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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신학운동]

[신학쪽지 01] 왜, "예수 르네상스"인가? 4

by 농민만세 2015. 3. 4.

[쪽지]에레모스 01 "예수 르네상스" (4부)

 

 

/ 2015.3.4

 

/ 홍정수(갈릴리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LA한아름교회 목사)

 

 

<한 마디로> 사금파리 신학자(Ph.D.)들을 불쌍히 여겨라, 중환자들이니까.

 

병명 : 1. 타자를 위한 삶 / 2. 사금파리 증후군

 

 

내 어린 시절, 강원도 촌놈들은, 사기그릇이 깨어지고 나면, 그 반짝이는 조각들을 적당히 다듬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우리는 그것을 '사금파리'라고 불렀다. 지구촌의 신학교 교수들, 그 Ph.D.들은 단적으로 사금파리들이다(나 자신도 물론).

 

김영삼 장로 정부 출범 벽두, 문교부 심의회라는 기관의 최종 심판을 받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친구들의 아우성을 피하여, 결국 이민자라는 아주 특별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21년 전 일이다. 그 이민 생활 몇 해를 지나, 결국 내가 평생을 바쳐 일하게 되리라 믿어왔던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났을 때, 나는 이민 목회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주일날 설교단에서 얼른 내려오고 싶은 심정을 숨기지 못한다. 준비되지 않은 그 자리가 내게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 하려면 조금은 성실하게 해야겠다고 맘 고쳐먹고 났을 때, 아주 좋은 세미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예배를 통한 교회 개혁>! 조직신학 밖에 모르면서 감히 목회자의 옷을 입고 행세를 하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세미나였다. GTU에서 막 은퇴한 영성 대가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3일간 벌이는 전문적인 유료 세미나였다. 역사적 접근은 기본이요, 세계 각국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예배 의식에 대한 동영상까지 보여주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 세미나 강사는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아주 중대한 핵심적 질문,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배를 통하여 참여자들과 인도자들은 각각 무엇을 얻는가? "잘" 한다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심각한 질문 없이,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예배들에 대한 풍경을 안내해 주었을 뿐이다. 결국 나는 그 비밀을 알고 말았다. 그 지역의 학생_목사들에게 나중에 물어봤다: "저 교수님, 평신도이시지요?"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저 교수님, 고정 출석 교회가 있나요?" "아니요!"

 

이게 세계 신학계의 풍조 단면이다. 이름하여 "우드러프(Woodruff)" 풍조이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던 당시 메모리대학은 돈이 많았다. 우드러프 씨가 미국 역사상 가장 고액의 기부금을 학교에 기증한 덕이다. 그는 바로 코카콜라의 첫 레시피를 작성한 회장이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 전설처럼 알려진 비밀이 있다. "회장님은 코카콜라를 제조, 팔기는 하지만, 자기 가족들에게는 섭취 엄금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게 "타자를 위한 삶"의 한 전형 아닌가!

 

내가 존경하고 감동먹는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타자를 위한 존재"를 기독교자 삶의 핵심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남들을 위함"이라는 게 바로 -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다 - "위선"의 뿌리가 아니던가 말이다! 성공한 님들이 천국 티켓들을 구입하지도 않고, 그 화려하다는 황금 천국성을 서둘러 들어가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 아직도 비밀인가! 단순 기술자들이 되어버린, 신학자들, 그리고 목회자들! 그들은 우드러프 씨와 한 통속이다.

 

"나는 교회 열심히 나가, 충성 봉사한다!"하고 힘주어 말하는 한국 신학자들이 주변에 많이들 있음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 Ph.D.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은 구/신약성서와, 중간의 문헌들, 기독교 역사의 그 속 거목들, 변화무쌍한 조직신학과 윤리학들, 그리고 미국이라는 실용의 땅에서 버섯처럼 번성하기 시작한 각종 실천신학들의 장르를 두루 정통한 연 후, 당신들의 전공 분야의 전문인이 되었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바로 사금파리! a fragment)

 

이런 질문들은, 앞서간 자식처럼, 나 혼자만 가슴에 묻고 살아온 게 아니다.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와 존 캅(John Cobb) 교수 같은 이들이 진지하게 연구, 질문 제가한 바 있다. 즉 "근대 신학 교육 패러다임은 어쩔 수 없이 사금파리를 만들어낼 뿐이다." 즉 "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진 약팍한 지식인"을 만들어낼 뿐이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84년 별세)도 일찍이 간파하고 죽었다. "이제 신학(교육)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는 감신대 교수가 된 첫 해(1981), 교수회의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들 계속 공부합시다. 남의 분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들(사금파리들)에게 산산이 부서진 신학을 배워, 교회로 나가게 될 신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칩시다." 물론 묵묵부답! (학교 장사) 잘 되고 있는데, 웬 말이냐? 사금파리들이어, 부디 참회하라. 존 캅(90회 생신을 얼마 전 맞으셨단다) 선생이 쓴 어느 글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Ph.D.가 문제이다. 박사들이라 하여 자기네들이 다 아는 줄 착각하고 있다. 희망이 없다." 나는 이 사금파리 병에서 예외라는 말이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1988년, 예수 르네상스를 위하여 연구소를 시작하고, 점차 근본 치료는 신학교육(모형) 갱신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베 짜는 하느님> "초판" 부록으로, 신학교육 갱신론을 전개했었다. 그리고 쫓겨났다. 나는 할 일을 다 하였다.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찬미 예수!

 

 

(홍정수 신학쪽지는 Eremos, 즉 광야에서 부르짖는 한 조직신학자의 목소리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