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왜 농목으로 사나? 17”
그의 말만 듣고 아무것도 모르는 몇몇 교인들이 ‘이 교회 뿌리인 장로를 왜 내보냈냐?’ ‘이 교회를 누구 맘대로 하는 거냐?’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참다못해 분명히 말했다. “이 교회의 뿌리라고요? 주님이 아니시고? 그럼 다른 교인들은 뭐요? 그렇게 경계해 줬어도 자기 욕심으로 일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자기 발로 나간 건데 그것도 또 내 잘못이라고 흔듭니까?!”
나는 사실 이 어이없는 일이 이제라도 다시 교회법으로 제대로 처리되기를 바란다. 이 칼럼을 보고 누군가 이 일을 다시 문제 삼기를 기대한다. 그 당사자는 물론 그 교회의 교인들과 또 우리 지역에서 공연히 연루되었던 이들, 특히 우리 노회 안에서 그 간교하고 사사로운 유혹에 넘어가 교회 하나를 거의 풍비박산 내어 복음 선교의 문을 가로막은 일에 일조한 목사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책임을 지기는커녕 자기 죄를 자복한 이는 아무도 없다.
무자비하게 징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명정대한 정의를 세워야만 비슷한 유혹과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님의 교회들을 든든히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대내외적으로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교회를 원망하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공통으로 들은 말이 있다. “여러 사람 피눈물 나게 하는 짓을 왜 하느님은 그냥 두냐?”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파렴치한 악행에 벌을 내려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탄식이지만 정작 귀 기울여 듣는 이는 거의 없다.
내가 이 기막힌 일로 근 1년 동안 시달렸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어이없는 일로 우리 교회가 노회와 지역사회에서 또 한 번 온갖 구설에 오르내렸고 또 그만큼 복음을 전하며 성장할 기회가 접히고 말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적 같은 기회를 주셨던 이런저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미처 우리의 지혜가 부족해서, 어리석은 의심, 신뢰 부족, 결단력과 실천력의 부족 그리고 사욕을 탐하는 이들로 인해 그 기회들을 놓친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제대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탄식으로 정말 피눈물이 난다.
우리는 만 4년 동안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지역 청소년-아동보호센터와 작은 도서관 등을 결국, 지역사회 기관으로 정식 인가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만큼 진력했었기에 좌절도 깊었다. 더 무엇을 다시 할 수도 없고 그대로 또 이임을 원하는 교회로 떠나버릴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심장 부정맥이 심각할 정도로 찾아온 것이었다. 소진된 몸과 마음은 대책 없이 약해졌고 병은 깊어 갔다.
그럴 때쯤, 몇 년 동안 도전해 보자고 했던 메주와 된장을 여전도회에서 함께 만들어 보겠고 했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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