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 3rd, 왜 "예수 르네상스" (2부)
/ 2015.2.19 (별권3호), <갈릴리신학대학원>을 세우다
/ 홍정수(갈릴리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한아름교회 목사)
<한 마디로>
목사님들은 사람이신 예수를 겁낸다.
4. 내가 어설프게 발견한 예수를 <예수 세미나>가! 유레카!
5. 이것은 내 인생의 심각한 실패의 여정이나, 부끄러운 건 결코 아니다. 찬미 예수 선생님! "갈릴리신학교"는 하늘 소명 받은 자를 찾고 있다.
"저는 (공자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 크리스찬이 되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죄송하다.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걸 모르고, 이것과 저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확신 때문에, "중립은 공범"이라는 해방신학의 가르침 때문에, 감리교신학대학이 학교 운영자인 "학장"의 세도를 둘러싼 피나는 투쟁을 하고 있을 적(1981년부터 시작된 이 싸움은 모양을 바꾸면서 상당히 긴 세월 동안 감리교회까지 망쳐버렸다), 나는 한 편을 들었다. 그 때의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두 교수(나의 스승)가 죽일 듯이 서로 싸웠고, 학생과 교수들도 나름대로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했다. P교수(당시 학장)가 두 번째 위기를 맞고 있을 무렵, 나의 은사이신 런년 박사님께서 마침 안식년으로 감신대에서 강의를 하며 쉬고 계셨다. 그런데 P 교수의 "사주"(?)를 받고, 나를 불러 하시는 말씀이시다: 여기는 한국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장유유서라 질서가 있다는데, 네 어찌 제자가 되어 스승을 배신하느냐? (이 놈!)
나의 대답은 단순했다: "저는 (공자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 크리스찬이 되고 싶습니다." 은사님은 두 번 다시 나를 괴롭하지 않으셨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공자를 따르는 것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데, 어느 기독교인이 이를 비난할 수 있으랴! 아직 30대, 철없는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어른을 존중하는 것과 어른에게 맹종하는 것은 다른 것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야심에 따라 처신할 것이고, 그 후에 닥쳐올 모든 불이익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어느 한 편을 든 것은 천추의 한이 되지만(그게 그거니까!), 공자의 "질서(기득권)"가 아니라 낮은 자를 돌보시는 예수님의 모범(나의 양심)을 선택한 그 순간은 바른 결정이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제자들이 민주화 데모를 모의 혹은 참여하겠다고 자문을 구하러 오면, 늘 한결같은 대답을 주었다. 양심은 너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힘 가진 자들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니 군중심리가 아니라, 단독자로서의 네 양심의 명령을 따르고, 그 후에는 후회없이, 모든 것을 감수하라. 준비됐으면 행동하라! (이것이 선동인가! 그럴지도. 그러나 예수 신학자가 어떻게 달리 가르칠 수 있는가?)
이렇게 "편을 드는 삶"은 결국, 눈치 보는 약사빠른 삶에 비하여, 너무 큰 것을 대가로 빼앗아갔다. "빨간 줄 간"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신학교 동료들은 물론이요, 절대다수의 제자들까지도 나를 다시는 사람 취급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어떻게? "예수 이야기"라는 노래는 나만 부를 수 있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문교부 산하 교수 심의회의 판결에 따라, 교수직에서 해임된 후, 나는 계속 예수를 노래했다. 처음에는 강남 신사동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검사, 변호사 몇몇과 더불어, 그리고 나는 놀랐다. 내가 풀이하는 방식의 사람 예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물론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감리교단 안의 계속되는 패싸움은 이미 죽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고 (편들어 달라고 혹은 배후 조정자라고 더 죽이려고), 급기야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강요당한 유배였다. 1994년의 일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밭에 묻힌 보화"를 사들인 운 좋은 상인처럼, 1994년부터 <예수 세미나> 학파에서 그 동안의 예수 연구물 자료들을 마구 출판해 내기 시작하였다.
유레카! 유레카!
우리들(김준우, 한인철 함께)은, 그 옛날의 알키메데스처럼, 기뻐 날뛰었다: 이제 예수 이야기를 하게 되었구나!
그 동안의 예수는, 우리들과는 신분(아니, 성분)이 다른 존재였고, 우리가 그냥 경배할 대상이었지, 우리 속인들 혹은 죄인들의 삶의 모범은 전혀 아니었다. "제도 종교"가 돼버린 기도교 속에 신격화돼 있던 예수, 그 예수께서 미라를 벗고, 무덤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처음에 그렇게 믿었다.) 사람 예수를 환영해 주는 이들의 수는 작았지만, 이곳저곳에서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세월 보내다가 탄생한 아기가 바로 지금의 <한아름교회>이다. 즉 예수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작은 동아리가 감히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정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 세미나>의 주축이 신약학자들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호나영하지만, 그들의 세부 작업에 대하여는 공감하지 못하는 대목도 있고(종말론 경시), 자기들을 "역사학자"로 규정하는 성서학자들의 방법론적 한계(예수를 신앙 대상으로 고백한 이들의 정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함)에 대한 불만, 지금은 낡아버린 사상(사후의 보상 기대)의 지적이 없음도 아쉽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엄청난 고고학적/비교0문화적 탐구(주로 신약성서의 배경), 외경까지 함께 비교하여 읽어내 준, 복음서들의 비교-정독하기의 결과물들은 나를 충격적 감동, 그리고 지속적 영감을 주고 있다. 안정, 지위, 돈보다는 학문의 자유를 더 귀하게 여긴 두 학자, 펑크(개신교)와 크로산(가톨릭)이라는 두 중심 인물에 대하여 두고두고 감사한다.
30대에도 나는 무식했다. 세상을 몰랐다. 그런데 50대, 그리고 지금 60대에도 역시 무식하다. 예수쟁이들이 예수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정말이지 나는 몰랐다. 내가 50년 동안 찾아온 예수님의 고유한 메시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관심있는 목회자들이 그렇게 희귀하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2004년, 갈릴리신학교의 재단인 예수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목회자들을 만나, 숱한 밤 지새우며, 예수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질문은 늘 같았다: "그래서 당신네 (예수 이야기를 하는) 교회는 얼마나 큰 가요?" 그래요, 우리 교회는 잘 먹고 잘 살만큼 넉넉한 사례를 하지 못한다. 그래도 지난 20년 동안, 낯선 유배지에서 사람이신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잘 살았다. 존심 상하지 않고, 더 필요한 게 있나요? 오늘의 나의 나 됨을 하늘 은총으로 겨험하는 (바울) 해방, 넉넉하지 않나요? "넌 자식이 없어 그 따위 소리를 해!" 예, 오래 전에 감신대 동료들이 퍼붓던 욕입니다. 달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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