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갈릴리신학운동]

[신학쪽지 0d] 왜, "예수 르네상스"인가? 3

by 농민만세 2015. 2. 26.

[쪽지] 4th "예수 르네상스" (3부) - Protestant 예수

 

 

/ 2015.2.26 (별권 4호), 기독교 개혁;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 홍정수(갈릴리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LA한아름교회 목사)

 

 

<한 마디로>

상도동 지하실에서 만난 나의 예수님

 

"종교" 혹은 죽은 혼령들에 대한 "제사" 따위엔 아주 소싯적부터 지금까지 관심 전무한 놈이 바로 나이다. 어처구니 - 이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 가 없는 목회자로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지한 무신론자들에게 늘 더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를 거의 마쳐갈 무렵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이 짓을 왜 내가 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예수 이야기가 전해 준 그 미국 사람들 중 내로라하는 신학자들도 '예수를 모른다'는데, 기독교 밖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아무 유감없이 잘 보냈고, 지금도 내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예수 없이 잘살고 있는데, 나는 과연 계속하여 '기독교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그 이유는 과연 뭐란 말인가?" (지금은 지구촌의 기독교 살리기,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소명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런 공허에 맞닥뜨리면 헤어 나올 묘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Ph. D. 과정은 아니지만, 같은 학교에서 역시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어떤 선배 목사님은, "교통사고라도 나, 창피하지 않게,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참 좋겠어요."라고, 그 허탈한 심정을 종종 토로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때 내가 발견한 탈출구 같은 위로는, 공산주의자들(당시는 아직 세계가 냉전 중!)의 삶의 자세였다. 그들은 맑스의 사적(私的) 편지들 혹은 출간된 작품들 속의 개념 하나의 연구에도 평생을 아무렇지 않게 마치는 것이었다. 나아가, "명분-당의 명령-이 문제이지, 기독교인들처럼, 죽음의 실체성을 부인하고, 살기를 참하면서, 부활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피력한 마호비치(폴란드 공산주의자 기독교인)의 글을 접하곤, "전진, 전진!"하고 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계속하여 마가복음의 예수만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고자 힘썼다.

 

특히 상도동에서, 감신대 교수 시절, 어느 지하 사무실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던 때의 마가복음 읽기 생각이 선명하다(이 때의 나의 마가복음 읽기는 바울과 연관이 없었고, 아직 [예수 세미나]는 아무런 출판물을 내지 않고 있던 때). 마가복음을 넘기면 기적, 넘기면 기적! 내가 읽는 마가복음 속에서는 기적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신 내 아버님께는, 내가 뭐라고 기도를 드리든 말든,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 교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를 진지하게 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서학자는 결코 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논리적 사유 방식을 전공해 온 나의 조직신학 방법론은 마가복음 속의 예수를 저절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가슴 아픈 개척교회 목회 현장 경험이 마가복음 속의 예수를 발견하게 해 준 은총의 장이었다.

 

안식일을 골라(예외가 몇 건 있지만) 천벌에 해당하는 병자 하나만 - 베데스다 못가의 사건은 극명한 샘플이다! - 고쳐 주고는 훌쩍 다른 무대로 이동해 가는 예수를 상상해 보라. 곧 나 혹은 나의 가족, 내 친구의 천형을 깡그리 외면하는 그 예수, 그 예수를 당신들은 "메시야" 혹은 구원자, 혹은 선생으로 모실 수 있겠는가? 세월호에서 자식 읽은 유족들이, 거기서 구출 받은 자들이 자기 가족을 살려줬다고 믿고 찬양하는 바로 그 메시야를, 나의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겠는가? 내 경험으로는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옆집 아기는 고쳐주고, 내 아기는 실해하는 천사라면, 그 천사는 악마이지, 신의 천사가 아니다. 나의 양심과 이성으로는 이런 이치는 바꾸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상도동 경험을 통하여, 눈을 뜨게 해 준 "나의 예수", 그 예수는 지병 사건을 계기로 "설교"라는 신학적 행동 - 이것을 어렵게 말하여, "해석학적 작업"이라 한다 - 을 하고 계셨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 생각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함이 없다.

 

이렇게 마가복음을 읽고 나면, 나의 예수, 그 예수의 삶 스타일의 으뜸은 높고 낮은 사람들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고정관념들, 기성 체제의 이념들을 철저(radical)하게 재검토하는 생동이다. 예수는 Protestant 원조이시다(Catholic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데, 이는 나중에...). 신의 이름으로 선포된 이념들, 강령들, 계시들에 대하여 "(당하는) 사람들 중심(주인)"으로 전면 재해석해 내신 분, 바로 그분이 나의 예수님이시다.

 

바울 서신들을 정독하고 나서, 마가복음을 다시 읽어보니, 이런 예수의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그 옛날 예수의 처음, 직계 제자들, 바로 "예루살렘학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와 함께 살았던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모를 수 있었다는 것인가? 주일(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날)마다 예수님 이름을 들먹이며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오늘날 크고 작은 목회자들이 어떻게 예수를 그토록 모른다는 말인가? "과연 모르는가? 알고도 외면하는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말하리라: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예수 무지(無知)는 무죄(無罪)!"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 이름을 운운하는 이들이 예수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 알고도 외면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 옛날 처음 제자들도 그랬듯이,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예수가 돈이나 성공, 권세나 명예보다 더 좋다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여기에 바로 "예수 르네상스"의 요청 명분이 있다. 즉 그 사람 예수, the Protestant였던 그 사람 예수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참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단지 기독교의 "원형-복원"이라는 한심스런 기득권자들의 보수-회귀에 편승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 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