중)신학이 매혹적이긴 하지만, 그들은 예수보다는 맑스를 따른다. 즉 예수를 모른다.
4. 내가 어설프게 발견한 예수를 <예수 세미나>, 그리고 실은 그 이전에 이미 바울 선생님이 보다 선명하게...
5. 이것은 내 인상의 심각한 실패의 여정이나, 부끄러운 건 결코 아니다. 찬미 예수 선생님! "갈릴리학교"는 하늘 소명 받은 자를 찾고 있다.
구원은 자존심이다. 왕따? 폭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 십여만의 청춘들이 한 순간에 쓰나미에 밀려, 사라졌을 때, 한 승려가 말했다; "그런 비명횡사,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인가요? 왜들 그리 난리지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제자가 감히 이런 무정한 말을?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픈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으니! 그로부터 한 참,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그 승려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ㅓㅅ이다. 그런 대형참사는 전체로든 인재로든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대형참사 중 하나가 바로 지금의 지구촌 종교 지도자들의 무지몽매 현상이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중생들의 열심이다.
내가 1978년 첨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한국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예수 선생님의 정체를 더 깊이 알아보려던 참이었었다. 그런데 몇 년 간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서양 신학자들은 엉터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쓸쓸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두환 씨가 일을 저지른 그 다음 해였다. 최루탄 가스 냄새를 일 주일 멀다 하고, 맡으면서, 감신대학에서 내 나름의 예수 이야기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나를 내몬 사건의 발단은,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나의 예수 이야기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체험이었다. 말 되는 이야기의 예수, 그 예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복음이라는 걸 나는 체험으로 알았다. 비록 젊은 놈들(신학생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목사님들과 감독님들, 그리고 동료 교수들, 그들은 비록 알앋드지 못하지만 말이다.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였다면, 내 어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성공이 성공 아니요, 실패가 실패 아니다, 결코.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자. 70년대 말, 아직 심각한 냉전 시대, 기독교가 표방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그것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는 사유재산을 심각하게 변호해야 했던 시절, 나는 사회 정의 문제보다는, 나는 <나는 누구인가?>를 줄곧 물었다. 나는 예수 없이 태어나, 20년을 잘 살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어, 그들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 모든 걸 접고, 예수 공부에 나선 터였다.
당시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던 교수, 오그덴이라는 신학자와, (강의는 물론) 글로, 씨름을 하였다: "나는 예수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였다: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알아봤자 소용없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정말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는 고딕체로 대답하였다: "JESUS Question, 그건 네 몫이다." 뭐라고? (신약성서학이 아니라) 조직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그런 주문을?
그래도 나는 그에게서 중대한 것을 배웠다: 1) 예수를 제대로 알려면, 모든 자료들 중 가장 초기 자료에 의존하라(이것은 당연코 바울의 편지들이다). 2) 조직신학자는 성서학을 혼자 할 수 없으니, 코드가 맞는 신약학자 한 사람을 선택하라(나는 지금은 예수 세미나 학파를 주고 참조한다). 그리고 나는 반복하여 마가복음만 읽었다. 그것도 전반부 집중으로! 왜? 수반부는 죽는 이야기인데, 나는 살고자 하여, 예수를 찾는 것이고, 마가복음의 전반부만 읽어도 예수의 정체는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즘은 바울 서신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읽는다. 하여, <기독교 5경>을 설정하였다. 곧 (데살로니가 전서는 내용 빈약, 생략하고)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로마서, 그리고 마가복음, 이것이 나를 구원해 주는, 말되는 예수 이야기를 제공하는 자료들, 곧 기독교 5경이다.
주제를 잠시 바꿔, 당시의 한국을 대표하던 신학 곧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유사하였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무지 엉성하였다(아마 조직신학자들이 가담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중신학자들과는 교분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정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맑스를 말하고 있었지, "예수의 독특한 메시지"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에를 들면, <예수는 민중이다. 혹은 그 역(逆), 그리고 군중이 민중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나를 구원해 줄, 기독교의 "독특한" 예수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예수를 알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결국 지금의 한국기독교연구소를, 외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지만,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 이야기, 곧 기독교의 독특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나의 <예수 르네상스> 운동의 시작은 바로 1988년. 그해 나는 분단의 또 다른 나라 중심 도시, 동베를린을 방문한 바 있다.
** "나는 예수를 찾는다" - 이것은 불트만의 구호를 내가 부연한 것이다. 오그덴은 불트만을 비판하였지만, 그 학파이다. 인간의 실존과 지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는 전혀 다르다.
1)예수 알기 불가능=자료 빈곤,
2)불필요-서양인들은 '이미 믿음 안에' 있으니, 구원 걱정 뚝!
3)소용없다=역사적 진실은 우연에 불과하다!
이 제3의 항목은 오그덴의 사상의 핵심을 내 나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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